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으로행복

[스크랩] 8월 29일은 국치일, 국치일을 아십니까?

good해월 2008. 6. 11. 13:49

 

국치일 명사

    [명사]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 흔히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이른다.

     

     

     

    國恥日(국치일)을 아십니까?           - 아직도 일제치하의 기간을 36년이라고 하십니까?-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 그러나 찬란한 문화 전통의 역사가 무참하게 짓밟힌, 그로 인해 역사의 줄기가 단절되어 버린, 바로 일제(日帝)에 의해 질곡(桎梏)의 굴레를 지게 된 치욕(恥辱)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단절된 역사를 복원하고 일제(日帝)의 잔재를 청산하고 있다 하면서도 가장 기초적인 문제인 잘못된 용어나 잘못된 일제 압제(壓制) 치하의 기간(期間)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명칭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합니다. 무엇이 '보호'입니까? 일제(日帝)가 우리를 보호한 것입니까? 강압에 의한 치욕적인 조약. 그렇다면 우리가 조약 명칭에 '보호'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나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 명칭 역시 우리의 치욕을 풀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명칭이 맞을까요. 바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당시부터 우리의 민족적 지식인 들은 이렇게 불러왔습니다. '늑약(勒約)'은 억눌러서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을사년(乙巳年-서기 연도를 잘 모르겠으면 본 사이트 간지이야기를 보세요)에 일어난 강압에 의한 치욕의 조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명칭도 '합방(合邦)'의 의미가 나라가 합쳐졌다는 일제(日帝)의 입장에서 불리던 명칭입니다. 이 역시 경술년(庚戌年)의 나라의 치욕{국치(國恥)}이라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불려야 합니다.


     아울러 '경술국치(庚戌國恥)'의 국치일(國恥日)이 몇 월 며칠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인물이었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으로 하여금 고종(高宗)을 협박하여 강제로 합병문서에 조인하게 했던 치욕의 날, 8월 29일입니다. 과거는 돌아갈 수는 없어도 잊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때 일본(日本)의 소학교(小學校) 학생들의 교육용 한자(漢字)의 수가 1945자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무의식의 소치는 부끄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國恥日(국치일)을 아십니까?   - 아직도 일제치하의 기간을 36년이라고 하십니까?


    { 45-10=36 }이 맞습니까? 명칭의 문제 보다 더 큰 잘못이 있습니다. 바로 일제(日帝)가 우리를 강점(强占)했던 기간을 36년이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것입니다. 올해 8월 15일 광복절(光復節)에도 신문, 방송 등 언론(言論)에서까지 아직도 일제(日帝)의 압제(壓制) 치하(治下)를 36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36년이 아니면 몇 년일까요.초등학교(初等學校) 1학년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民族)이 1910년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겼다가 1945년에 광복(光復)을 맞았다고 하면 나라를 빼앗긴 기간을 몇 년간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연하게 { 1945 - 1910 = 35 } 35년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보면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34년 11개월 14일입니다. 곧 35년도 안되는 기간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36년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답답한 심정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수학 실력보다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민족의 암울한 치욕(恥辱)의 시기, 반만년 역사를 단절(斷切)시킨 수치(羞恥)의 역사. 그러한 치욕(恥辱)과 질곡(桎梏)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제(日帝)로 인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 중에서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잘못 알고 잘못 쓰고 있는 것들에 대해 바로잡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진정으로 일제(日帝)의 잔재(殘滓)가 사라질 것이고 민족의 정기(精氣)가 올바로 설 것입니다.


        

     

     

     

     

    경술국치 하루 전 ‘순종 문서’ 발견

     

    “병합조약 인정못해” 의지 드러내

     

    한일강제병합조약 비준서 서명을 거부한 순종황제가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하루 전날 직접 수결(手決)한 훈장증서가 27일 발견됐다. 고종황제가 사용한 일심(一心) 수결을 조금 변형한 이 수결은 순종황제가 1907년 11월 18일 공식 즉위한 뒤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아 희귀 사례로 손꼽힌다.

    교지(敎旨)연구가 김문웅(64)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행정실장은 순종의 수결이 들어간 1910년 8월 28일자 훈장증을 공개했다. 이규상(李圭象)이란 경시(현재 경찰 직급으로 총경에 해당)에게 팔괘장(八卦章·8등급 훈장 중 6등급)을 수여한다는 이 증서에는 주로 외교관계 문서용으로 쓰이는 대한국새가 찍혀 있고 그 위에 순종황제의 일심 수결이 적혀 있다.

