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으로행복

[스크랩] 1950.9.18~9.28 서울 수복 작전

good해월 2008. 9. 20. 09:38

1950.9.18~9.28 서울 수복 작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로 진출하고, 남쪽에서도 국군과 미군이 올라오자, 북한군은 최용건을 서해안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서울 방어를 위해 필사적인 노력하였다.


미 해병 제5연대와 국군 해병대는 20일 06시에 한강을 도강하여 09시 40분경 행주산성을 장악하고 능곡, 수색, 신촌을 거쳐 21일 저녁에는 백련산의 능선을 확보하고 중앙청으로 진출할 태세를 갖추었으며, 미 해병 제1연대는 9월19일 117고지, 20일 새벽에는 역습해온 북한군을 격파하고 경인국도를 따라 안양천변, 21일 새벽에 영등포, 22일 아침에 노량진 일대의 한강 남안까지 진출하였다.


서울방어를 위한 북한군의 최후 방어선은 남쪽에 한강, 서쪽에 와우산과 노고산, 안산을 있는 능선으로 유리한 지형조건을 이용하여 2개 연대규모 약5000여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진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북한군의 저항으로 서울 탈환이 지연되자,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수원 방향으로 공격중인 미 제7사단을 서울에 추가투입하여 미 제7사단 32연대는 9월 25일 06시에 신사리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15시경 남산을 점령한 후 장춘단, 왕십리 방향으로 진출하였으며, 국군 제17연대는 미 제32연대에 이어 14시경 신사리에서 보광동, 한남동 방향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26일 새벽 02시에 하왕십리, 중랑천, 용마산, 아차산, 282고지를 탈취하고 경춘도로를 차단하였다.


이렇게 한국군과 미군은 서울을 포위하듯이 북한군을 압박하여, 미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연대는 서울중심부로 돌입하여 25일 22시경에는 서대문과 마포방향으로 진출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군과 날이 밝을 때까지 치열한 시가지전이 전개되었다. 26일 15시 30분경 미 해병대는 미국대사관을 탈환하고 중앙청을 향해 진격하여 27일 15시 08분에 중앙청을 점령하고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북한군이 1950.9.27. 밤에 서울을 철수하므로써 1950.6.28. 남침 3일만에 북한군에게 뻬앗긴 서울을 91일 만에 수복하였다. 1950. 9. 29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펌] 연희동 104고지 전투 (1950. 9. 21~1950. 9. 25.)


한국해병 제1대대와 미해병 제5연대 제2대대에 의해 연희고지 일대에서 1950. 9. 21~1950. 9. 25. 5일 동안 수행된 전투는 서울 서측방에서의 전반적 돌파작전의 일부로, 적 방어선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 전투였다.


9월 21일 16:15 미 해병 제 5연대장 머리 중령은 연대기동계획을 조정하여 새로운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르면 연대 우측방에서 경의선과 한강 사이를 전투지대로 하여 성산동의 68고지(성서초등학교 뒷산)를 향하여 전진하는 제 1대대의 임무에는 변함이 없으나 연대 좌측방에 있는 백련산(스위스 그랜드 호텔 뒷산)의 216고지를 제 3대대의 이날 공격목표로 한정시키는 한편, 배속된 한국 해병 제 1대대로 하여금 연대 중앙에 위치하여 모래내 건너편의 104고지(연희1동 서연중학교 뒷산으로 옛날엔 염산, 요즘엔 연희산이라 함)를 확보하고 그 일대에 야간방어진지를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수색(水色)에서 서울의 도심으로 들어서려면 안산의 주봉인 296고지로부터 남쪽과 서쪽으로 뻗어내린 여러 갈래의 능선들을 넘어야만 한다. 수색에서 불광천을 건너 백련산과 경의선 사이의 광활한 야지인 남북가좌동 일대를 지나면 그 최초의 나지막한 능선과 마주치게 된다. 철로변에서 멎는 그 끝 봉우리가 염산(廉山)이라는 104고지이다.


