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일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4대 국경일 중 하나인 개천절로써 해방 이후 1949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시행되고 있다.
개천절은 국민들에게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로 인식되고 있으므로 국가 최고의 경축일임에 틀림없지만, 5.16 이후 단기년호가 서기로 바뀌고 다른 경축일과 달리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일면 의례적인 경축일로 전락되었슴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정부와 국민이 개천절에 대한 의미를 이처럼 소홀히 여긴다면, 단군조선이 간도와 동북아 일대를 강역으로 하였던 점과 일제에 의해 신화로 왜곡되어 실체마저 말살되었던 사실, 그리고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등 일련의 역사침탈에 비추어, 우리 스스로 고대국가와 역사를 부정하고 그 강역에 대한 연고권마저 포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에다, 하늘을 열었다는 개천의 의미가 천지창조의 하나님과 상충된다고 보면서 일체 개천절 행사에 불참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관점과, 해방60년이 지나도록 단군조선의 실체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학계의 무력한 고대사관이 두루 작용하고 있슴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로써 가히 자중지란의 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체 단군조선에 대한 부정이 어디까지 갈 것이며, 언제까지 선조의 역사를 심사해야 공백으로 남겨진 우리 역사가 되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권한이 후손에게 있기나 한 것인가. 이러한 상황들은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바뀐 느낌을 넘어서, 정신병동에서 펼쳐지는 한편의 역사 코믹극을 보는 것만 같다. 일제에게 유린되어 만신창이가 된 단군에 대해 이번에는 후손들마저 자신들의 잣대를 들이대며 희롱하는 것과 같지 않으냐는 말이다. 그러나 개천절은 경천동지의 역사적 변수를 지니고 있다. 1887년 조선과 청나라 간의 미해결 국경회담 이후 일본과 협잡하여 간도를 일방적으로 점유하고, 이를 뒷바침하기 위해 남의 나라인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왜곡한 중국의 불손한 저의를 침식시킬 수 있는 고대사의 진실이 간직되어 있고, 식민사학과 사대주의 사학으로 민족사를 농단하고 있는 한국사학계의 위선을 쓸어버릴만한 미증유의 파괴력과, 세계사를 다시 써나갈 수 있는 한민족 비장의 문화 아이콘 임을 한국인 모두 깨달아야 한다. 이 놀라운 선조의 메시지를 열어 보이기 위해 한국인 모두에게, 특히 정부와 사학계와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두가지의 질문을 던져본다.
개천절 유래 '10월3일은 어디에서 유래하여 정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개천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질문의 핵심은 ‘어디에서’인데 물론 문헌을 말하는 것 이다. 어느 국가의 국민이라도, 계층을 막론하고 국가의 경축일에 대한 유래를 알아야 할 의무가 있고, 정부나 관계부처는 이를 국민들에게 잘 알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모두 답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거의 모든 한국인을 비롯하여 정부와 사학계와 기독교인이 답을 말할 수 없음을, 필자가 미리 알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울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답을 말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답을 안다면 기독교가 지금처럼 단군을 배척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사학계가 개천절을 국경일로 치루도록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개천절 행사를 격하시켜 국무총리의 주관으로 맡겨두는 일도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역사적인 문제이므로 사학계를 중심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우리의 국사체계가 오로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정사로 삼고 있슴은 주지의 사실이다. 1145년 고려인종23년에 왕명을 받아 김부식이 편찬한 50권의 삼국사기는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들던 당시의 사대주의 정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책이다. 당연히 단군이나 10월3일이나 개천에 대한 고사가 있을리 없다. 이에 비해 일연대사가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단군고사를 비롯하여 북부여등 고대사를 담고는 있지만 그 내용이 모두 중국의 위서, 전한서, 위지, 통전, 후한서 등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삼국사기보다 더 중국적 관점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여기에도 10월3일이나 개천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근세 국권의 몰락으로 식민사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교육을 철폐한 일제가 친일사학자들을 앞세워, 그들이 편찬한 조선사 35권으로 한국인을 교육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7년 전인 1938년부터이다. 당연히 10월3일이나 개천의 유래가 존재 할리 없다. 이 때 핍박을 받은 민족사학이 오늘날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민족사학의 질곡 민족사학이란 우리의 관점에서 저술되어 전해져 온 역사를 말하는데, 외세가 물러난 오늘날에도 식민사학의 계보를 잇고 있는 현 국사학계에 의해 실증을 강요받고 있다. 