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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든 선덕여왕릉

good해월 2008. 10. 7. 11:26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든 선덕여왕릉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신라 27대 왕이며 재위기간은 632 ~ 647년이다. 이름은 김덕만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한 왕이기도 하다. 또한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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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능은 경주시 보문동 산 79 낭산 남쪽 능선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 쌓인 이 능은 양편에서 찾아 들어갈 수가 있다. 한 곳은 발굴중인 사천왕사지 입구를 거쳐 들어가는 곳이고, 또 한 곳은 배반동에 있는 능지탑지를 지나 오른쪽 밭 옆길을 지나서 찾아가는 길이다.
 
능은 둥글게 만들어졌으며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 가 된다. 능의 밑 부분에는 능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위해 2 ~ 3단의 석축을 둘러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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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앞에는 상석이 간단하게 놓여있고, 한 옆으로 사적 선덕왕릉이란 비석이 서 있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 왕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알지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자신이 죽는 날까지도 알았다는 선덕여왕. 지금은 그저 간단한 석물 하나가, 묘 앞에 덩그라니 놓여있을 뿐이다, 주변이 시끄럽더니 한 무리의 학생들이 찾아들었다. 기념촬영을 하고 해설판을 훑어 본 학생들은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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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이 많은 날을 사람들의 발길도 뜸한 곳에서, 영면을 하고 있는 선덕여왕. 지금은 그저 발길 끊어진 능 주위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과 함께 무심한 세월 탓만 하고 있는가 보다.

선덕여왕(재위: 632 ~ 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신라의 새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라는 호를 올렸다.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하였다. 즉위한 해인 632년에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하고, 633년에는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침공이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해 나라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를 막는 한편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더불어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신라인들을 정신적으로 단결시켜 삼국 통일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석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석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647년 상대등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였다.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 곧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는데 훗날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간 세상의 한가운데에 수미산이 있고 그 위에 6천이 있는데 중턱에는 사천왕천,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신라가 곧 불국토라는 관념에 비추어보면 선덕여왕은 서거 후 도리천에 승천하여 곧 신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다음 백과사전)

                               

                                              

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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