 적의 저항없이 불광천을 건너 선 한국 해병 제 1대대는 북가좌동 일대에 좌로부터 건제순으로 3개 소총 중대를 전개 시켰다.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이름 그대로인 모래내(홍제천. 현재는 위로 내부 순환도로가 달림)가 목표 바로 전방에 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모래내 주변에는 확연한 구분도 없는 전답들이 이어져 목표를 점령하려면 지형에 따라 100-300미터 폭의 개활지를 통과해야만 했다.


 개활지와 하천이라는 불리한 지형을 건너던 제 1대대는 갑작스런 적의 자동화기 및 소화기 사격을 받았는데 특히 정만진 중위 지휘하의 제 1중대가 이용할 수 있는 은폐물이라고는 군데군데 쌓여있는 돌무더기뿐이었다. 앞서 가던 제 2소대장 민동기 소위와 제 3소대장 이장옥 소위 그리고 많은 대원들이 쓰러졌다. 중대는 대대의 81미리 박격포 지원사격과 간간이 날아오는 적의 박격포탄조차 식별할 수 없을 만큼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철로 가까운 쪽의 기동로 상에 약간의 은폐물을 이용할 수 있었던 제 3중대장 이봉출 대위(훗날 파월 청룡부대장)는 제 1소대장 김한수 중위로 하여금 소규모의 돌격부대를 이끌고 우측의 철둑넘어로 우회기동하여 104고지 전사면 서쪽편의 절벽에 구축된 적의 자동화기 진지를 제압하게 하였다. 이들의 진출과 때를 같이 하여 중대 좌전방에서는 이도조 일등병조가 이끄는 제 3소대가 전방 모래내 가운데 있는 작은 독립가옥으로 접근 적진에 돌격을 감행했다. 진지에 돌입하여 진내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적의 저항은 치열하였으나 18:30 마침내 목표를 확보하였다. 대부분 개활지에서 발생한 부대의 손실은 전사자 8명, 부상자가 20명에 달했는데 불행히도 제 3중대 화기소대장 김진태 중위는 목표를 탈취한 직후 날아온 적 포탄에 전사하였다.


 해병 제 1대대는 제 1및 제 2중대로 하여금 104고지 일대를 방어케 하고 제 3중대는 사령부와 함께 북가좌동에 위치한 대대본부로 이동시켜 후방지역 경계를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한국해병 제 1대대 좌측의 미 해병 5연대 제 3대대도 이날 18:20 백련산을 확보하였고 우측의 제 1대대(미)는 17:30 성산동의 68고지를 완전 장악하였다.


 이날 밤 한국 해병 제 1대대장 고길훈 소령은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서울의 심장이 지척에 있다는 설레임 탓도 있었으나 서울역에서 병력과 장비를 실어오느라 밤새도록 울려대는 신촌 일대 골짜기의 기적 소리가 불길하게만 생각되었기 때문에 다음날의 공격이 무척 힘들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고 소령의 불안을 입증이라도 하듯 미 해병 제 5연대가 지휘소로 쓰던 수색역(현재 위치보다 500미터 쯤 북서쪽에 있었다 함) 근방 민가에 적 포탄 1발이 떨어져 연대장 머리 중령은 찰과상을 입는 정도였으나 부연대장 헤이즈 중령이 다리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9월 22일 새벽 03:00 약 600명으로 추산되는 적은 120미리 박격포의 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왔으나 3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이 역습과 병행하여 적들은 한국 해병대의 바로 전방에 구축 중이던 그들의 주진지에 대한 마지막 보강작업과 병력배치를 강행하고 있었다. 한국 해병의 좌우측에 있었던 미 해병대대 전방에서는 밤사이 적의 활동이 대단치 않았던 만큼 미 해병사단에서는 부대가 좀더 진출해서 대현동(큰고개)이나 아현동 쯤 가야 적의 주진지가 나타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도 탈환을 위하여 넘지 않으면 안될 사선(死線)은 한국 해병 제 1대대의 바로 눈 앞에 있던 56고지(연희고지, 연세대 운동장 서쪽 언덕)였다.


