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으로행복

[스크랩] 예의의 표상인 이퇴계 일화

good해월 2008. 1. 16. 12:43

1. 합리적인 관혼상제

2. 학문의 기쁨

3. 어린시절의 성품

4. 독서법

5. 가정교육

6. 명종과 퇴계

7. 배순과 퇴계

8. 증손자와 퇴계

9. 퇴계의 자기반성

10. 과거와 서원교육

11. 도산서당에서의 생활

 

 

 

 

 

1. 합리적인 관혼상제의 시행

 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손녀를 출가시킬 때 세속을 따르지 않고 그 철에 입을 옷만을 베와 무명으로 짓게 하고, 중국의 혼례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서 시행하였다. 오늘날 전통혼례라 부르는 예식은 퇴계가 개정한 법인데, 조정 중신들이 들고 일어나 말이 많았으나 국왕이 퇴계의 예가 우리 실정에 맞는다며 어명으로 시행케 했다. 혼수함을 종이나 남을 시켜 보내면 불결하고 세도를 부리는 나쁜 예절이라 하여 신랑의 형제들을 시켜보내되 양가 부모가 의논해서 하라고 하였다.

 퇴계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닌 까다로운 의례절차에 대해 물어오면 자기 뜻대로 판단하지 않고 옛 성현의 말을 찾고 연구한 후에 그 근거에 따라 시행케 했다. 선경후중(부자를 매장할 때는 아들을 먼저 묻고 아버지는 나중에 묻음)과 후우경(제사는 아버지를 먼저 지내고 아들은 나중에 지냄)의 절차는 증자가 공자에게 물어 시행한 것인데 퇴계가 찾아내어 보급하였다.

 퇴계가 벼슬 때문에 객지에 가 있을 때는 제삿날 지방을 써 붙여 놓고 배례하였으며, 귀한 음식이 생기면 변하는 것은 부모님의 지방을 써 붙이고 배례한 후에 먹었고, 마른 것은 두었다가 제사에 쓰도록 큰 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남에게는 절대로 권하지 않았다. 자기가 선생으로 사숙하는 주자가 그리 했으므로 자기는 따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사람에 따라 성의와 경우가 다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퇴계는 유가의 예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선구자였으나 제자 김취려가 예서를 편찬하도록 부탁했을 때에는 학문과 덕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였다.

 

2. 학문의 기쁨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권'태극도설'과 마지막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43세 때 왕명으로 '주자대전'을 교정하면서 처음 구해 읽고 주자학의 이해를 본격적으로 심화시켰다. 이 때 그는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문을 닫아 걸고 '주자대저'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한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가 건강을 상할 까 염려하자, "이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 속에서 시원한 기운이 일어나서 더운 줄을 모르게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주자대전'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의 편지를 통해 도학의 학문 방법을 깨닫고, 학문방법에서 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편지는 사람의 자질이 높고 낮음과 학문의 깊고 옅음에 따라 병에 맞추어 약을 주고 물건에 상응하여 저울추를 올려 놓는 방법을 쓴다. 혹은 누르고 혹은 부추키며 혹은 인도하고 혹은 구조하며, 혹은 결려하여 나아가게 하고 혹은 물리쳐 경고해 주기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퇴계의 학문과 방법이 추상적인 관념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의 만남 속에서 개개인의 절실한 상황에 따라 감동과 분발을 시킴으로써 학문을 심화시키고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의 인격적인 실현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어린 시절의 성품

 어머니 박씨 부인이 퇴계 선생을 낳을 때 공자가 방문 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던 까닭에 그 집 문을 성림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문은 지금도 태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 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만약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인 까닭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 없이 타일렀던 것이다.
 그런 관계로 퇴계는 어릴 때부터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고 동무들을 항상 온순하고 겸손하게 대해왔다.

그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고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글을 두어 번 외워본 후에야 선생 집에 들어갔고, 선생 집 앞에서는 공손히 엎드려 스승에게 대한 인사를 엄격하게 올렸다. 이처럼 퇴계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 시초부터 성실했던 까닭에 그의 학력은 날이 갈수록 착실해 갔다.

