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수단에서 병자들을 고치고 아이들을 가르쳐온 이태석 신부가 14일 48세로 선종(善終)했다. 의대를 나와 사제의 길로 들어선 이 신부는 2001년부터 남부 수단의 외진 톤즈마을에서 섭씨 40도가 넘는 무더위와 싸우며 하루 200~300명의 주민을 진료하고 1700여명의 학생을 가르쳐왔다. 뒤늦게 발견한 암과 싸운 그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더 사랑하셔서 '고통의 특은(特恩)'을 주시는 것"이라며 "하루빨리 톤즈마을로 돌아가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기어이 일어서지 못했다.
톤즈마을 사람들은 20년 넘게 수단 내전에 시달리면서 몸과 영혼이 메마를 대로 메말랐다. 톤즈마을엔 발가락이 없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한센병 환자들, 바싹 마른 엄마 젖을 빨다 지쳐 울어대는 아기들, 학교가 없어 하루종일 빈둥대는 아이들, 한 동이 물을 얻으려고 몇 시간을 걸어야 하는 아낙네들이 살았다. 이 신부가 쏟은 땀으로 10년도 안 돼 이 절망의 황무지에 희망의 푸른 싹이 돋았다. 이 신부가 몸소 벽돌을 나르며 학교와 병원을 지었고 태양열을 전기로 바꿔 위성 TV를 보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곳이 됐다.
로마 교황청에 유학하다 수단에 첫발을 디뎠던 이 신부는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내 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1년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톤즈마을 파견을 자청했다. 어린 시절 슈바이처 전기를 읽고서 의사 신부가 되겠다던 꿈을 펼친 것이다.
세례명 '존'(요한)에서 유래한 애칭, '쫄리' 신부로 불려온 그는 소리 나는 선교보다 소리 없는 봉사에 몸을 바쳤다. 인터넷을 통해 그의 활동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수단에 인술(仁術) 기적을 일으킨 사랑과 희망의 전령사'로 불렸다. 후원자들이 모여 '수단어린이 장학회'를 일으킨 것도 '쫄리' 신부의 교리(敎理)가 아니라 실천 덕분이었다.
우리 해외 선교활동이 종종 무리한 복음주의로 그곳 사람들 마음에 생채기를 만든다는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 길지 않았던 '쫄리' 신부의 삶은 해외 선교와 봉사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본보기가 됐다. "나는 수단에서 매일 희망을 만납니다."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희망을 심을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준 증표였다.
조선일보에서 모셔 왔습니다.
출처 : 사람사는 이야기
글쓴이 : dolshi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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