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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손녀를 출가시킬 때 세속을 따르지 않고 그 철에 입을 옷만을 베와 무명으로 짓게 하고, 중국의 혼례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서 시행하였다. 오늘날 전통혼례라 부르는 예식은 퇴계가 개정한 법인데, 조정 중신들이 들고 일어나 말이 많았으나 국왕이 퇴계의 예가 우리 실정에 맞는다며 어명으로 시행케 했다. 혼수함을 종이나 남을 시켜 보내면 불결하고 세도를 부리는 나쁜 예절이라 하여 신랑의 형제들을 시켜보내되 양가 부모가 의논해서 하라고 하였다. 퇴계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닌 까다로운 의례절차에 대해 물어오면 자기 뜻대로 판단하지 않고 옛 성현의 말을 찾고 연구한 후에 그 근거에 따라 시행케 했다. 선경후중(부자를 매장할 때는 아들을 먼저 묻고 아버지는 나중에 묻음)과 후우경(제사는 아버지를 먼저 지내고 아들은 나중에 지냄)의 절차는 증자가 공자에게 물어 시행한 것인데 퇴계가 찾아내어 보급하였다. 퇴계가 벼슬 때문에 객지에 가 있을 때는 제삿날 지방을 써 붙여 놓고 배례하였으며, 귀한 음식이 생기면 변하는 것은 부모님의 지방을 써 붙이고 배례한 후에 먹었고, 마른 것은 두었다가 제사에 쓰도록 큰 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남에게는 절대로 권하지 않았다. 자기가 선생으로 사숙하는 주자가 그리 했으므로 자기는 따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사람에 따라 성의와 경우가 다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퇴계는 유가의 예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선구자였으나 제자 김취려가 예서를 편찬하도록 부탁했을 때에는 학문과 덕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였다. |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권'태극도설'과 마지막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43세 때 왕명으로 '주자대전'을 교정하면서 처음 구해 읽고 주자학의 이해를 본격적으로 심화시켰다. 이 때 그는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문을 닫아 걸고 '주자대저'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한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가 건강을 상할 까 염려하자, "이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 속에서 시원한 기운이 일어나서 더운 줄을 모르게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
어머니 박씨 부인이 퇴계 선생을 낳을 때 공자가 방문 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던 까닭에 그 집 문을 성림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문은 지금도 태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고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글을 두어 번 외워본 후에야 선생 집에 들어갔고, 선생 집 앞에서는 공손히 엎드려 스승에게 대한 인사를 엄격하게 올렸다. 이처럼 퇴계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 시초부터 성실했던 까닭에 그의 학력은 날이 갈수록 착실해 갔다. 퇴계가 8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바로 위의 형인 해가 칼에 손을 다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퇴계는 얼른 달려와 상처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그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하고 물었다. 그래도 퇴계는 여전히 울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는 아니하나,피가 이렇게 흐르느데 어찌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
퇴계는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신변에서 책을 멀리한 적이 하루도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온갖 정성을 모두 기우렸었다. 몸이 아무리 피로해도 책을 누워서 읽거나 혹은 흐트러진 자세로 읽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처럼 근엄한 독서자세는 어려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퇴계는 책을 남달리 정독하는 편이어서 무슨 책이나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연거푸 읽어 그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뜻을 완전히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결코 내놓지 않았다. |
1)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 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만약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인 까닭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 없이 타일렀던 것이다. 2) 숙부 송재공께서 진주 목사로 있었는데 둘째 형과 넷째 형이 그를 따라갔다. 선생은 형제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가끔 말하곤 하였다. 이를 듣고 모부인이 말씀하기를, "자식된 도리는 마땅히 글공부에 힘써야 하는 법이다. 너희 형들은 그러기 위해 갔는데, 어찌하여 형제 간에 떨어져 있는 괴로움만 생각하느냐?'하였다. 3)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숙부께서는 과정을 엄하게 세워서 나로 하여금 조금도 느긋하거나 예사로이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나는 가르침을 받들어 조심하고 힘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숙부께서는 가르치고 독려하시는 일에 엄격하여 잘했다고 칭찬하는 일이 적었다. 한 번은 '논어'와 그 '집주'를 초장으로부터 종편에 이르기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배송(背誦-책을 덮고 외움)하였으되 크게 칭찬하는 말씀이 없었다. 내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한 힘 때문이다."하셨다. |