이른바 실증사학이란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등장시킨 논리로써 중국책이나 일본책에 없는 역사는 인정할 수 없으니 철저히 고증해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나 중국의 역사가 다 고증을 거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우리를 비하시킨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서는 진실규명이 어렵다는 것이 뻔한데, 고대로 타임머슌이라도 타고 갔다오라는 말인가. 아니면 우리의 강역이었던 간도를 파헤치기라도 하란 말인가. 이것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억지 논리요 국사체계인 것이다. 실증사학의 논리와 함께 민족사학을 핍박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고대사에 관한 선조의 문헌을 거의 다 '위서'로 몰아부치고 있는 점이다. 만약 민족사학이 국사에 반영되는 날, 현 사학계는 그들이 지금까지 가르쳐왔던 중국문헌 중심의 사대주의 학풍과, 일제로부터 체계화된 식민사학의 범위에 안주했던 자기들의 편협한 사관이 지탄을 받게 될 것이 뻔하므로 사력을 다해 '실증'과 '위서'의 방패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 입장에서는 민족사학의 뿌리이자 최고봉을 이루고 있는 개천의 역사와 단군조선의 역사는 절대 부각시킬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마침 우리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기독교계까지 합세하여준 것은 그들로서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단군세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10월3일과 개천의 유래를 찾아가면 뜻밖의 문헌을 만나게 된다. 이 답은 국내외 모든 고문헌 중 꼭 한군데에만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고려말인 1363년에 행촌 이암선생이 펴내신 '단군세기'인데, BC2333년 제1세단군 왕검의 고조선 건국기사로부터 47세고열가단군 58년인 BC239년까지 무려 2,096년간 간도를 포함한 동북아 일대를 영토로 군림했던, 위대한 조선국과 대부여국의 역사가 생생히 살아있는 진짜 우리의 역사책이다. 여기에 바로 유일하게, 개천과 10월3일에 대한 유래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1세 단군왕검조에 기록된 본문을 보자.
무진원년(BC2333년), 신시의 세상이 처음 열렸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의 이곳 저곳에 살면서 풀잎 옷에 맨발로 다녔는데 개천 1565년 시월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란 사람이 있어 오가의 우두머리로써 그를 따르는 8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박달나무 터에 와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삼신께 제사를 올리고 다스림을 열었다. 그 다스림은 지극한 신의 덕과 성스러운 인자함을 겸하여 능히 하늘의 가르침을 이어갈만 하였으며, 높고 넓고 오직 굳세어 구환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정성으로 따랐고, 천제의 화신이라며 임금으로 추대하여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법을 되찾고 아사달을 수도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한국사학계가 위서로 지목하고 있는 단군세기의 본문기록에 의해 10월3일을 국경일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10월3일의 고조선 건국기사만 취용하고 마흔일곱 단군의 2,096년간의 역사는 방치하고 있는 이율배반과, 자신들이 금기시 하고 있는 단군세기의 내용에 의해 국가가 국경일을 지정했슴에도 불구하고 항의하지 않고 있는 사학계의 위선이 보기좋게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개천1565년'이라는 위 기록에 의하면 개천절과 10월3일의 조선건국과는 관계가 없슴을 알 수 있다. 즉 개천은 단군의 건국보다 1565년 전의 신시(神市)의 역사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단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신시의 역사인 개천을,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날이라고 바보놀음을 하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고대사를 1565년이나 축소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국민 모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시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서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옛날에 환인이 계셨다. 서자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려는 욕심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시고는 가히 홍익인간할 만한 곳인지라 마침내 천부인 셋을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그를 따르는 삼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아래 내려와 신시라 하였다. 이 분이 환웅천왕이시다. 환웅천왕의 개천 한민족의 첫 도읍지가 신시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직 개천에 대한 고증이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중종임금때 찬수관으로써 궁중비서를 관장했던 이맥선생이 편찬한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 자세한 전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맥선생은 조대기(朝代記)라는 문헌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데 이 역시 민족사서임은 물론이다.