9월 22일 07:00 미 제 5해병연대의 공격은 개시되었다. 전날과 같이 좌측방에 위치하는 제 3대대의 목표는 안산 296고지, 우측방 제 1대대의 목표는 와우산(남쪽 105고지, 홍익대 뒷산), 그리고 중앙에 위치하는 한국 해병 제1대대의 목표는 의령터널고지라 불러 무방할 북쪽 105고지였다. 전날 영등포 공격에서 미 제 1해병연대를 지원하던 미 해병 항공기들도 이날은 주로 제 5연대 지원에 나섰다.


 이날 공격에서 좌전방의 제 3대대가 안산 296고지를 신속히 확보할 수 있다면 중앙과 우전방의 진출은 좀더 용이하리라는 것이 연대장 머리 중령의 생각이었다. 미 해병전투기들이 안산 일대를 강타하는 동안 제 3대대 공격의 선두에 선 H중대는 대단치 않은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09:45에 안산 주봉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된 이 연대의 공격상황은 머리 중령의 기대처럼 순탄하지는 못했다.


 한국 해병 제 1대대는 목표인 북쪽 105고지를 공격하기에 앞서 대대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연희능선 즉 안산에서 56고지로 이어지는 능선과 이 능선 너머에 있는 88고지(세브란스병원의 북쪽, 연세대 노천극장의 동쪽 언덕)를 먼저 탈취해야 했다. 이 대대의 공격개시선이 될 104고지 능선과 그 전방의 연희능선은 불과 1키로미터의 간격을 두고 평행하게 놓여 있으며 이 양 능선 사이의 계곡 저지대에 가로놓인 300-500미터 폭의 논들(현재의 연희로 주변)이 실질적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되었다.


 이날 새벽에 있었던 적의 역습을 물리친 뒤 104고지의 북쪽 사면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제 1 및 제 2중대는 능선을 넘어서자 제 1중대가 궁동 좌측(연희 2동)으로 제 2중대가 우측(연희 1동)으로 전개하였다. 마침내 이들 중대가 개활지에 들어서자 적의 기습적인 사격은 개시되었다. 전방 능선상에서 적의 중화기 및 자동화기들이 불을 뿜었고 야포와 박격포탄도 날아왔다. 일선 중대의 공격이 돈좌(頓挫)되자 이윽고 우군 포병 및 항공기가 지원되었다.


 우군의 지원사격을 받은 뒤에도 상황이 타개되지 않자 우일선 대대로부터 배속전환된 미 해병 전차소대와 함께 제 3중대가 철로를 따라 전방으로 진출하였다. 104고지 바로 서쪽에서 철로는 연희터널(서대문 우체국 밑)을 통해 신촌역으로 이어지는 경의선과 서강역으로 이어지는 용산선으로 갈라진다. 우측방 미 1대대와의 경계는 용산선이었다. 높은 뚝 위에 있는 경의선 좌측으로 이 철로와 평행하여 좀 낮게 뻗은 길을 따라 5대의 전차와 이 전차들을 엄호하는 제 3소대가 진출하였다. 잔여 소대는 104고지의 남쪽 기슭을 따라 전진하였다.


