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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목사(중앙일보 07.11.15)

good해월 2007. 11. 15. 13:50
북악산 흙담집서 ‘영성 클래스’ 여는 이주연 목사 [중앙일보]
“예수를 따르는 고통, 그 자체가 영적 각성”
“슬플 땐 슬퍼하십시오 원망도, 분노도 말고 … 그냥 슬퍼하십시오”
“상당수 한국 기독교인과 교회에는 ‘깨달음’은 없고, ‘뜨거움’만 있죠.”

컴퓨터를 켜면 아침마다 날아오는 메일이 있다. ‘21C 재가수도자의 길-산마루 서신(www.sanletter.net)’이다. 짤막한 문구지만 예수를 향한 간절함과 목마름이 배어난다. 그래서 보낸 이가 궁금했다. 수소문 끝에 10일 이주연(51·마포 신공덕동 산마루교회 담임) 목사를 만났다.

이 목사는 목회 뿐 아니라 ‘기독교 사상’의 주간, 명지대 겸임교수, 감리교신학대 강사도 역임했다. 또 기독교방송에서 매일 새벽마다 ‘산마루 묵상’이란 3분짜리 영적 메시지를 1500회째 전하고 있다. 지난해 봄, 그는 북악산 골짜기에 흙담집을 고쳐지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곳을 ‘산마루골’이라고 부른다.

매주 토요일 아침, 이곳에서는 ‘영성 운동’이 피어난다. 이 목사가 여기서 ‘산마루 영성클래스’를 열기 때문이다. 희망자는 누구나 환영한다. “주제는 오직 ‘산상설교’의 말씀이죠. 그걸 들고 묵상을 합니다.” 그런데 방식이 독특하다. 매주 산상설교 중 딱 한 구절만 집어들기 때문이다. “너무 짧지않느냐?”는 물음에 이 목사는 고개를 저었다. “성경의 영적 결론은 모두 산상설교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꿰뚫어 묵상해보면 알게 되죠. 구절은 짧아도, 그 깊이는 끝이 없습니다.”

‘산마루 영성클래스’에서 묵상을 마친 이주연 목사와 참가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목사는 ‘슬픔’에 대한 구절을 뽑았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참가자들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씀’ 속으로 잠겼다.
이 목사는 ‘슬픔’에 대해 묵상 지도했다. “‘슬퍼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인간사에서 겪는 가장 뼈아픈 슬픔, 창자를 끊는 듯한 고통을 뜻합니다. 그러나 슬플 때에는 슬퍼하십시오. 원망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슬퍼하십시오. 나만 당하는 것이라고 버티지 마십시오. 그냥 슬퍼하십시오.”

뜻밖이었다. ‘복’을 빌고, ‘성공’을 비는 기도와 달랐다. ‘슬픔’과 ‘고통’이 나를, 나의 가족을 비켜가게 해달라는 식의 기도가 아니었다. “제철 음식을 먹어야 건강하죠. 인생의 모든 처지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삶이 강건하게 됩니다.”

듣고나니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목사님이 찾는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이 목사는 불쑥 ‘간디’ 얘기를 꺼냈다. “한 영국인이 힌두교도인 간디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졌죠. ‘당신은 크리스천입니까?’ 그러자 간디가 대답했죠. ‘나는 아직 예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 수 없기에 크리스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목사는 이 말이 말장난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간디 얘길 하나 더 꺼냈다.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서 퇴각할 때였다. 간디는 떠나가는 영국군을 향해 이런 말을 던졌다고 한다. ‘당신들이 만든 예수는 가져가고, 성경 속의 예수는 두고 가라.’ “간디의 목소리는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를 향해 던진 예언자의 음성이었죠.”

이 목사는 1930년대의 영성가 이용도 목사처럼 ‘내가 만든 예수’가 아니라 ‘성경 속의 예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산상설교 속에 바로 그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는 감리교 신학대를 다닐 때도 ‘산상설교’를 배웠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운 ‘산상설교’는 문서비평식 접근에다 지식의 대상, 연구의 대상일 뿐이었다. “내 삶을 대입하는 살아있는지침이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가 ‘산상설교’로 돌아오기까지 말이다. “저는 너댓 살 때부터 도무지 알 수 없는 ‘낯설음’에 시달렸어요. 제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이 자리가 늘 낯설게 느껴졌죠. 그래서 불안의 뜨거운 철판 위에서 살아야 했죠.”

20년 전, 어느날 밤이었다. 그는 밖에서 혼자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분명히 뒤에 누가 온 것 같았어요. 기척을 느꼈죠! 그래서 돌아봤죠. 아무도 없더군요. 달만 둥그렇게 떠있었죠. 그때 누가 저를 내려다본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때 전율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내가 그분 안에 있구나’…그건 만물이 다 살아 있다는 각성이기도 했죠. 그 순간 마음이 확 놓이더군요.” 그리고 그의 해묵은 ‘낯설음’도 사라졌다. 어딜 가든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이 일을 ‘나의 하나님 체험’이라고 불렀다.

이후 이 목사는 구도의 방향타를 ‘영성’에 맞추었다.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죠. 그걸 술·담배 안 하고, 주일과 십일조를 지키고, 적당히 정직하게 살면서, 전도하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보스처럼 여기죠. 그리고 자꾸 예수의 편을 들고, 예수편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예수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수처럼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게 ‘산상설교’를 성취하는 길이죠.”

이 목사는 그 길의 험난함도 인정했다. “힘들죠. 저도 수시로 넘어지면서 그걸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산상설교’가 우리의 양심이 되고, 우리의 영혼이 돼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산상설교의 말씀과 나, 그 사이의 간격을 그는 보라고 했다. “예수의 말씀을 행하고, 그렇게 행하는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경험이야말로 ‘영적 각성’이죠. 그리고 그 간격을 좁혀가는 게 ‘영성 훈련’이죠.”

그는 ‘수영 교본’을 예로 들었다. 수영 교본을 누가, 언제, 어떻게 썼는지는 중요치 않다고 했다. “중요한 건 실제 그 책의 가르침대로 물에 뛰어드는 겁니다. 그래서 물도 먹어 보고, 죽을 고비도 넘어보고, 물장구치다 지쳐봐야 ‘수영’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수영에 대한 ‘깨달음’이 생기죠. 성경도 그렇게 대해야죠. 그래야 성경이 먹물이 아니라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됩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2007.11.15 05:31 입력 / 2007.11.15 09:48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