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부터 써온 말인 ‘서울’은 ‘서벌’ 또는 ‘서라벌’이 그 바탕일
것으로 보인다. 언어학자 고 양주동 님이 한글로 풀이한 신라 시대의 향가 <처용가(處容歌)>의
‘새발(새벌)’도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말이다.
‘새벌’은 당시의 말로 ‘수도(首都)’에 해당하며, 신라 경주의 한자식
이름인 ‘서벌(徐伐)’ 또는 ‘서라벌(徐羅伐.徐耶伐)’이 바로 이 ‘새벌’의 소리빌기(音借) 표기로 보는 것이다. 학자들은 국호인 ‘신라(新羅)’나 ‘시림(始林)’도 이것이 음차된 이름으로 보고 있으며,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所夫里=부여)’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松岳)’과 태봉의 수도인 ‘철원(鐵原)’ 등도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의 뜻인 이 ‘서벌-새벌’은 그 뒤로 조금씩 음이 변하면서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훈민정음이 나오고 난 후의 조선시대의 문헌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문헌들에서는 지금의 ‘서울’이라는 말이 ‘셔블’ ‘셔울’ 등으로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보아서 신라 초 이래로 ‘머릿고을(首都)’의 개념으로 계속 써왔던 ‘서울’이라는 말은 ‘새벌’ 또는 ‘서벌(서블)’이 소리 변화 과정을 거쳐 정착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기 이전의 서울의 공식 명칭은 한양(漢陽)이었다. 이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써온 것이다. 삼국 초기에 서울은 백제의 수도로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불렀다. 그뒤,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고 나서 ‘한산주(漢山州)’라고 불렀으며, 경덕왕 때에 이르러 지금의 서울 지역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 이 지역을 ‘양주(楊州)’라고 개칭, 지방 군현으로 존속시켜 왔다. 1067년에 삼경(三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한 서울은 행정구획의 단위로 정치적인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고려 25대 충렬왕 34년(1308)에 서울은 ‘한양부(漢陽府)’가 된다.
조선 태조 4년(1396) 6월부터 결정된 ‘한성부(漢城府)’는 약 5백 년동안의 공식 지명이었다. 그러나 민중 속에서는 오랫동안 불려 왔던 ‘한양’ 또는 ‘서울’이란 말이 주로 통용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의해 서울은 공식적으로는 ‘경성(京城)’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말았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서울시’로 되면서,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글식 법정 지명이 나오는 역사적 계기가 됐다. 다음 해 8월에 와서 서울은 자유 특별시로 승격되었다. 그렇지만, 신라 때부터 머릿도시의 개념으로 겨레의 생각 속에 깊이 뿌리박아 온 ‘서울’이란 말은 어느 한 곳의 땅이름이기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 도읍지가 되든 보통 명사처럼 붙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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