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답사자료 9- 이즈하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우리 역사의 흔적
이즈하라(嚴原)의 옛이름은 부중(府中)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남아 있는 종가문서(宗家文書)에 '부중진회도(府中溱繪圖)’라는 것이다.
종가문서는 대마도를 1245년 이후 다스리던 종(宗)씨의 집안 대대로의 기록을 모아 놓은 것을 말하는데 '부중진회도(府中溱繪圖)'란 이즈하라 항구를 자세히 그린 그림을 말한다
여기서 부중(府中)은 이즈하라의 옛 이름을 말하고 ‘진(溱)’은 고어로 해수문(海水門), 즉 선착장이다. 오늘 말로 하면 ‘항구’가 된다. 조선통신사가 오갈 때 이 포구 마을의 이름은 부중이었다
이즈하라는 삼면이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나 대마도의 중심도시로서 이 곳에 대마도 전체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절반이 공무원 및 군속이다. 국경의 섬이라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군인 가족이 많다고 한다
이끼섬과 더불어 일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일본 관광객이 왕래하고 있으나 본토나 규슈로 부터 거리가 멀어 그 수가 적으며 오히려 우리 한국관광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농어촌 지역과 같이 젊은 층은 본토로 빠져나가고 노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그 시주사 등이 있고 가족의 묘지가 있으며
조선통신사가 머물면서 우리나라와의 교역과 외교를 통해 선린관계를 유지했던 곳이기에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있는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의 행렬도를 타일에 옮겨 하천 벽면을 장식해 놓았다
먼저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우리 역사와 관련 있는 곳을 알아보자
1. 표민옥적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풍랑으로 조난되어 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표류되면 모두 대마도에 있던 표류민 집단 수용소 즉 표민옥에 수용했다가 조선에서 관리가 와서 적절한 협상 후에 귀국시켰다.
이즈하라 부두 터미널에서 나와 이즈하라 시내를 바라보면 눈앞에 이즈하라대교가 눈앞에 보인다. 이 대교의 오른쪽 두 물줄기가 모여지는 안쪽의 삼각부분 땅이 표민옥적의 자리이다
빈터 뒷쪽은 자위대 나가사키 지방연락부가 있다
2. 수선사의 최익현선생순국비
수선사
높이 2.1m, 폭 0.45m, 두께 0.25m의 크기의 하얀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의 앞면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는 비문이 금색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근심되어) 이 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익현선생순국비
최익현선생에 대한 안내판
최익현의 묘는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으며 1982년 8월 3일 충청남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익현서생은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1907년 대마도에서 이 곳으로 옮겨진 시신은 논산시 노성면(魯城面)의 국도면에 묘를 썼다. 그러나 최익현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수많은 참배객을이 묘소를 찾아 참배를 하자 일제는 강압적으로 선생의 묘소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한다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 21번지에 있는 최익현선생의 묘소
(사진은 블로그/박태선의 시와 산문의 세계에서 가져왔습니다)
3. 팔번궁신사ㅡ최익현선생의 첫번째 유형지
최익현선생이 대마도에 와서 처음 형을 살았던 팔번궁신사
지금 주차장이 있는 터이다
4. 일본 육상자위대 이즈하라분소
일본 육상자위대 이즈하라분소가 있는 곳은
시내 중심가를 관통하는 382번 도로를 따라 나가다가 하타카츠로 가는 길과 아유모도시쪽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 엄원중학교 맞은 편 언덕 위에 있다
5. 태평사의 무연지제영비(無緣之諸靈卑)
무연지제영비가 있는 태평사
이즈하라 시내에서 팔번궁신사를 지나 약 50m 거리에 이즈하라경찰서가 있다
이즈하라 경찰서 옆 골목 안쪽에 태평사가 있으며 경내에는 제주 4.3학살의 무고한 영혼을 달래는
'무연지제영비(無緣之諸靈卑)'가 있다
묘원 안쪽 산자락에 있는데 수많은 묘비가 있어서 찾기가 좀 어렵다.
제주 4.3 양민학살사건 때 죄도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해 제주바다에 버려진 시신이 조류를 타고 대마도에 떠내려 온 것을 이 곳 어민들이 수습하고 영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놓았다고 한다.