퇴계는 65세 12월에 명종으로부터 특별 부름을 받았다. 참고도서 :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p407~408 |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10월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우가 형의 부하로 근무할 수 없는 제도가 있었는데 대사헌으로 있던 넷째 형 온계가 충청감사로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창건하고 떠난 지 4년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온 것이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1년 동안 있으면서 백운동 서원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 청탁을 일절 배제하는 등 공직기강을 확립하였으며, 서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 중에서 계급의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천민인 배순을 교육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퇴계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 후 전 포항공대교수인 권오봉 교수를 비롯한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매몰되어가던 배순의 정려비와 무덤을 찾아 말끔히 보수하여 1992년 11월 21일 준공 낙성하였으며 1993년 2월 25일자로 도문화재 279호로 지정되었다. 안내판은 권오봉 교수가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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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인 안도(安道)가 아들 창양을 데리고 성균관에 유학하고 있을 때다. 창양이 출생한지 6개월만에 손자 며느리가 딸을 잉태하여 젖이 끊기게 되었다. 오늘과 같이 우유로 아이를 키우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아기를 키우기가 매우 힘들었고, 창양은 영양실조로 별별 병을 다 앓았다. 그래서 도산 본댁에 유모를 구해 보도록 부탁하였다. 마침 딸 낳은 여자 종이 있어서 아기를 떼어놓고 서울로 올라오도록 일을 추진하고 있을 때 퇴계가 그 낌새를 알 게 되었다. 시어른의 엄한 법도를 알면서도 미리 아뢰지 않은 것은, 창양을 출산했을 때 '우리 집에 이 보다 더한 경사가 없다.'라고 기뻐하였으므로 증손자를 위한다면 어떤 일이든 묵인해 주리라 믿고 나중에 알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몇 달 동안만 밥물로 키운다면 이 아이도 키우고 서울 아이도 구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떼어놓고 가는 그 어미의 마음은 오죽하겠으며 서울까지 가는 동안에 이 아이는 죽고 말 것이고 젖도 막히게 될 것이다.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어미가 자식 키우는 정은 짐승도 마찬가지인데 학문을 한다는 유가의 체통으로 차마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더냐! 몇 달을 참으면 두 아이를 다 구할 수 있으니 여기 아이가 좀더 자랄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그 때 가서 데리고 가도록 하마." |
퇴계는 매일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전해지는 일기는 극히 일부분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퇴계언행록에는 일기를 보충할 만한 자기반성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
이황은 관학인 향교와 국학은 나라의 제도와 규정에 얽매이고 과거 공부에 주력하여 옳은 학문을 이룰 수 없는 반면, 서원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출세주의와 공리주의를 떠나 순수한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림들의 출세 방법이 과거를 통한 벼슬밖에 없었던 당시에 개인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위주로 하는 성리학의 학문관을 토착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이황의 아들 손자조차도 과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황이 도산서당에서 강학하던 당시에 영주에는 과거 공부를 전문으로 지도하는 사설 학원이 있었다. 이 학원은 인격 함양이나 학문이 목적이 아니라 과거에 대비하는 교육이 주목적이었다. 오늘날의 진학지도 학원 같은 성격을 띤 사설 학원이었던 것이다. |
나는 항상 오래된 병고에 사로잡혀 있으니, 비록 산에 있다 해도 마음대로 글을 읽지 못한다. 깊은 아픔을 견디며 오래 숨을 고르고 나면, 때로는 육신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편하여지며, 몸과 마음이 맑게 깨어나서, 세상을 돌아봄에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 없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이끌고 방을 나서서 '헌'(암서헌)에 이르고, '당'(정우당)을 구경하고, '단'을 거닐고 '사'(절우사)'를 찾고, 밭에 나아가 약초를 심고, 숲을 헤쳐 꽃도 따고, 혹은 돌 위에 앉아 샘물도 만져보고, '대'(천연대, 운영대)에 올라 구름도 바라보고, 혹은 물가 바위(반타석)에 기대 고기 노는 것도 구경하고, 물 위에 배를 띄우고 앉아 갈매기도 희롱하여 보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눈길 가 닿는 것마다 살펴보고, 좋은 경치를 만나 흥에 취하여 노닐다가 돌아오면, 집은 적막하게 가라앉아 있고, 책은 벽에 가득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이미 알아낸 것은 따르고 새로 찾은 것은 닦아서 마음으로 깨우치기를 기다리다가 어떤 때는 밥 먹는 것까지 잊을 정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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