 퇴계가 8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바로 위의 형인 해가 칼에 손을 다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퇴계는 얼른 달려와 상처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그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하고 물었다. 그래도 퇴계는 여전히 울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는 아니하나,피가 이렇게 흐르느데 어찌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
그 대답 하나만 들어보아도 퇴계의 성품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인자한가를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4. 독서법

 퇴계는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신변에서 책을 멀리한 적이 하루도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온갖 정성을 모두 기우렸었다. 몸이 아무리 피로해도 책을 누워서 읽거나 혹은 흐트러진 자세로 읽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처럼 근엄한 독서자세는 어려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퇴계는 책을 남달리 정독하는 편이어서 무슨 책이나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연거푸 읽어 그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뜻을 완전히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결코 내놓지 않았다.
 일찍이 퇴계가 서울에 유학하는 중에 '주자전서'를 처음으로 읽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방문을 굳게 닫고 방안에 조용히 들어 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하루에 세 번씩 끼니때 이외에는 일체 외출을 안하고 그 책 한질 만을 수 없이 되풀이 하여 읽었다. 때 마침 그 해 여름은 몹시 무더워서 보통 사람들은 독서는커녕 서늘한 나무그늘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지경이었건만 퇴계는 그와 같은 포서도 아랑곳 안하고 방문을 굳게 닫은채 독서만 줄곧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더운 한해 여름을 꼬박 '주자전서' 읽는 일로 보냈던 것이다. 어느 친구가 퇴계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한번은 퇴계를 찾아 와서 "이 사람아! 독서가 아무리 중요하기로 건강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닌가. 요새 같은 무더위에 방문을 닫고 앉아 독서만 전념하다가는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될걸세. 독서는 생량후에 하기로 하고 이 여름에는 산수좋은 곳으로 척서라도 다녀오도록 하세!" 하고 충고 한 말이 있었다. 그러자 퇴계는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것같은 깨달음이 느껴져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에는 무한한 진리가 담겨져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상쾌해 지며 마음에 기쁨이 솟아 오를 뿐이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렇게도 말하였다. "이 책의 원주를 읽어보고 나는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방법을 알고 나니 이 책을 읽는데 더욱 흥이 일어나네, 이 책을 충분히 터득하고 나서 사서를 다시 읽어보니 성현들의 한말씀 한말씀에 새로운 깨달음이 느껴져서 나는 이제야 학문하는 길을 제대로 알 게 된 것 같으이. 퇴게는 주자학에 그만큼 심취했었고, 주자학을 연구하므로써 새로운 경지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광범하고 산만하기만 하던 주자학을 근본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하여 마침내는 퇴계학 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것이 었다. 퇴계는 책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 남달리 정밀하게 읽었으니, 그것은 퇴계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제자 한 사람이 글을 올바르게 읽는 방법을 물었더니, 그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이란 정신을 차려서 수없이 반복해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두 번 읽어보고 뜻을 대충 알았다고 해서 그 책을 그냥 내 버리면 그것이 자기 몸에 충분히 배지 못해서 마음에 간직할 수 가 없게 된다.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것을 자기몸에 배도록 공부를 더 해야만 비로소 마음 속에 길이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학문의 참된 뜻을 체험하여 마음에 흐뭇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또 독서에 대해 이렇게도 말했다. "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반드시 성현들의 말씀과 행동을 본받아서 그것을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 까지 도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서둘러 읽어서 그냥 넘겨 버리면 그 책을 읽기는 했어도 별로 소득은 없게 되는 것이다." 실로 독서의 진수를 정확하게 지적한 금언이라 하겠다.

 

5. 가정 교육

1)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 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만약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인 까닭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 없이 타일렀던 것이다.

2) 숙부 송재공께서 진주 목사로 있었는데 둘째 형과 넷째 형이 그를 따라갔다. 선생은 형제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가끔 말하곤 하였다. 이를 듣고 모부인이 말씀하기를, "자식된 도리는  마땅히 글공부에 힘써야 하는 법이다. 너희 형들은 그러기 위해 갔는데, 어찌하여 형제 간에 떨어져 있는 괴로움만 생각하느냐?'하였다.

