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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법

good해월 2008. 10. 13. 13:01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법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일 가운데 가장 슬프고 막막한 것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큰일 치른다고 하잖아요? 결혼도 큰일이지만 장례보다 더 큰 일은 없죠.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의 충격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슬프지만, 그보다 더 슬픈 것은 자식이 죽었을 때죠.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죽음이 자신이나 자기 가족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착각하고 살잖아요.

생각으로는 ‘누구나 태어나면 죽지. 그래 죽는거야’ 하지만 마음 깊이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살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주위를 돌아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지금 이 순간도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현상이에요.

마치 파도가 끝없이 일었다 사라지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파도가 일었다가 사라지는 것이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누가 태어났거나 죽었을 때처럼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잖아요?

그것은 파도가 일었다가 사라지는 것이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임을 알기 때문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가요.

그러나 자신이나 자기 가족에게만큼은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누가 죽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땅이 꺼지는 것같이 슬프고 괴로운 겁니다.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난다,

생로병사에서 해탈한다고 하는 것은 태어나서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사라짐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에요.

파도를 보세요.

일었다 사라지고, 일었다 사라져요. 바다 전체를 보면 그냥 물결이 출렁이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은 파도가 일어난다 해도 일어난 것이 아니고 사라진다 해도 사라진 것이 아니죠.

그저 물결이 출렁일 뿐이에요.

그래서 불생불멸이라 해요.

생(生)이라고 하지만 생이 아니고, 사(死)라고 하지만 사가 아니고,

멸(滅)이라고 하지만 멸이 아니다, 이런 얘기예요.

생겨난 것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불생불멸이 아니에요.

일어나고 사라짐은 하나의 현상일 뿐 그 본질은 생겨남도 아니고

사라짐도 아니기에 불생불멸인 겁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하나하나에 집착하면 그것이 마치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다 전체로 볼 때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출렁이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 화분에 씨앗을 하나 심습니다.

얼마 지나니까 싹이 돋아요.

또 시간이 지나니까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말라 죽어요.

이것을 두고 나고 죽는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이 속도를 좀 더 빨리 해서 씨를 심고 싹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고 죽기까지의 시간을

한 달, 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로 줄였다고 해봅시다.

이 과정을 필름에 담아 아주 빨리 돌린다고 해봐요.

시간을 그렇게 빨리 돌린다면 과연 이것이 나고 죽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난다고 해도 맞지 않고, 죽는다고 해도 맞지 않아요.

그냥 하나의 현상이 있을 따름이죠.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고 늘 변한다고 하는 겁니다.

 

얼음으로 된 구슬을 통에 담아 어린아이에게 줬다고 합시다.

어린아이가 얼음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두고 밖에 나가 다른 놀이를 하다 들어옵니다.

그런데 구슬 통을 보니 물만 남아 있는 거예요.

어린아이는 “엄마, 내 구슬 어디 갔어? 누가 내 구슬 통에 물을 담아놨어?”라고 하겠죠.

형태만 얼음에서 물로 변했을 뿐 본질적으로는 생겨난 것도 사라진 것도 없지만,

아이는 형상에 집착해서 얼음과 물을 별개로 보고는 얼음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거죠.

 

얼음이 없어졌다, 물이 생겼다, 이것이 생멸이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상(相)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 같은 생멸관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현상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인식상의 오류일 뿐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꿰뚫어보면 얼음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에요.

다만 변화가 있었을 뿐이죠.

사라진 것도 아니고 생겨난 것도 아니기에 이를 불멸불생이라고 해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불생불멸하다 하여 영원하다, 변함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무상(無常)하다는 거예요.

무상하다는 말은 허무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어떤 주관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 사물의 실제 모습을 묘사한 말이에요.

실제의 세계는 그렇게 무상하다는 겁니다.

어떤 형상, 어떤 존재도 항상하는 것은 없다. 영원불멸하는 것이 없다. 늘 변화한다는 거지요.

우리는 이 변화를 알지 못하고 형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각각의 존재들이 개별적 단독자라고,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그 형상이 바뀌면 사라졌다거나 생겼다거나 하는 식으로 잘못 인식하면서

생멸관에 빠지는 겁니다.

생멸관에 빠지기 때문에 태어났다고 좋아하고 사라졌다고 슬퍼하는 거구요.

 

생겨난 것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는 생겨난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출렁거림에 불과해요.

이같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죽음을 그냥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태어나고 죽어가고 있지만 우리가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태어남이나 죽음에 우리가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집착하지 않으면 고(苦)도 없고 낙(樂)도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내 가족이다 할 때는 그렇게 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애착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변화를 움켜쥐고서 변하지 못하도록 막아보려고 하지만, 변화한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인데

이 객관적 사실을 막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더 큰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바다에서 파도가 일었다 사라지는 것을 응시하듯이, 구슬 통의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는 것을 응시하듯이 삶과 죽음을 응시해야 합니다.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이라는 현상을 삶이라는 현상처럼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일부러 끊지도 않고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붙들지도 않습니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일지 못하도록 하지도 않고, 파도가 사라지는 것을

억지로 사라지지 못하게 막지도 않아요.

인연을 따라 일어나고 인연을 따라 사라지는 파도를 바라보듯이 삶과 죽음도

하나의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응시할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자식이 죽어서 슬프다, 괴롭다 하지만, 실은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집착 때문에

괴로움이 오는 것이지, 죽은 아이 때문에 괴로움이 오는 것은 아니에요.

죽음은 찬양할 일도 아니지만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생명을 억지로 죽여서도 안 되고,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살리려 해서도 안 됩니다.

호흡기를 달고 몸에 온갖 것을 집어넣어 식물인간으로

삶을 연명시키는 것도 생명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인연을 따라 일어나고 인연을 따라 사라져가는 자연의 원리에 맞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 나를 흔들다: 〔산티〕88 ∼94쪽> 에서 인용함

 

 

출처 : 스텔라(요셉의 꿈엔들)
글쓴이 : 스텔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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