 步戰부대는 전방 연희능선상의 56고지와 연희터널고지로부터 집중되는 적의 자동화기와 대전차포 사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제 3중대의 다른 소대들 역시 개활지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결국에는 3개 중대 모두 적의 사격에 묶이고 말았다. 전차도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 제 1 및 제 2중대의 경우에는 전방에서 날아오는 적의 사격도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안산 山系에서 날아오는 적의 측방사격이 더 치명적인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제 1대대는 104고지로 다시 물러나 부대를 수습하였다. 전사자가 11명, 부상자가 45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후일의 포로 신문에서는 북괴군 제 25여단도 이날 무려 40%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좌측 대대의 목표인 안산 296고지가 확보되면 호전되리라 믿었던 상황이 막상 기대에서 어긋나자 미 제5 해병연대에서는 그 원인이 한국 해병들의 경험부족과 미숙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 좌측방의 제 3대대는 목표상에 한 발판을 겨우 마련한 것에 불과하였다. 안산의 주봉과 거의 같은 높이의 남쪽으로 뻗은 복잡한 능선들 위에 적 부대는 포진하고 있었다. 이 적들에 의한 역습과 각종 화기 및 박격포의 사격을 받아 미 제 3대대도 이날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암석으로 형성되어 진지를 구축할 수 없는 안산의 정상부를 일부러 쉽게 내주고 타격을 가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우산이 목표인 미 제 5해병연대 제 1대대는 이날 용산선을 따라 전차와 B중대를 앞세워 한국 해병대대와 협조된 공격을 펼치려 했으나 전차소대가 한국 해병대로 배속전환되자 기동계획을 바꾸었다. 이날 10:30 쯤에야 실질적 공격에 나선 A중대는 와우산 하록까지 접근했으나 전사한 제 1소대장과 중상을 입은 제 3소대장 등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격이 돈좌되었다. 오후에 우측방으로 우회기동한 C중대 역시 한동안 고전했으나 항공 및 포병 지원이 계속되는 동안 부대를 수습하여 뒤따라 가세한 A중대와 함께 17:35 와우산 정상을 탈취하였다. 이 대대는 전사 12명, 부상 31명 외에 극심했던 적의 포격으로 후방지역에서 입은 손실이 전사 6명, 부상33명이나 되었다.


9월 23일 07:00 해병 제 1대대의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정면공격을 감행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다만 공격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3개 중대를 병진 시키기로 하였다. 기필코 목표를 점령하려는 해병들의 비장한 각오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적의 사격은 전날보다 더욱 치열하였다. 밤사이 적들은 부서진 진지를 보수하고 손실병력을 보충하여 2000에 달하는 병력이 한국 해병대대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걸음을 전진할 때마다 희생도 늘어갔다. 좌전방의 제 1중대에서는 안산 쪽으로 우회진출하던 제 1소대장 신양수 소위가 부상하고 소대에 약간의 희생자가 발생하자 이들의 엄호하에 잔여중대를 이끌고 개활지를 횡단하려던 중대장 정만진 중위의 계획은 쉽사리 실천될 수 없었다. 김광식 대위가 지휘하는 중앙의 제2중대에서는 소대들이 은폐물을 찾아 부지불식간에 양 측방으로 쏠려버려 이 소대들을 다시 규합하고 공격방향을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가장 심한 적의 사격을 받은 것은 우전방의 제 3중대였다. 항공 및 포병사격에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는 연희터널과 56고지가 3중대 정면에 있었다. 이 중대 우전방에서 전진하던 제 1소대장 김한수 중위는 개천(현재의 연희로 서쪽 50미터에서 연희로와 나란히 지나는 이면도로. 원래 약간 굴곡진 개천이었으나 직선화하고 복개하여 일부 노상주차장으로 쓰이며 근래엔 대형음식점들이 주변에 많이 생겼다)을 건너서지도 못하고 왼쪽 다리의 부상으로 후송되고 말았다.


 제 1대대장 고길훈 소령은 각 중대의 전진이 부진하고 병력을 뒤로 뺄 수도 없자 무릎을 치면서 울었다고 한다. 인사부관 이홍빈 소위가 중대의 공격을 독촉하기 위해 전방으로 나갔으나 적의 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사령부의 헌병, 정보대 등 후방요원들 중에서 급히 차출된 병력 62명을 이날 오전 중 제 1대대에 증원하였다.


 이 당시 한국해병대의 분대장급들은 장항 군산지구나 진동리 통영전투 등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역전의 용사들이었으나 병사들의 과반수는 2주전 제주에서 징집한 신병들이었다.


