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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의녀 김만덕 영정

good해월 2009. 11. 13. 11:39

 

 

의녀 김만덕 영정

의녀 김만덕 영정 "철저한 고증 거쳤다"
만덕영정 그린 홍상문 화백 "28년전 철저한 고증 통해 제작"
"고증없이 제작…터무니 없는 주장"…영정 고증 둘러싼 논란 일 듯
제주의 소리 양김진웅 기자

제주 의녀(義女) 김만덕의 영정이 역사적 고증없이 제작됐다는 주장에 대해 영정을 직접 제작한 홍상문 화백이 "만덕 영정은 당시 구성된 고증위원들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작됐다"고 밝혀 만덕 영정을 둘러싸고 고증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신화폐 여성인물 선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가운데 제기된 것이어서 보다 정밀한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홍상문 화백 "만덕 영정에 대한 모독...안태성씨 주장은 대부분 잘못됐다" 주장

 

   
 
▲ 제주시 모충사내 '김만덕전시관'에 있는 영정. 낙관 자리에 祥文(상문)이라는 한자가 보인다. 홍상문 작
 
홍 화백은 지난 1월 안태성씨(47.청강문화산업대 교수)가 만덕 영정에 대해 역사적.과학적 규명이 부족했다는 주장에 대해 "역사적 고증없이 제작됐다는 주장은 영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안 씨는 '제주의녀 김만덕 안면의 복원에 대한 연구'란 분석 자료를 통해 지난 1월 24일  "김만덕의 초상화는 기골이 장대한 8등신으로 지나치게 서구화된 비율로서 상징성에 치우쳤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홍 화백은 6일 제주의 소리와 만나 "안 씨가 김만덕 영정에 대해 주장한 기사를 뒤늦게 인터넷을 통해 봤다"며 "이는 영정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당시 영정을 그린 화가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것"이라고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홍 화백(54.전 협성대학교 예술대학 교수)은 1978년 당시 김만덕추모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의녀 김만덕 영정을 그리고 성대한 봉헌식까지 가진 바 있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오는 9월 아홉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 그는 한국선면예술가협회 회장을 14년 동안 지내는 등 현역 미술인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상태 .

 

현재 의녀 김만덕 영정은 제주시 모충사내에 있는 김만덕전시관 내에 모셔져 있으며, 영정 왼쪽 아래에 그의 낙관과 함께 祥文(상문)이라는 이름이 쓰여져 있다.

 

"인간문화재 한상수 선생 의뢰...

故 홍정표, 故 석주선 선생 및 만덕 직계손 등 철저한 고증"

 

 

   
 
▲ 28살의 나이에 만덕 영정을 그린 홍상문 화백
 

홍 화백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80호인 자수의 대가 한상수 선생(당시 서울 인사동 견지화랑 대표)이 당시 김만덕추모사업회 회장을 하면서 전국에서 영정 화가를 수소문했다"며 "그 결과 인물화를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젊은 작가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내가 선정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한상수 선생을 비롯해 고 홍정표 선생(당시 제주미술관장)과 복식전문가인 고 석주선 교수(당시 단국대 박물관장), 몇몇 문화재 전문위원, 그리고 만덕의 친정 직계손 등으로 부터 까다롭고 철저하게 고증을 거쳤다"며 "당시 까다로운 고증 문제로 인해 무려 7 차례나 밑그림을 수정하는 등 바탕그림만 그리는데 무려 5개월 이상이 소요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28살의 나이에 만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영정을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1970년대 초 방송 드라마 '아씨' 이후 김만덕을 다룬 고두심 주연의 '정화'를 빠짐없이 보면서 만덕이 위대한 인물임을 알게됐다"며 "이미 35년 전 드라마를 통해 먼저 만덕을 접했던 셈"이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김만덕 영정, '8등신에 기골장대' 주장 →'7등신에 단아한 모습'..."명백히 틀렸다"

 

먼저 홍 화백은 자신이 그린 만덕 영정에 대해 안 씨가 기골이 장대한 8등신'이라는 주장에 대해 "기골이 장대하다는 주장도 납득할 수 없으며 영정 그림은 전체 140cm의 신장에 얼굴은 23cm로 7등신에 해당하며 단아하고 부드러운 자태이다"며 "이는 보이는 사실조차  악의적으로 오도한 명백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 홍상문 화백은 "1978년에 그린 만덕 영정은 당시 전문가를 통해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주장했다.
 

이어 "영.정조시대에 남아있는 기록만 갖고서는 당시  7등신에 가까운 큰 키도 드믈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1977년 1월 3일 홍정표(당시 문화재전문위원) 선생과 만덕추모기념사업회 회원들의 참석하에 이뤄진 만덕묘 이관 작업에서 확인된 바로는 만덕의 관(棺)이 다른 이들의 관 보다 컸다는 고증이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안씨가 주장한 애경유지 장영신 회장이나 삼성 이건희 회장의 풍모를 닯았다는 주장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며 "당시 만나본 만덕의 직계 친족의 모습이나 고증위원들의 고증을 볼 때 이들 인물들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만덕은 남방계 보다 '북방계' 요소 강해"
"귀가 작다는 주장...문헌 어디에도 없어"


또 만덕이 남방계적 요소가 많은 얼굴형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만덕은 남방계형이기 보다 북방계형 요소가 강한 얼굴"이라며 "탤런트 고두심씨가 바로 북방계의 전형적인 얼굴로 꼽힌다"고 설명했다.

