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바지엔 ‘중미합작(中美合作)’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밀가루 부대를 잘라 만든 바지였기 때문이다.
걸레를 기운 듯한 윗도리에, 광목천을 꿰매 만든 가방을 들고,
맨발로 걸어온 수십리 산길이었지만 소년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 돈을 벌 수 있다.”
밥보다 고구마 죽을 먹을 때가 더 많았던 나날,
그것도 없을 땐 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고통,
그래도 참을 수 없었을 땐 훔쳐서 먹어야 했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동생을 낳던 날, 산파도 없이 혼자 탯줄을 자르고는
곧바로 빨래를 하러 나가야 했던 어머니였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머니, 제가 돈 많이 벌어 편안히 모실게요.”
쌀집 점원으로 취직한 15세 소년은 굳게 다짐했다.
소년의 이름은 왕융칭(王永慶).
30개 계열사에 9만명 임직원을 두고 연매출 617억달러(2007년·62조원)를 올리는
대만 최대 기업 ‘포모사그룹’의 창업자다.
‘맨발’로 출발해 세계적 기업을 일으켜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 받아온 왕 회장.
지난 10월 15일 세상을 떠난 그는 약 20일 뒤인
11월 11일 세인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났다.
대만 언론이 이날 그의 유언장을 공개, 깊은 감동을 전한 것이다.
유언과 함께 왕 회장이 세상에 환원한 재산은 무려 9조원에 달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누구나 재부(財富)를 바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모으는 재산은 다를지 모르지만 세상과 작별할 때는
모두 사회에 돌려줘야 하는 데엔 예외가 없다.
돈은 하늘로부터 잠시 빌린 것일 뿐이다.”
왕융칭은 자린고비다.
그는 양복 한 벌을 20년 이상 입었으며 목욕용 때수건 한 장을 30년간 사용했다.
“국제 전화비가 아깝다”며 유학 중인 자녀에게 전화도 자주 걸지 못하게 했고
편지를 쓸 땐 앞·뒷장에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안부를 적었다.
딸의 결혼식에 “신랑에게 잘 해주라”며 혼수품으로 면도기 한 개를 준 일화는 유명하다.
“한 직원이 왕 회장 집무실에 1000달러짜리 카펫을 깔았다가 해고될 뻔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매사에 철저한 그는 하지만 주변을 돕는 일에 대해선 ‘자린고비’가 아니었다.
왕 회장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떠난 아버지 왕장껑(王長庚)을 기리기 위해
1976년 20억타이완달러(약 740억원)를 쾌척해 비영리재단인 장껑기념병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땐 자신의 전 재산 9조원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언을 남겨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자녀들을 ‘갓 태어난 병아리’에 비유했다.
“스스로 모이를 쪼을 수 없는 병아리를 위해
어미닭은 쌀알을 잘게 쪼개 하나씩 입에 넣어준다.
하지만 홀로 모이를 먹게 된 병아리가 계속 어미 닭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면 당장 혼쭐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왕 회장은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결혼할 때까지 자녀를 봐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자녀는 엄격하고 강인하게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왕융칭은 자식들에게 엄격한 태도를 견지했다.
영국 런던대학 화학박사인 맏아들 왕원양(王文洋)이 1980년 돌아와 가업을 이으려 했을 때
그는 “말단 사원부터 시작해 과장·조장·부장 등의 단계를 ‘남들과 똑같이’ 거치라”고 강요했다.
이후 간부로 승진한 맏아들이 결혼 문제로 의견을 달리하며 우유부단함을 보이자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그룹 총재직을 조카이자 전문CEO인
왕원위앤(王文淵)에게 물려준 뒤 아들과는 의절했다.
그는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진리는 쉽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보통 사람의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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