 이에 맞선 북괴군은 대좌 박한린이 지휘하는 제 78독립연대와 소련군 출신의 45세 가량의 소장 최기찬이 지휘하는 제 25여단이었다. 제 25여단은 8월중 철원 북방에서 편성되어 낙동강전선에 참가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서울 방어를 위하여 17일에서 21일 사이에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총병력이 약 2500명으로 보병 2개 대대, 중기(重機) 4개대대, 76미리 120미리포 각 1개 대대의 특수편성이었으며 장교와 준사관의 대부분은 중공군에서 복무하였던 전투경력이 많은 고참병들이었다. 그리고 독립 78연대 역시 이와 비슷한 편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에는 9월 18일 난지도 구역에 서울치안연대 및 제 78보병연대 예하의 2개 대대, 안산(鞍山)線을 따라서는 제 18보병사단과 인천에서 후퇴한 소부대들이 배치되었고 20일 서울 서북쪽 변두리로 제 45보병사단 예하 제 76연대와 45미리 포로 무장한 제 513 포병연대가 투입되었으며 22일 서울 서북쪽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가 부족한 제 25교육여단 예하 2개 대대와 제 45보병사단 땅크연대의 전차 9대가 투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대방의 단대호를 정확히 파악하는게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우리측 공간사는 25여단이 중무장이라 하고 라주바예프의 보고서는 무장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부대라 하니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는지?)


 적들이 서울방어의 주저항선으로 삼은 연희고지 일대의 화망구성은 50정 이상의 중기를 주축으로 그 사이에 경기(輕機)와 자동소총을 배치하고 사각에는 박격포의 탄막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때 1키로미터 당 자동화기의 밀도는 중기관총이 13-14정이고 자동화기 이상이 52-56정으로 이것은 평균 20미터 당 1정의 기관총이 배치된 셈이었다.          


 23일 제 3중대 좌전방의 제 3소대장 이도조 일조(一曺)가 중대장 이봉출 대위의 돌격명령을 받고 개천을 뛰어 넘은 것은 한낮이 다 되어서였다. 거의 같은 무렵에 다른 중대에서도 일부 소대들이 개천을 건너섰다. 어쩌면 해병들로서는 전진로상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이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치열해지는 적의 사격에 부딪쳐 중대마다 주력의 대부분은 개천을 건너서지 못했다. 그동안의 전투를 통해 어느 중대든 소대장 한 두명의 손실은 다 있었기 때문에 각 중대 모두 전술적 소대 운영은 사실상 어려웠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날은 대대와 각 중대가 모두 전혀 예비대를 운용하지 못한데서 결정적인 시기에 이 대대의 공격력은 지속될 수가 없었고 각종 지원화기는 물론 자체 공용화기 또한 부대 기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어쩌면 승기로 이어질 수 있는 모처럼의 계기를 놓치고 만 것이었다.


 한낮이 조금 못되어 미 제 5해병연대장 머리 중령은 예비대로 수색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예하 제 2대대로 하여금 한국해병대대와 교대준비를 하라는 구두 예고명령을 하달하였다. 연대장은 전선 중앙의 불균형 상태를 조속히 타개하고 곧 실시될 미 제 1해병연대의 한강도하를 엄호하려면 공격의 속도를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날 13:00 제 2대대 지휘소가 104고지 바로 뒤로 이동되었다. 이 대대로서는 안산 쪽으로부터 종격실(縱隔室)을 따라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격방법으로 대대장 로이즈 중령과 연대장 사이에서는 일단 논의 되었으나 이럴 경우 이미 이동중인 부대를 재전개시켜야 하므로 공격속도가 늦추어지게 마련이었다. 차선의 방법은 정면공격 뿐이었다. E중대가 104고지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동안 D중대가 56고지를, F중대가 연희터널고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물론 적의 주진지는 훨씬 전방의 큰고개(대현동)와 노고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을 것이라는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가정을 전제로 결정된 공격방법이어서 약간의 포병 준비 지원사격을 받고 공격간에는 전차소대의 지원을 받으면 공격은 무난하리라고 미 해병 지휘관들은 내다보았던 것이다.


