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붉은 능소화와 한 묶음 넉넉히 피어오른 참나리 그리고 외벽을 올라탔던
싱그런 초록 담쟁이는 시간을 갉아먹은 뒤 이제는 가을날의 짙은 갈색추억으로 남아
스스로 겨울채비를 기어이 끝내버린, 만추를 이미 비켜선 고모리 풍경
그리고 그 앞에 선 "아빠 어렸을 적에"라는 막걸리풍의 토속주점,
탐스런 밤나무의 자태도, 잎으로 감싸였던 은행나무도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버린 뒤 벌써 퇴락의 길을 걸어가고 심지어 개울물 조차
숨죽어버린 11월을 맞이한 아빠 어렸을 적의 추억은 그저 조용히
나뒹구는 마른 낙엽과 함께 늦가을의 시간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둔탁한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양새가 이쁜
겨울난로 하나가 훈훈한 열기를 연신 뿜어내고 있고 있으니 분위기마저 온화합니다.
칸막이 기둥에 얽매여있는 짚신과 앙증맞은 작은 망태로 옛 시간을 만나게 되고,
손풍금 위에 올려놓은 양은도시락은 분명 이 아빠가 어렸을 적에 허기진 배를
시간만 되면 포만으로 바꾸어주던 결코 잊지못할 삶으로 이어지는 끈이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내리 입어야했던 교련복, 내 나이는 분명
군사교련의 세대인데 지금은 그냥 추억으로 자리잡고는 기억 한켠에
조용히 숨어버린 시간이기도 하니 역시 세월이 추억을 만들어가네요.
망태를 씌운 천정의 전구조차 옛시간의 끈으로 이어져있어 실내가 그리 밉지는 않습니다.
가게속의 또 하나 작은 가게는 말 그대로 아빠 어렸을 적에 하루에도 수십번을
들락날락거리며 먹거리를 손에 쥐고 나왔던 까마득한 시절의 구멍가게인데
희뿌연 백열전구가 밝혀주는 건 잃어버린 옛시간과 그 속의 추억인데
가게에는 지금도 추억을 불러일어킬 만 한 생필품으로 가득한데
실지로 돈을 주고 파는 물건도 있어 재미삼아 과자 두봉지를 사게되니
500원짜리 뽀빠이 라면땅...
가게 벽면에 부착된 담배판매대를 살펴보니 한번도 보지못한 상표를 가진
담배와 성냥들로 호기심을 자극시키는데 옛 담배중에 그나마 기억해내는
장미와 파고다, 새마을과 화랑이 있기에 반가운 미소를 띄울수가 있었습니다.
키 작았던 꼬막둥이 시절에는 이발소 이 의자에 나무판자를 깔고는
그 위에 걸터앉아 키를 높힌후에 바리깡이라는 기계로 이발하던 시절이
갑자기 주마등처럼 떠오르니 먼 옛날의 지독한 추억자락입니다.
만지지 말라니 만지지는 않습니다만, 검정 케이스에 들어있는 큼지막한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나만 있으면 밤샘 공부도 지겹지 않았었지요.
그러고 보니, "한밤의 음악편지"라는 심야 라디오 방송이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크~~! 이건 자명종과 공부 못하는 학생 기죽이는 성적표,
투박한 나무로 이어만든 마룻방에 손님들이 소주잔을 비우며 추억여행 중인데
손님들이 자리를 뜬 후에야 카메라 렌즈를 그 자리에 들이대게 됩니다.
앉은뱅이 책상과 장f롱, 286쯤으로 보이는 컴퓨터 그리고 나무 책꽃이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연재만화책들이 무척이나 정감스럽습니다.
고인(古人)의 손때가 묻었을 문갑과 괘짝과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수도 없이
페이지를 넘겨서 우리들의 지식을 곱게 새겨주었던 낡은 교과서들...
좁고 낮은 책걸상에 까까머리 단발머리 짝을지어 앉아 공부를 하는데
책상이 좁으니 가운데 선 하나 딱 그어놓고는 넘어오면 연필로 꼭~
우리들의 영토분쟁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있었습니다.
옥수수처럼 매주처럼 매달려있는 백열등으로 옛시간을 깔아놓으니
덕분에 이곳을 찾아오는 방문객은 잠시나마 잊혀졌던 추억을 더듬게 되고
자연 진한 노스탈자가 배인 토속적인 향기를 음미하게 만듭니다.
토벽과 실내공간을 빼곡히 채워놓은 추억의 그림자 속에 몸과 마을을 내려놓고서
가을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창가에 놓인 둔탁한 나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여
맛나게 부친 굴전 하나 시켜두고는 찌그러진 양은주전자에 넉넉히 담아나오는
동동주를 사발 가득히 부어놓고 창밖으로 떨어지는 계절의 고별을 만나며
허기진 마음을 쉬어가게 하는것도 만추의 끝단에는 너무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화려했던 단풍색이 하나 둘 사라지는 그 자리에는 스잔한 갈색 쓸쓸함이
하나 둘 쌓여 허전한 빈 공간을 대신 채워나가는데, 인생길 고개 하나를
힘겹게 넘고있는 이 나이에 걸맞도록 11월에 만나는 시간여행은
이집 분위기 따라 추억까지도 갈색으로 물들어 갈 것만 같습니다.
북쪽의 찬공기가 아주 상쾌하게 얼굴에 내려앉으니 도시에서 느끼지 못하던
신선한 청량감으로 또 한번의 카탈시스를 느끼게 하는 고모리에의 일탈에서
가을이 멀어져가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게 되니 풍요속의 빈곤한 고독입니다.
지금은 추억도 고독도 그리움도 모두가 주홍과 검정빛으로 뒤섞인 갈색이니
생명을 일구어내는 흙빛을 닮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계절이기도 한데
이집에 들어서면 이상하게도 옛 사랑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계절 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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