수습된 시신들은 서산사 뒷산 대나무 숲과 태평사 뒷산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누가 세웠는지 모르지만 묘비 앞에 작은 보살입상을 안치해 놓았다. 아마 지장보살이 아닐까 싶다
무연지제영비(無緣之諸靈卑)
6. 고려문(高麗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金石城)>을 만들고 정문 즉 영은문으로 만든 문으로서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려문'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현재의 고려문은 원래 대마도 도주가 머물던 사지끼바라 성에 있던 것으로 1987년 태풍의 피해를 받아 무너진 것을 현재 대마 역사민속 자료관 앞에 복원한 것이다.
금석성의 정문은 노문이라 하여 망루역할을 하는 문이며 고려문은 노문을 들어서서 성 안에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순전히 환영한다는 영접의뜻으로 세운 문으로 <조선통신사>들이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고려문
금석성의 정문인 노문 (성 밖에서 본 모양이다)
7. 조선통신사비
대마민속역사자료관 앞의 조선통신사비
선조40년(1607)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한 사행단(使行?) 467명을 시작으로 169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둔 비석으로 대마민속 역사 자료관 앞에 있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조선통신사는 출발에 즈음하여 정사, 부사와 종사관 3사신은 서울(한성부) 창덕궁에서 국왕을 알현하며 이때 국왕이 직접 국서를 전교한다.
총 500명에 가까운 통신사 일행은 서울을 떠나 육로로 부산에서 재집결하여 출항을 기다린다. 사절단은 기선(騎船)이라 불리는 배 3척에 나누어 타게 된다, 정사선(正使船)은 길이 약 40미터, 약 150명이 타는 큰 배이다.
이윽고 길일(吉日)을 골라 연가대(永嘉台 부산 자성대 소재)에서 해신(海神)에게 항해의 안전을 비는 기풍제(祈風祭)를 올린 뒤 모든 선박이 같은 뱃길을 따라 대마도로 향한다. 부산과 대마도 사이는 가장 가까운 곳이 약 50킬로, 순풍으로 파도가 잔잔한 날은 쾌적한 뱃길을 즐길 수 있지만, 그 때는 기상 정보가 충분치 않았던 시대라 어려운 항해를 피할 수 없었다. 가끔은 선체가 손상되거나 배 멀미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선단은 일단 대마도 최북단, 사스나우라(佐須那浦) 또는 와니우라(鰐浦)에 도착한다. 거기서부터 선단은 대마번이 보낸 뱃길 안내선의 보호를 받으며 시계 바늘 방향으로 섬의 작은 포구 서너 곳을 둘렀다가 드디어 후츄(府中- 현재의 이즈하라)에 도착한다.
이즈하라에서는 대마번주와 이테이안의 장로 두 사람이 탄 배가 항구 밖까지 출영하여, 배에서 최초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통신사 일행은 이즈하라에서 적어도 10일간, 긴 경우는 3주간을 머물게 된다. 배를 보수하거나 식량 등을 조달하고 게다가 바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체류하는 동안에는 대마번주의 초청향연이 있으며 이곳의 인사들과 교류를 한다.
조선통신사들의 숙사는 때에 따라 특별히 설치된 관사이거나 류효인(流芳院), 케이운인(慶雲院), 다이헤이지(太平寺) 등의 큰 사원으로 정해졌다.
대마를 출발한 통신사선단은 다시 해협을 건너 이키섬에 도착한다. 이 사이의 항로도 강풍이 자주 부는 험난한 해역이어서 통신사가 탄 배도 자주 선체가 손상되었다.
이키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하카타(博多)만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아이노시마(相島, 藍島)에 도착한다.
후쿠오카번의 영지로, 주위가 약 6킬로미터인 이 섬은 큐슈 본토에서 약간 떨어져 있지만 초생달 모양의 양항이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선단의 기항지로 정해졌다. 이어 선단은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항해하면서 여러 곳을 둘러 약 2개월의 긴 항해 끝에 오사카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통신사 전용 선단을 정선시키고 육로로 교도와 비와코(琵琶湖)를 지나, 나고야, 시즈오카, 하코네 등 나카센토(中線道)를 따라 에도로 갔던 것이다.