9월 23일 15:00 전차의 직접지원하에 F중대가 선도하는 제 2대대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한국 해병대대 전방으로의 초월공격이었다. 선두 전차가 개울에 빠져 전진로가 막히자 뒤따르던 전차들이 철둑 위로 올라서는 동안 F중대는 철둑 사이의 저지대를 통과하면서 많은 손실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차들이 다시 적진을 강타하는 동안 D중대는 소대별로 개활지를 횡단해 나갔다.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연희터널고지에 이른 F중대는 일대의 적들을 동쪽으로 몰아붙이는 한편 계획에 따라 D중대의 진출을 돕기 위해 예비소대인 제 2소대를 56고지 쪽으로 진출시켰다. 제2소대가 56고지와 그 남서쪽 지대의 적들과 치열하게 접전하는 동안 D중대는 56고지의 북쪽 사면을 기어올라 갔다. D중대가 56고지에 급편 방어진지를 마련하는 사이에 날은 어두워졌고 그동안 56고지와 연희터널고지 사이의 작은 봉우리에서 다수의 적과 혼전을 벌이던 F중대의 제 2소대에서는 1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 당했다. 살아남은 소대장 앤더슨 소위와 소대원 7명은 부득이 전사상자들을 이끌고 중대와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F중대는 연희터널고지 동쪽에서 야간방어에 들어갔다. D중대와 F중대는 지척에 있으면서도 주변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채로 저마다 포병 사격에 의존하면서 이날 밤을 보냈다.


 이날 오후 갑작스런 공격중지명령을 받은 한국 해병 제 1대대의 각 중대들은 미 해병 대대가 초월전진하기까지 전선을 지키고 있다가 다음 명령에 따라 104고지 후방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대대 좌전방의 제 1중대에서는 전방 깊숙이 전진했던 일부 병력이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적진 가운데 고립돼 있다가 다음날 미 해병들이 통과한 뒤에야 중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틀째의 공격에서도 해병 제 1대대는 전사 32명, 전상 68명, 실종 1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으며 22일과 23일 양일간의 전투에서 거의 모든 분대장들을 잃었다.


 한편 전선 양측방의 제 5해병연대 예하 제1및 제 3대대는 전날(22일) 장악한 각자의 목표를 계속 확보하면서 중앙 대대의 전진을 사격으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날(23일) 새벽 적의 가벼운 역습을 물리친 양 대대는 사실상 주변지역의 적 탐색활동 중 수월찮은 적의 저항을 받았다. 이들이 사격으로 인접부대를 지원한다는 것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해병 제1대대로부터 물려받은 미 제 5해병연대 제 2대대의 공격목표는 북부 105고지라 불리던 의령터널(이화여대 정문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지점의 철도터널)고지였다. 이 목표 공격에 앞서 안산에서 56고지로 이어지는 능선과 88고지가 장악되어야 하는 것도 물론 한국 해병 제 1대대의 경우와 다를 바 없었다.


 9월 24일 대대장 로이즈 중령은 D중대와 F중대가 현접촉선에서 공격을 재개하면 양 중대 사이로 E중대를 진출 전개시켜 E중대로 하여금 88고지와 북부 105고지 공격에 앞장서도록 할 계획이었다. 이날의 공격개시 시간은 06:30으로 이에 앞서는 20분간씩의 항공 및 포병 준비사격도 계획되었다.


 제 2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분명히 날은 새었으나 주위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 연기로 감싸여 있었다. 이즈음 적들은 우군기의 공중관측으로부터 진지를 은폐하기 위하여 다량의 발연통(發煙筒)을 피워대고 있던 터에 이날따라 안개가 짙게 깔렸기 때문이었다.


 56고지로부터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소탕전을 벌이게 될 D중대로서는 56고지 북쪽의 큰말(큰마을, 연희3동)과 이 큰말에서 56고지 동쪽의 작은 계곡으로 뻗은 작은 길(연세대 서문 일대로 추정)을 발견하고서야 주변의 대체적 지형판단이 가능했다. 56고지 동쪽의 소로를 횡단한 D중대 제 3소대는 08:00 전후하여 맞은 편 비탈을 통해 그리 넓지도 높지도 않은 능선에 올라섰다. 시계는 아직도 극히 불량했기 때문에 선두분대가 수류탄 투척 거리에 있는 적의 교통호를 발견하기까지는 적들 역시 미 해병들의 접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식간에 불꽃이 튀면서 적들도 미 해병들도 쓰러져 갔다. 소대장 맥노튼 소위는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후에도 계속 소대를 지휘했다.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능선 우측으로 기동했던 스미스 병장의 제 3분대에서는 위생병을 포함, 8명이 전사하고 부상한 3명만 살아 돌아 왔다.