조대기에서 말하기를 ‘당시 사람은 많고 나는 것은 궁핍하여 살아나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에 환웅이라는 대인이 있어 그러한 사정을 듣고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고 싶어했다. 그때 *안파견께서 금악.삼위.태백을 두루 보시더니 태백이 가히 홍익인간할 만한지라 마침내 환웅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 지금 이토록 사람과 만물의 업이 이미 다 이루어져 있으니 그대는 노고를 아끼지 말고 몸소, 사람의 무리를 인솔하여 하계로 내려가 '개천'하라. 교육을 베풀고, 천신께 제사지냄을 주관하고, 부권을 세워 하나같이 조화를 이루어 평안하도록 이끌고 돕도록 하라. 또 스승의 도를 세워 *재세이화(在世理化)하여 자손만세의 큰 법도를 이루도록 하라” 하시고는 마침내 천부인 셋을 주며 가서 다스리도록 보내셨다. 환웅이 따르는 무리 삼천을 이끌고 처음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라 했다. 풍백,우사,운사를 우두머리로 하여 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으로 범 인간 삼백육십여사를 주관하여 재세이화, 홍익인간하니 바로 환웅천왕이라 한다.(*안파견은 환인천제의 별칭으로써 하늘을 대신하여 서신 분이라는 뜻이며, *재세이화는 ‘세상이 하늘의 이치로 다스려지는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이상의 문헌기록을 통해 개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개천이란 환웅천왕께서 홍익인간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BC3897년에 환인천제로부터 천부인 셋을 받아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세우신 한민족의 첫 역사라고 말이다. 개천은 홍익 개천과 홍익이 BC3897년에 존재했다는 것은 여러 문헌이 증거하고 있는 기정 사실이며 뚜렷한 인류의 역사이다. 다른 국가나 국내사학계가 세계사적 측면에서 어떠한 의문을 제기한다해도 개천과 홍익의 존재를 지우거나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개천절 행사는 환웅천왕과 단군님을 함께 기리는 범국민적 축제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동시에 홍익의 이상을 전 세계에 전파하여 한국이 초인류적 평화정신으로 출발된 도덕적 국가임을 알려야 한다. 개천의 목적이 홍익인간이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개천과 홍익인간의 관계는 하늘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 가치가 '서로 돕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 홍익은 시공을 초월하는 인류최상의 평화정신이며 인본주의적 가치관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홍익을 이념으로 즉,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주창하며 형성된 글로벌 민족이며 홍익이야말로 인성을 향해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대과학과,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21세기 인류의 빛이요 희망이다.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이 빛의 여행에 의한 과거의 모습이듯이, 홍익은 과거의 정신이 아니요, 지금 인류의 눈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또 하나의 빛이다. 한민족은 그 빛을 나누어주기 위한 역사적 소명을 위해 눈을 떠야 한다. 우리는 하늘과 우주의 이치대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왔고, 모든 인류가 서로 도움으로써, 더불어 공영을 누리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개천과 홍익의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국기독교가 세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저 아득한 옛날 BC3897년에 이미 우리의 선조가 개천을 선언하며 머리에 인 그 하늘과 다르다면 유일신은 과연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두 개의 하늘은 있을 수 없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초기 한국기독교인들의 정신을 되찾아 현재의 모든 기독교인들도 민족의 개천을 하늘의 이름으로 맞이하여야 한다.
또 식민사학과 사대주의 사학의 틈에서 논리의 모순과 위선의 늪에 빠져있는 한국사학계는, 지금이라도 민족사학의 품으로 돌아와 개천과 홍익의 빛을 내려받아 민족의 본 모습과 역사를 바로 세우는 대열에 마땅히 앞서야 한다. 그것이 개천절의 뜻임을 엄숙히, 겸허히 헤아려야 한다. 그리하여 정부와 사학계와 국민 모두가 우리의 후세들에게, 홍익민족이 21세기 인류의 정신문명을 이끌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개천5906년 새 아침에 인류평화를 향한 홍익의 새 빛이 밝아오고 있다. 오! 역사는 살아있다.
필자소개 박달 김종호 서울출생.TV드라마음악 작곡가, 재야사학자 現 VIVA KOREAN(한민족사이버포럼)의장, 광개토호태왕존숭회공동회장, 단학회 학회장, 21세기프로덕션대표 1983년~2005년(23년간) KBS,MBC TV드라마음악 작곡가 1990년-1995년 남북문화교류사업(통일부승인) 1990년-2009년 민족화합사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