' 조선통신사막부접우지'라고 적힌 비석
※ 조선통신사막부접우지(비석)-이즈하라 거리 군데군데 있음
마지막 통신사가 역지빙례(易地聘?)에 의하여 본토에 입국하지 않고 대마도에 머물 때 ‘조선통신사와 막부가 머물렀던 집’이라는 표시
※ 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한다는 정책
이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조선통신사행렬도(부분)
8,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결혼봉축기념비
금석성내에 잔디밭에 있다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이 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이왕가(李王家)라는 말을 썼을까?
일본인들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황족을 낮춰 부르는 말이 '李王朝'라는 말인데 우리 조선인단체에서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말을 썼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처음 팔번궁 앞 지금의 서일본은행 자리에 있었으나 1955년 종무지(종무지)와 이혼 후 이를 쓰러트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취항 후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이 자리에 다시 되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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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연에 얻게 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1931년 5월 쓰시마섬[?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였다. 이후 순탄하지 못한 생활로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인물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대마도답사자료 8 - 대마도속의 우리 인물"을 참조하세요)
9. 대마역사민속자료관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이즈하라시의 가장 중심가인 이즈하라우체국과 문화교류센터에서 150여m 거리에 있는 쯔시마 시청 앞에 있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를 도입하는 요충지로서 위치한 대마도의 역사적 문화유산과 각종 민속자료, 한반도에서 전래된 융기문(隆起文).무문(無文) 토기도를 비롯해 조선통신사들의 행적 등 우리나라와 관련된 문서들이 많고 대마도의 민속자료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과 대마도의 교류관계를 살필 수 있는 약 46,000점의 방대한 종가문서(宗家文書)가 있다.
이는 조선과의 외교·무역문제의 처리, 대(對) 막부 관계와 이들에 관한 기록의 필요로 만들어진 것으로 모두 번청(藩廳)의 기록물이다
대마민속자료관의 주요 문화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조선통신사 두루마리 행렬도
2. 초량왜관도
3. 한글토가 달린 히라가다 책(첩해신어)
4. 초량(부산)왜관도
5. 조선통신사 접대 상차림 그림도
6. 고려판 대반야경(초조대장경-11세기)
7. 고려청자. 다완 등 자기류
8. 훈몽자회
첩해신어
훈몽자회
(더 자세한 자료는 "대마도답사자료 5 -역사민속자료관"을 참고하세요)
10. 서산사
서산사의 이태안
이즈하라 시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382번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 서산사라고 적힌 패찰의 왼쪽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이 나타나고 바로 앞에 사찰 건물이 눈앞에 닿는다.
서산사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인 대마도 이즈하라의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일종의 숙소이며
임진왜란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던 한·일 관계를 修復하여 평등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對조선국 외교기관이었으며 1611년 건립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이테안이 있는 곳이다.
서산사 뒷편의 대숲에는 제주 4.3 양민학살 사건 때의 억울한 영혼들이 묻혀 있다
제주도에서 영문도 모른 채 군경들에게 붙잡혀 사살되고 그대로 바다에 버려진 시체들이 해류를 따라 이곳까지 흘러왔는데 대마도 어민들이 수습하여 이곳 서산사와 태평사에 시신을 안치했다고 하며
1948년 제주 4·3항쟁 당시 많은 제주도민이 학살을 피해 이곳 쓰시마까지 도망쳐왔는데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자, 그들의 시신을 안치한 절도 바로 이 서산사이다
김성일선생 시비
또 이곳에는 조선의 명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사 황윤길과 함께 조선외교사절로 일본을 찾았던 김성일선생의 시비가 있다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에서 2000년 세운 비로서 1590년 조선국통신사로 대마도에 들려 객관인 서산사에 체류하는동안 승려 겐쇼와 맺은 친분 때문에 이곳에 세운 것 같다
(시비의 내용)
학봉 김성일 선생은 유향(儒鄕)인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덕행과 훈업(勳業)이 청사에 빛나는 도학자(道學者)였다. 대과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선생은 1590년 조선국통신사로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를 위하여 국가 외교와 문화 사절로 일본국을 향한 사행(使行)길에 올랐다. 대마도에 들려 선위사(宣慰使) 현소승(玄蘇僧)의 영접을 받고 객관인 서산사에 체류하는 동안 서로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 중 서산사와 사연이 깊은 시 한 수를 골라 이 돌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인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대마도답사자료-8 대마도속의 우리 인물"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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