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색되어 가는 효자와 효부의 의미
영월군 상동읍 내덕 2리 주채동을 들어가는 길목. 주채교를 지나면 2개의 정각이 붙은 담을 끼고 쌍둥이 건물처럼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다리 쪽에서 바라보면서 오른쪽은 방진두의 효자비각이고, 왼쪽은 방문조의 처 남원양씨의 효부각이다. 효자문은 원래 내덕교 부근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인하여, 1984년 문중에서 지금의 장소로 비석과 건물을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영월을 답사하던 중 길가에서 보이는 작고 아름답게 꾸며진 정각. 발길을 멈추고 다리를 건넜다.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매봉산을 오를 수 있다. 정각 앞으로 가니 잡초더미가 우거져 있다.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우측에 있는 정각은 효자 방진두를 기리는 정각이다. 비석에는 ,통정대부 남원 방공진두 효자비>라고 적었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다. 마당 안에도 잡풀이 어른 허리가 넘도록 자랐다.
방진두 효자각은 그의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 41년인 1904년 2월 23일에 세웠다. 방진두는 시조 계홍의 12대 손으로 통정대부를 지낸 바 있다. 방진두는 부친이 돌아가신 후 묘소 앞에서 시묘를 하면서 3년간 머리와 손톱을 깎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효행이 알려지자 경북 봉화군과 영월군의 협의로, 1904년 효자표창이 내려지고 효자문을 세웠다.
효자각과 같은 담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남원양씨효부 정각은 1929년에 설립되었다. 효부 방문조의 처인 양옥수는 18세에 출가하여 시부모에게 극진히 효도를 하였다.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살아계신 분을 모시듯 정성을 다하고, 홀로 계신 시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시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비문에는 <효부남원양씨지여> 라고 적었다.
두 개의 나란히 선 정각.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효(孝)라는 생각이다. 세상이 험난하여 부모를 내팽개치는 자식들의 이야기가 가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부모를 져버리는 자식이 어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금수만도 못한’인간이 간혹 회자가 되고는 하지만 말이다.
오늘 이 두 정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잡초더미 속에 묻혀있는 효자각와 효부각이 꼭 요즈음의 우리네 마음 같다. 잡초를 걷어치우고 깨끗한 모습으로 지나는 길손을 맞이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흐르는 내를 바라다보면서 내 스스로에게 효자였었는지 자문을 해보는 것도, 마음이 아파서다. 비가 뿌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고, 오늘의 여정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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