3)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숙부께서는 과정을 엄하게 세워서 나로 하여금 조금도 느긋하거나 예사로이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나는 가르침을 받들어 조심하고 힘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숙부께서는 가르치고 독려하시는 일에 엄격하여 잘했다고 칭찬하는 일이 적었다. 한 번은 '논어'와 그 '집주'를 초장으로부터 종편에 이르기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배송(背誦-책을 덮고 외움)하였으되 크게 칭찬하는 말씀이 없었다. 내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한 힘 때문이다."하셨다.

 

6. 명종과 퇴계

 퇴계는 65세 12월에 명종으로부터  특별 부름을 받았다.

'왕의 전교'

내가 총명하지 못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노라.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알고 빨리 올라오라.

이 특별소명을 거역할 수 없어 퇴계는 66세가 된 정월에 서행 길에 올랐으나 병환은 가볍지 않았다. 영주에 도착해서 사면장을 올리고 풍기에 가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유지가 내리고 각읍 수령에게는 잘 호송하라 하였다.

'왕의 유지'

경의 사직하고자 하는 글을 보니 짐의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다. 사퇴하려고만 말라.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 버리지 말고 잘 조리해서 올라오라.

내의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문병하라고 명하였다. 퇴계는 유지를 받고도 나갈 몸이 못됨을 아뢰고, 눈 쌓인 죽령을 피해 조령으로 방향을 바꾸어 예천에 이른 후 또 다시 부디 병든 몸을 놓아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래도 국왕은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공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으로 승진시켜 소명을 내렸다. 퇴계는 이번에도 사장을 올려 나아가지 아니하고 절간에서 기다렸다. 왕은 윤허는 커녕 홍문관·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에다가 경연과 춘추관 동지사까지 겸임시켜 상경하도록 독촉하였다.
 그 뒤 4월에 올린 퇴계의 장계를 대신들이 보고, 6경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된다고 윤허를 주청하여 중추부지사로 체직하게 되었다. 7월에 가서 퇴계는 자헌대부와 중추직도 해직하여 달라는 사장을 올렸으나 허락치 아니하고 병이 낫는대로 상경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 후에도 명종은 퇴계를 잊지 못하여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음'이란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고, 송인을 도산에 보내어 도산도를 그려오게 하여 그림 위에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두고 보았다고 한다.

참고도서 :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p407~408

 

7. 대장장이 배순과 퇴계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10월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우가 형의 부하로 근무할 수 없는 제도가 있었는데 대사헌으로 있던 넷째 형 온계가 충청감사로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창건하고 떠난 지 4년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온 것이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1년 동안 있으면서 백운동 서원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 청탁을 일절 배제하는 등 공직기강을 확립하였으며, 서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 중에서 계급의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천민인 배순을 교육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퇴계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배순이 살았던 곳은 소수서원에 가까운 배점리였으며, 직업은 야공(冶工 : 대장장이)이었다.그는 신분이 비천함에도 학문을 좋아하였고, 퇴계가 백운동서원에서 가르칠 때 자주 뜰아래에 와서 돌아갈 줄 모르고 즐겨 청강하기에 아는 정도를 시험해 보았더니 능히 이해하므로 기특하게 여긴 퇴계가 함께 가르쳤다고 한다. 퇴계가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는 선생의 철상을 주조하여 아침 저녁으로 분향하면서 경모하였다. 22년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퇴계가 풍기를 떠난 것은 1549년 11월이고 돌아가신 것은 1570년 12월 8일이다) 삼년복을 입었으며, 철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가 죽은 뒷날 배순의 손자가 조부의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창석 이준 군수가 지은 시가 비문으로 전해졌다

그 후 전 포항공대교수인 권오봉 교수를 비롯한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매몰되어가던 배순의 정려비와 무덤을 찾아 말끔히 보수하여 1992년 11월 21일 준공 낙성하였으며 1993년 2월 25일자로 도문화재 279호로 지정되었다. 안내판은 권오봉 교수가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배순 정려비

