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형 처형당하는 장면 맨 앞서 지켜봐야 했는데…”
- “이상하게도 눈물이 안 나”
북한‘최악의 수용소’탈출 한국 온 신동혁씨 수기집 펴내
- 안용현 기자(글) justice@chosun.com
이태경 객원기자(사진) ecaro@chosun.com 입력 : 2007.10.24 00:50 / 수정 : 2007.10.24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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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한다, 행복하다, 즐겁다, 불행하다, 억울하다, 저항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릴때부터 작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단어와 덧셈·뺄셈만을 학습한 채 노동 현장에서 주먹과 몽둥이 아래 노예로 사육됐다.”
북한 내 ‘최악의 수용소’로 불리는 평남 개천 정치범수용소(14호 관리소)에서 태어나 작년 탈북에 성공한 신동혁(25)씨가 23일 수기집 ‘북한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 세상 밖으로 나오다’를 출간했다. 신씨는 이날 서울 정동 배재대 학술지원센터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누구인지 모르고 24년을 살았을 만큼 개천수용소는 완전통제구역”이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1965년 ‘형제가 6·25 때 월남했다’는 죄목으로 수용소에 끌려갔다. 어머니가 끌려온 이유는 모른다.
신씨는 책에서 “어머니와 형이 사형당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고 썼다. 그는 96년 4월 수용소 내 감옥으로 끌려가 어머니와 형(74년생)이 탈출하려다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위부원들은 14살이던 그의 손·발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등 밑에 화로를 옮겨 놓았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의 화상을 입었지만, 감방 동료가 식사 때 나온 소금국으로 상처를 씻겨줘 두 달 만에 몸을 움직였다고 했다.
그해 11월 신씨는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와 형의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맨 앞에서 어머니가 교수형, 형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아버지는 말 없이 눈물을 쏟았지만 신씨는 “이상하게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개천수용소의 경우, 결혼은 일종의 ‘포상’이다. 수용소 내 25세 이상 남자와 23세 이상 여자 중에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 결혼을 시킨다. 신씨는 “과거에는 30~40% 정도 결혼을 했는데 요즘은 60% 정도 결혼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신혼 때 5일을 제외하면 남자는 기숙사에서 살아야 한다. 아이는 인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는 12살까지만 어머니와 생활한다. 중학교부터는 수용소 내 농장과 공장, 탄광으로 흩어져 집단 생활을 한다. 신씨는 2004년 탈북 경험자가 체포돼 수용소에 오면서 ‘바깥 세상’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2005년 1월 전기 철조망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 뒤 중국을 거쳐 작년 8월 한국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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