 제 3소대 좌측방으로 진출한 제 2소대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사상자만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 중대장 스미스 중위는 중대본부 요원을 포함,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방으로 보냈다. 60미리 박격포소대장 그라임즈 소위 이하 반원들도 포탄이 소진되자 소총수로 나섰다. 안개가 걷히면서 적의 위치가 드러나자 비탈 위에 거치한 2정의 기관총이 그런대로 적의 사격과 맞섰으나 상황은 불리하였다. 포병과 81미리 박격포가 지원에 나섰다. 미 해병의 콜세어 비행기가 폭탄과 로케트탄 그리고 네이팜탄 등으로 적진을 사정없이 때렸으나 너무 저공이었기에 두 번 째 공격에서는 10대 중 5대가 적의 대공 사격에 피탄되었다.


 오전 내내 D중대가 혈전을 벌이는 동안 전날의 손실로 가용병력이 90명 정도에 불과했던 F중대는 또 다른 미 해병전투기 편대의 지원을 받으며 연희터널고지(서대문 우체국 인근) 동쪽의 한 고지에 올라섰다.


 56고지로부터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D중대의 공격은 힘겹게 계속되고 있었다. 한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병력은 줄어만 갔다. 맥노튼 중위의 제 1소대가 9명, 호와드 소위의 제 2소대가 10명, 돗지 소위의 제 3소대가 11명으로 감소되어 더 전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중대장 스미스 중위가 대대에 세 번 째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대대장의 응답은 여전히 공격을 계속하라는 명령이었다. 대대장으로서는 다음 목표 공격을 위한 대비 때문에 예비대를 더 아껴두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D중대와 한 능선상에서 대치해 있던 적들은 100미터가 조금 넘는 높이를 가진 능선 정상(연희3동 28번지 일대)에 강력한 진지를 가지고 있었다. 한낮이 지날 무렵 D중대장은 돌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스미스 중위는 대대장과 조정하여 돌격요령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1. 돌격부대 33명은 돌격개시선 100미터 정면에서 산개하여 돌격준비를 한다.

 2. 돌격지원을 위해 스미스 중위의 무전유도로 콜세어 전폭기가 폭격한다.

 3. 콜세어 전폭기는 공중 폭격 후 보병에게 돌격신호를 보내고 위협비행을 계속한다.

 4. 돌격부대는 콜세어기의 신호를 받아 돌격을 감행한다.

 5. 기관총부대 11명은 돌격반을 따라간다.


 스미스 중대장이 돌격준비를 명령하자 대원들은 돌격이 비참한 결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돌격시마다 지휘관들이 차례로 사상 당하고 대원의 수가 반으로 줄어들었던 경험을 갖고 있었기에 이번 돌격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체념했다고 한다.


 맥노튼 중위가 관측을 하고 스미스 중위가 무전으로 콜세어에 연락하여 공중폭격이 시작되었다. 1번기의 폭격은 130미터나 빗나갔다. 2번기는 매우 정확했으나 3번기의 것은 중대 전방 50미터에 떨어졌다. 4번기가 신호탄을 발사하면서 돌입하자, 동시에 스미스 중대장을 선두로 32명의 대원들이 돌격을 개시했다.


돌격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스미스 중위가 쓰러졌고, 뒤를 이어 맥노튼 중위가 지휘를 계속했다. 해리슨 상병이 기관단총으로 전면에 맹사를 가하고 바스카레 상병, 라센 중사, 힐 상병이 잇달아 부상당하면서도 돌진해 갔다. 100미터 폭의 돌격대형이 적 사격에 의한 피해로 간격이 생겼으나 중대는 계속 돌진하여 정상의 적진지를 탈취하였을 때, 적은 일부의 병사만을 남겨두고 동쪽 산비탈로 도망치고 있었다.