 

'만덕은 귀가 작으며 살이 찐 형태로 양쪽 귀가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 역시 "만덕 관련 기록에 살이 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며 "보통 영정을 그릴 때는 위대한 인물들은 남의 어려움에 귀를 잘 귀울인다는 뜻에서 귀를 크게 잘 보이도록 그리는 경향이 많다"고 강조했다.

이어 "귀를 크게 그리는 것은 이는 고증위원이나 전문가들의 일치된 주장"이라며 "만덕의 귀가 작다는 것도 문헌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

 

 

홍 화백은 "안씨의 이 같은 주장은 영정을 그린 화가에 대한 심대한 명예훼손"이라며 "그가 언급한 김만덕 안면 복원에 관한 연구보고서 역시 논문을 쓰는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글"이라며 안씨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 이당 김은호가 어진을 그리는 모습(좌). 창덕궁에서 이당이 전통적 복장으로 순종 어진을 그리고 있다(우).(이당 김은호 작품집 발췌)

 

또 "만덕 영정의 제작년도 역시 제주시측에서 밝힌 1990년은 잘못됐으며, 김만덕추모기념사업회에서 의뢰해 1978년도 7월 18일에 영정 하나만을 제작한 것이 맞다"며 "당시 1000만원대의 보상이 이뤄졌다는 내용도 전혀 근거없는 액수이며 이 보다 훨씬 적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작년도가 잘 못 전달된 것은 1991년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되면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제작년도, 1990년 7월→1978년 7월 중순...당시 도지사까지 참석해 '봉헌식' 가져

 

또 "만덕 영정의 제작년도 역시 제주시측에서 밝힌 1990년은 잘못됐으며, 김만덕추모기념사업회에서 의뢰해 1978년도 7월 18일에 영정 하나만을 제작한 것이 맞다"며 "당시 1000만원대의 보상이 이뤄졌다는 내용도 전혀 근거없는 액수이며 이 보다 훨씬 적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작년도가 잘 못 전달된 것은 1991년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되면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일부 화폐 인물이나 역사적 인물이 잘못됐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입장을 달리했다.

 

   
 
▲ 2005년 홍 화백이 그린 이조판서 정자숙 영정.
 
안 씨는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과 논개의 영정에 대해서도 "춘향과 논개의 영정이 이당 자신이 그렸던 중국의 양귀비 얼굴과 너무 흡사해 세 그림 모두 서로 복사한 것 같다"며 "모두 7~8등신으로 서구적인 비율을 가져 동양적인 영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고증 바탕...아름답게 그리는 게 원칙"

 

이에 대해 홍 화백은 "영정은 가급적 아름답게 그리는게 원칙"이라며 "사진을 찍더라도 이왕이면 잘 나온 사진을 싣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설화적 인물의 경우 고증자료가 없을 수 있으며 구전되어 오는 미담을 중심으로 그리게 되는게 일반적인 통례"라고 말했다.

 

이어 "서양의 얼굴에 대한 설명은 합리적인데 비해 동양은 사유적 표현을 많이 쓴다"며 "가령 한국의 미인에 대한 설명을 볼 때 얼굴은 달걀같고, 피부는 백옥같고, 코는 마늘쪽 같고, 눈은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하고, 입술은 선앵두를 문 듯하다는 식으로 우리 전형 미인들의 전통미가 전해져 왔다"고 풀이했다.

 

따라서 "춘향과 달리 문헌상 만덕에 대한 일부 묘사 역시 추상적이다"며 "대부분 여성인물의 경우 한국의 전형적인 미인의 틀에 맞춰 그릴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만덕은 그래도 직계 친족이 생존해 있고, 고증자료 또한 아쉬운대로 남아 있어 영정을 제작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됐다"고 강조했다.

 

"월전으로 부터 강감찬 영정기법 사사 받아...'친일 논란'과 '인물 영정' 문제는 별개"

이당 김은호(1892~1979)

신사임당, 이율곡, 논개, 춘향, 양귀비

월전 장우성(1912~2005)

이순신, 윤봉길, 정약용, 강감찬, 김유신,

정몽주, 유관순, 이병철

운보 김기창(1913~2001)

세종대왕

 

친일화가 논란이 일고 있는 이당 김은호(1892~1979)가 그린 영정과 운보 김기창(1913~2001), 월전 장우성(1912~2005)의 영정 작품 역시 문제가 있다고 제기한 안씨의 주장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 월전이 그린 故 이병철 전 삼성회장. 원래 모습보다 풍채가 장대하게 그려졌다.
 