배순은 조선 명종·선조 때 사람으로 본관은 흥해이다. 그는 천성과 효성이 지극히 순근(淳謹)하였다. 순흥부의 철공인이지만 학문에 힘쓰므로 퇴계선생이 서원에서 유생과 함께 가르쳤다. 선생이 떠나자 철상을 만들어 모시고 공부하다가 죽은 후는 3년복을 입었다. 배순이 죽은 뒤 이준 군수는 시를 짓고 군민이 기려 정려각을 세웠다. 손자 종이 묘표(墓表)를 세울 때 비를 세웠더니 먼 훗날 7대 외손 임만유가 충신백성이라 새겨 다시 세웠다.
 소수서원의 퇴계선생 평민교육과 배공이 스승을 받든 이 정려비는 국내 유일의 소중한 보물이며 교육자료이다.

 

8. 증손자와 퇴계

 손자인 안도(安道)가 아들 창양을 데리고 성균관에 유학하고 있을 때다. 창양이 출생한지 6개월만에 손자 며느리가 딸을 잉태하여 젖이 끊기게 되었다. 오늘과 같이 우유로 아이를 키우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아기를 키우기가 매우 힘들었고, 창양은 영양실조로 별별 병을 다 앓았다. 그래서 도산 본댁에 유모를 구해 보도록 부탁하였다. 마침 딸 낳은 여자 종이 있어서 아기를 떼어놓고 서울로 올라오도록 일을 추진하고 있을 때 퇴계가 그 낌새를 알 게 되었다. 시어른의 엄한 법도를 알면서도 미리 아뢰지 않은 것은, 창양을  출산했을 때 '우리 집에 이 보다 더한 경사가 없다.'라고 기뻐하였으므로 증손자를 위한다면 어떤 일이든 묵인해 주리라 믿고 나중에 알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 일을 알고 엄히 꾸짖고 중지시키고 '근사록'의 말을 인용하면서 편지를 썼다.

  "몇 달 동안만 밥물로 키운다면 이 아이도 키우고 서울 아이도 구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떼어놓고 가는 그 어미의 마음은 오죽하겠으며 서울까지 가는 동안에 이 아이는 죽고 말 것이고 젖도 막히게 될 것이다.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어미가 자식 키우는 정은 짐승도 마찬가지인데 학문을 한다는 유가의 체통으로 차마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더냐! 몇 달을 참으면 두 아이를 다 구할 수 있으니 여기 아이가 좀더 자랄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그 때 가서 데리고 가도록 하마."

하고 손자를 타일렀다.
 그 후 겨울과 봄은 어렵게 넘겼지만 창양은 증조부를 보지도 못한 채 1570년 5월 23일 죽고 말았다. 퇴계는 그 아픔을 가족들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으나, 여러 문인들에게 아픈 심정을 여러 번 토로하였다.
 퇴계의 인간 평등사상은 당신의 증손자를 잃으면서까지 하인의 딸을 살렸고, 어미가 자식을 키우는 사랑과 천륜은 사람의 귀천에 차별이 없음을 행동으로 가르쳐 주었다.

 

9. 퇴계의 자기 반성

 퇴계는 매일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전해지는 일기는 극히 일부분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퇴계언행록에는 일기를 보충할 만한 자기반성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1) 내가 한번은 금문원의 집에 갔는데, 산 기슭이 매우 가파라서 갈 때는 고삐를 꽉잡고 조심조심 하였으나, 돌아올 때는 얼큰히 취하여 길이 험한 것을 깜빡잊고 탄탄대로인양 안심하고 왔다. 마음을 채근하고 버림이 이와 같으니 두렵지 아니한가.
 2) 나는 과거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처음에는 합격 불합격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스물 네 살 때에 연거푸 세 번을 낙방하였으나 역시 큰 상심은 아니 하였는데, 하루는 집에 있자니까 누군가 "이서방, 이서방"하고 부르는데 가만히 보니 늙은 종이었다. 그리하여 문득 탄식하기를 내가 아직도 이름 밑에 아무런 호칭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욕을 보는구나 생각하고 갑자기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듯 바뀌니 두렵지 아니한가.
 3) 내가 처음 과거에 합격하던 해에 여러 사람에게 이끌려 날마다 술마시고 놀러 다니느라 조금도 겨를이 없었다. 밤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에 와서는 다시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어 그러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4) 번잡하고 흥겨운데서 사람의 성정이 바뀐다. 내가 사인으로 있을 때, 어느 잔치 자리에서 기생들이 눈 앞에 가득이 있어서 문득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생겼다. 비록 힘써 욕망을 억제하여 구렁텅이로 빠지는 지경은 면하였으나 이러한 기회가 바로 살고 죽는 갈림실인 것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손가.