 미 해병대 전사에서는 이 돌격을 다음과 같이 격찬하고 있다.

"격전의 승패가 결정되는 '때'라는 것은 정신적인 균형이 깨지는 바로 그 '때'이다. 불타는 의욕을 갖고있는 용자에게 승리가 있고 우유부단한 쪽에 패배가 있다. 주저없이 적과 죽음에 직면하게 될 능선으로 뛰어 오르는 소수의 젊은이(통상 10% 이내)들에 의하여 이 중대한 승부의 저울은 기울어지게 된다."


 정상을 탈취한 맥노튼 중위는 인원점검을 위하여 계급별로 손을 들게 하였다. 생존자는 모두 30명이었다. 얼마 후 지원부대가 도착하여 D중대원은 56명으로 늘어났으나 이중 26명이 부상을 입고 있었다. 24일 아침 D중대가 공격을 개시했을 때의 총인원은 206명이었다. 그러나 반나절 동안의 전투로 입은 피해는 전사 36명, 부상으로 후송된 자 116명, 부상당하고도 전열에 남은 자가 26명으로 총 피해가 176명(85%)에 달하였고 온전하게 살아남은 자는 30명에 불과하였다. 훗날 미 해병들에 의해서 "스미스 능선"이라 명명된 안산에서 56고지로 이어지는 이 능선이 확보됨으로써 비로소 서울 서측방을 방어하기 위한 적의 주진지가 이 능선에 연하여 구축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지난 이틀간 한국 해병들이 치른 전투의 진가가 새삼스레 인식되었다. 북한군 포로들도 이구동성으로 연희능선의 상실로 전의를 잃었다고 진술하였다.


 제 2대대장 로이즈 중령의 추정에 의하면 이 능선 일대에 널린 적의 시체는 1500여구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4일 오후 로이즈 중령은 예비대인 E중대를 56고지 동쪽으로 이동시켰으나 최종 목표(북부 105고지)에 대한 공격은 다음날로 미루었다. 최종목표 공격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이는 풍산 즉 72고지(창천동 4번지, 경의선 신촌역과 신영극장 사이에 있는 언덕)에는 아직도 적이 포진하고 있어서 이 고지에 대한 공격을 이날 중에 실행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북부 105고지를 비롯하여 안산 산계의 주요능선들이 점령된 것은 25일에 이르러서였다.


 참고자료

 한국전쟁전투사 인천상륙작전편(국방부 전편위)

 한국전쟁사3 낙동강방어작전기(국방부 전편위)

 한국전쟁3(일본 육전사 연구보급회)              


 

 

 


 

 

사진으로 보는 서울 수복 작전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 / 출처NARA

 1950.9. 서울진격중 작전논의하는 미군들

 1950.9. 서울시가전중 저격중인 미제1해병사단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 출처NARA

 1950.9. 영등포지역에서 시가전중인 미해병대

 1950.9. 지하터널을 수색중인 미해병대 - 수류탄을 던지려는 것 같습니다.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의 서울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 출처NARA

 1950. 9. 25. 립퍼작전중 한강도하작전

 1950. 9. 25. 립퍼작전중 한강 도하작전

 1950. 9. 25. 립퍼작전중 한강여울을 도하하는 미 제25사단 전차들

1950. 9. 25. 립퍼작전 한강 도하 작전 / 출처NARA

 1950. 9. 25. 립퍼작전중 한강을 도하하는 미 제25사단 전차들

 한강탈환후 경계중인 해병경기관총조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 출처NARA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하려고 올라가는 국군병사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하는 국군병사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 출처NARA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 출처NARA

 

서울 탈환 후 서울 풍경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 출처NARA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 출처NARA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 / 출처NARA

 1950. 10. 1. 소공동 일대 / 출처NARA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출처NARA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출처NARA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 출처NARA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출처NARA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출처NARA

 1951.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 출처NARA

1951. 3. 4. 한강 부근 마을에서 아이들이 박격포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1. 7. 6. 서울, 폐허의 잿더미 속에 시장은 열리다.  / 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출처 : 청송(靑松)
글쓴이 : 청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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