홍익대학교 재직 시절 월전 장우성 화백의 마지막 제자라고 밝힌 홍 화백은 "월전이 1974년 6~8월에 다산 정약용, 강감찬 영정을 제작했을 때 월전의 화실(서울 관훈동 이내수 내과 2층)에 부름을 받아 영정제작 과정을 전수받기도 했다"며 "그 당시 응접실이 아닌 작업공간에 출입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제자 중의 한사람으로 귀한 사사를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특히 홍 화백은 "친일파 논란의 작가가 그렸다는 이유로 그가 그린 영정 인물까지 문제삼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이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두 가지의 문제는 구분해서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 예로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져 있는 맥아더 동상을 예로 들며, "그 동상은 친일작가 故 김경승 작가(이화여대 교수)의 작품인데 그렇다고 맥아더 동상을 없애고 새로 세워야 하느냐는 엄연히 별개의 문제"라며 "이는 친일로 드러난 춘원 이광수의 작품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당 김은호 문하에서 사사받은 현초 이유태(1916~1999)가 그린 천원권 지폐의 이황 인물과 관련해 '마치 자신을 그린 것 처럼 작가와 쌍둥이 처럼 닮았다'는 안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비슷한 작가 사진만을 놓고 억지로 맞춘 격"이라며 "이는 터무니 없는 논리적 비약"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반증할 수 있는 사람이 이미 세상에 없다고 어떻게 악의적으로 영정을 폄훼할 수 있느냐"며 "이를 제기했던 정확한 글의 출처를 찾고 있지만 일부 내용을 살펴볼 때 논문을 쓰는 기본도 갖추지 못한 글"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영정과 화폐 인물의 표현기법도 서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영정 표현은 주로 '요철법'...화폐 제작은 대체로 '태서법(=명암법)' 서로 달라
"새로운 화폐 모델...당시 고증 거쳐 그렸던 영정의 원래 모습 지키는 것이 원칙"

 

   
 
▲ 홍 화백이 화폐 제작 기법인 '태서법'(명암법)으로 그린 인물 모습.
 
"영정은 창작물이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제작되는 역사적인 작업"이라는 홍 화백은 "대부분 현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의 영정은 한마디로 영정의 용도에만 정확하게 쓰이도록 제작된 것으로 표현기법으로는 동양화의 전통화법인 '요철법(凹凸法)'에 따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양화는 서양화에 비해 평면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며 "만약 영정을 화폐 인물로 다시 그릴 경우는  '태서법(泰西法=명암법)'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가장 어려운 영정이 완전 정면과 완전 측면에서 바라다 본 모습"이라며 "대부분의 영정이 약간씩 측면을 보는 듯이 그리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새롭게 화폐 모델로 삼을 경우 이미 고증을 거친 영정의 모습을 바탕으로 작업이 이뤄져야 함이 원칙이며 이미 고증을 공인받은 영정과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옳지 않다"며 "당시 고증을 거친 영정의 모습을 토대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홍 화백은 "만덕 영정만큼은 누구보다 철저한 검증을 거쳤고 또 고민해왔다고 자부한다"며 "적어도 저 보다 만덕 영정에 대해 제대로 그려내고 또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간헐적인 영정 '미화' 논란...

 

기념사업회측 "영정을 다시 제작하는 것은 고려치 않고 있어"

 


 

   
 
▲ 자신이 그린 만덕영정 앞에 선 홍상문 화백
 

 

김만덕 영정에 대해서는 그 동안 일부 향토사가를 중심으로  '미화' 논란이 간헐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와함께 '김만덕 우상화'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적어도 가문이 화려하고 훌륭한 아들 율곡을 둔 어머니이며 당시 화가로도 유명했던 신사임당 보다도 동시대의 수많은 이들에게 경제적 이윤을 환원하고 규휼정신을 실천한 김만덕에 대한 삶의 가치를 더 평가하는 것만은 분명하다"며 "다만 보다 철저한 역사적인 규명 작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더욱이 김만덕 영정에 대한 역사적 고증 문제를 놓고 일부 입장이 뚜렷하게 갈리면서 보다 정밀한 검증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정부가 추진하는 화폐신권의 역사인물로 여성인물이 유력하게 검토되면서 어느때 보다 세인들의 관심도 높아, 차후 화폐 제작시 김만덕을 화폐 인물로 추대하기 위한 철저한 고증 및 검증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은 상태다.

 

이에 대해 (사)김만덕기념사업회 강재업 회장은 "현재 김만덕 영정에 대한 새로운 제작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현재 모충사에 있는 김만덕 묘비가 제주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올해부터는 그간 제주지역에 머물렀던 '김만덕 봉사상'을 전국 규모로 확대하는 등 김만덕기념사업에 대한 가시적 성과가 점차 드러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편 순조 12년인 1812년 11월 21일에 건립된 김만덕 묘비는 가로 47cm, 높이 95cm, 두께 13cm로 현재 모충사 동남쪽으로 옮겨와 제주시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다.

 

   
 
▲ 월전 장우성과 월전이 그린 윤봉길 의사 영정.
 

   
 
▲ 제주 모충사 동남쪽 만덕전시관 옆에 세워진 김만덕 비. 도지정 유형문화재로 예고됐다.

 

<출처;chosun닥터우리들(mjkc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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