 

10. 과거 공부와 서원 교육

이황은 관학인 향교와 국학은 나라의 제도와 규정에 얽매이고 과거 공부에 주력하여 옳은 학문을 이룰 수 없는 반면, 서원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출세주의와 공리주의를 떠나 순수한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림들의 출세 방법이 과거를 통한 벼슬밖에 없었던 당시에 개인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위주로 하는 성리학의 학문관을 토착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이황의 아들 손자조차도 과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황이 도산서당에서 강학하던 당시에 영주에는 과거 공부를 전문으로 지도하는 사설 학원이 있었다. 이 학원은 인격 함양이나 학문이 목적이 아니라 과거에 대비하는 교육이 주목적이었다. 오늘날의 진학지도 학원 같은 성격을 띤 사설 학원이었던 것이다.
 이황의 손자 안도도 이곳을 찾아간 적이 있어서 이황은 문장 수련에 힘을 쓰는 손자를 나무라기까지 하였다. 이황이 유교 경전과 성리학 서적을 중심 교재로 삼아 강의하는데 반해서 영주의 사설 학원에서는 과거 위주의 암키와 작문을 주로 가르쳤다. 손자가 조부의 교육을 이해하지 못하자 이황은 하도 딱해서 "가까이 있는 단 복숭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쓴 돌배 따러 온 산천을 헤매고 있구나."라는 시를 보여 주며 손자를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아들 준도 부친의 강학보다 영주의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을 원했다. 이황은 내심 못마땅해 하면서도 허락했는데, 준은 곧 아버지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되돌아왔다. 이황의 실천중심의 학문,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도덕 교육, 즉 앎과 실천을 함께하는(지행병진 : 知行竝進)의 학문을 집안 사람들도 처음에는 납득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과거를 앞두고 이황에게 과거 시험을 위한 수업을 받으러 왔다가 그가 과거와는 상관없는 경학을 중심으로 가르치자 되돌아간 생도가 많았다고 한다.

 

11. 도산서당에서의 생활

나는 항상 오래된 병고에 사로잡혀 있으니, 비록 산에 있다 해도 마음대로 글을 읽지 못한다. 깊은 아픔을 견디며 오래 숨을 고르고 나면, 때로는 육신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편하여지며, 몸과 마음이 맑게 깨어나서, 세상을 돌아봄에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 없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이끌고 방을 나서서 '헌'(암서헌)에 이르고, '당'(정우당)을 구경하고, '단'을 거닐고 '사'(절우사)'를 찾고, 밭에 나아가 약초를 심고, 숲을 헤쳐 꽃도 따고, 혹은 돌 위에 앉아 샘물도 만져보고, '대'(천연대, 운영대)에 올라 구름도 바라보고, 혹은 물가 바위(반타석)에 기대 고기 노는 것도 구경하고, 물 위에 배를 띄우고 앉아 갈매기도 희롱하여 보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눈길 가 닿는 것마다 살펴보고, 좋은 경치를 만나 흥에 취하여 노닐다가 돌아오면, 집은 적막하게 가라앉아 있고, 책은 벽에 가득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이미 알아낸 것은 따르고 새로 찾은 것은 닦아서 마음으로 깨우치기를 기다리다가 어떤 때는 밥 먹는 것까지 잊을 정도이다.

출처 : 편안한 마음이 깃들기를
글쓴이 : 아독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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