지난날 한·중간의 역사는 중국이 한반도를 침략하거나 한반도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했을 때 왕조의 멸망 또는 붕괴를 초래하거나 국력만 낭비하고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 주중대사의 신분으로 <떠오르는 용 중국>이라는 책을 써 화제가 된 김하중 씨는 이러한 한·중간의 역사적 현상을 중국의 한반도 징크스라 규정했다.
1. 고구려 원정 실패로 망한 수(隋)
6세기 말 남북조를 통일한 수의 문제(文帝)는 당시 요동평원에서 강력한 국력을 형성하고 있던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지만 전염병의 발병으로 중도에 회군하고 만다. 다음 제위에 오른 수의 양제(煬帝)가 고구려와 돌궐족의 연합에 대비하고 백제와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한다는 구실로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다. 서기 612년 수양제가 1차 정벌을 위해 동원한 군대는 정규군 130만,예비 병력 200만이었다. 그리고 곡량을 운반하는 인부들이 600∼700만명, 군대 행렬의 길이는 960 리나 되었다. 이때 수나라 장수 우문술이 이끄는 35만의 군대가 평양을 침공했으나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유도 작전으로 살수에서 대패하고 살아서 중국으로 돌아간 병사가 2,700여 명에 불과했다. 서기 613년 수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제2차 침공을 단행했으나 국내의 농민봉기 발발로 철군했고 614년 다시 제3차 침공을 시도했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 준비는 국력의 쇠퇴를 불러왔으며 왕조 건립 38년만에 수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2. 당태종(唐太宗)의 큰 과오로 기록된 고구려 침공
서기 626년 왕위에 오른 당태종은 수나라의 전례를 거울삼아 초기엔 고구려 침공을 자제한다. 그러나 정관 말년인 서기 645년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은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태종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645년 당태종은 10만의 원정군을 편성해 제1차 고구려 침략을 단행했지만 3개월 가량의 안시성 싸움에서 군량이 떨어지고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자 결국 철군하였고 이 싸움에서 당태종 자신도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복수를 다짐하던 당태종은 2년 뒤인 647년, 제2차 고구려 침략을 단행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당태종은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채 죽고 만다. 당태종의 무리한 고구려 정벌 시도는 당나라 국력의 막대한 손실과 민생이 피폐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중국 역사는 이를 당태종의 커다란 과오로 기록하고 있다.
3.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명(明)의 임진왜란 파병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조선이 원군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자국의 이익과 방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파병을 결정했으며 낙상지(駱尙志), 사대수(査大受), 이여송(李如松) 등의 장수를 앞세우고 연인원 40만명을 조선으로 파병했다.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군사들의 극심한 수탈과 착취는 조선 민중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고 명군(明軍)은 군 작전권을 움켜쥔채 방어적인 전투를 치르는 데만 급급했다. 7년 간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되었고 황실의 사치와 낭비로 국가 재정까지 어려움에 빠진 명나라는 결국 여진족에게 왕조를 빼앗기게 되었다.
4. 과욕과 자만으로 몰락한 청(淸)
19세기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예속화 정책 을 펴며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강화해 갔다. 그러나 청나라의 식민적 지배와 관리의 압제에 시달려온 농민들이 동학농민봉기를 일으키자 청나라는 일본보다 먼저 조선을 장악할 욕심에 조선 파병을 결정했다. 1894년 청은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한 뒤 출병을 일본측에 통지했다. 결국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일본과 청나라간의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서태후의 통치 아래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청나라는 결국 일본에게 패하게 되고 자신들의 실력을 과신하고 한반도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한 결과 국제사회에서 약점이 노출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서구 열강의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분할이 이루어졌으며 청조가 붕괴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5. 고립을 자처한 한국전 참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과 북한·소련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애초 중국은 대만을 점령한뒤 한반도 정세에 개입하고자 했으나 6·25의 발발로 대외정책을 수정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70여만 명의 인명손실을 입었고 결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로부터도 배척받는 신세가 되었다.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으로 인해 폐쇄적 정책을 추진하던 중국은 결국 문화대혁명과 같은 암흑기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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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짓는 태양 | 글쓴이 : 미소짓는 태양 |
출처 : 한반도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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