    한일강제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데라우치 마사타게 통감의 서명을 거친 뒤 내각의 의결을 거쳤으나 그 비준서에는 순종의 서명 없이 대한국새만 날인됐다. 당시 순정황후 윤 씨가 치마폭에 감춰 둔 국새를 친일파였던 그 숙부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아 날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실장은 이 훈장증의 순종황제 수결에 대해 “황제가 강제병합조약 체결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조약이 강제 공표되는 29일까지 통치권을 계속 행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설명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순종황제가 공식 즉위한 뒤 대부분 공문서에 황제의 수결은 일본식으로 순종황제의 이름인 척(척) 서명으로 바뀌었다”며 “조약의 공표 일을 앞두고 마지막 황제권을 행사하는 순종황제가 정식 수결을 갖춘 문서를 통해 일제가 조작한 공문서의 부당성을 지적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자료”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순종황제 시대 공문서의 황제 수결은 척(척) 서명으로 대체됐으며 일제가 이를 위조한 경우도 많았다.

 

 

'경술국치' 현장을 찾아냈다
서울유스호스텔 진입로서 하야시 동상 판석 발견
조선통감 관저 터 증명…일대 체계적 조사 벌여야
▲ 서울 중구 예장동 서울유스호스텔 진입로 들머리에서 옛 조선통감 관저 터에 있던 하야시 동상 받침대 판석과 500년 된 은행나무(큰 사진)가 발견됐다. 이번에 확인된 은행나무는 옛 조선통감 관저 들머리에 있던 은행나무(왼쪽 위 작은 사진)로, 판석은 통감 관저 앞뜰에 섰던 동상의 받침대(왼쪽 아래 작은 사진)에 붙어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왼쪽 작은 사진 두 장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비상임위원 제공

1910년 8월29일 이른바 '한일합방 조약'(경술국치)이 맺어진 서울 남산 조선통감 관저 터가 발견됐다. 조선통감 관저는 광복 뒤 민족박물관과 연합참모본부 등을 거치면서 건물이 사라졌으며, 최근까지 이 일대가 국가안전기획부(옛 중앙정보부)의 관할에 들어 있어 유물·유적 조사가 불가능했다.

이순우(44) 민족문제연구소 비상임 연구위원은 최근 서울 중구 예장동 산4-5번지 서울유스호스텔 진입로 들머리에서 옛 조선통감(1910년 합병 뒤 총독으로 바뀜) 관저 안에 서 있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1860~1939) 동상의 받침대 판석 3장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 한 장에는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 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고 쓰여 있어 이곳이 통감 관저 자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야시는 1899년 주한공사로 부임해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며, 1936년 그의 업적과 희수(77살)를 기념해 이 건물의 앞뜰에 동상이 세워졌다.

또 이 판석이 놓인 바로 옆에 서 있는 500년쯤 된 거대한 은행나무도 이 일대에 통감 관저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1919년 만선출판협회가 펴낸 <선철연선 명소사적 미술대관>에 실린 사진을 보면 이 나무는 통감 관저 바로 앞 들머리에 서 있었다. 이 위원은 "사진과 지도 등을 검토해 보면 이 은행나무와 받침대 판석이 발견된 위치 바로 옆 농구장이 통감 관저 건물터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통감 관저가 한일 합병이 이뤄진 장소라는 기록은 몇 군데 남아 있다. 1934년 경성부에서 펴낸 <경성부사> 2권 154쪽에 보면 "양국 전권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과 이완용 총리대신은 총독(합병 전 통감) 관저의 한 방에서 병합조약에 조인했다"고 나온다.

광복 뒤 이 건물은 1946년 민족박물관, 1953년 국립박물관, 6·25전쟁 뒤 1954년 연합참모본부 등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1972년 이 일대가 중앙정보부의 관할로 들어가면서 더는 이 건물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어 이 건물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울시는 1996년 이 일대를 국가안전기획부로부터 넘겨받았으나, 아직 이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유물·유적 조사를 벌이지 않았다.

이순우 위원은 "을사조약의 체결 장소가 덕수궁 중명전임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정작 합병 조약의 체결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며 "치욕스런 역사를 똑똑히 기억해야 다시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은 중앙정부나 서울시가 이 일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벌일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수정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사는 "1923년 경성부 지도와 현재 지도를 비교해 보면 이 위원이 추정하는 위치와 지도상 통감 관저 사이에 150m 가량 차이가 있다"며 "정확한 위치는 발굴조사를 벌여야 확인할 수 있으며, 문화재위원들에게 건의해 현장 확인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출처 : 당신이 머문자리는 아름답습니다
글쓴이 : 인테리어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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