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으로행복

[스크랩] [SBS스페셜]"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

good해월 2016. 6. 3. 05:05

2009년 3.1절을 기념하여 방송한 sbs스페셜 '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 벌써 방송된지 1년이 넘게 지난 것이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도층으로써 갖추어야 할 가치관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겨 보게하는 영상이라서 올려봅니다. 이 영상을 이명박이나 그의 추종자들이 다시한번 꼭 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시 한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

 

[SBS스페셜]①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우당 이회영 일가

동영상 보러가기     안타깝게도 동영상 어디에서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할수없이 sbs스페셜 원본이 있는 곳으로 링크를 걸어 두었습니다.

13 : 20 초 까지 보시면 됩니다. 끝까지 보셔도 되구요^^ 동영상①을 계속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SBS스페셜]②신흥무관학교, 독립의 역사를 새로 쓰다

 

[SBS스페셜]③실패로 돌아간 비밀 거사, 고종 망명 계획

 

[SBS스페셜]④'독립의 유일한 방안은 오직 무장투쟁뿐'

 

[SBS스페셜]⑤타국에서 최후 맞은 치열했던 투사의 '생'

 

우당이회영.. 당신이 알고 있는 애국의 길은?

 

 

 

[SBS스페셜]①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우당 이회영 일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일제는 고위 지도층을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은사금과 귀족 작위를 제시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준 은사금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거액.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협력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 명문가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 그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 이래 영의정만 9명을 배출한 삼한갑족으로 부친은 이조판서, 당숙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동생 이시영은 평안남도 관찰사와 한성재판소장을 지낸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들은 한일합방이 되자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전 가족이 망명의 길을 떠났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정예의 독립군을 배양하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헤이그 특사 사건, 그 배후는 따로 있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이회영과 동지들은 비밀결사조직 신민회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한다.

이회영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고종에게 제안하고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을 대표로 보낸다. 일제의 감시를 뚫고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아 세계 각국의 대표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일생일대의 거사. 그 배후에 이회영이 있었다. 

 

 

[SBS스페셜]②신흥무관학교, 독립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일제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조선은 일본에 병합된다.

나라의 주권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이회영과 형제들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떠난다. 서간도에 정착한 이회영 일가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0년 동안 3000여 명의 정예 교관들을 양성한다. 이들 졸업생들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국 전역을 누비며 독립전쟁을 수행한다.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마저 바쳤던 이회영. 서간도에서는 지금도 그를 독립운동의 수령이라 부른다.

 

 

[SBS스페셜]③실패로 돌아간 비밀 거사, 고종 망명 계획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뒤 국내로 잠입한 이회영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 거사를 기획한다. 그것은 바로 고종 망명 계획이었다.

한일합방의 최종인가자인 고종 황제를 해외로 빼돌려 합방의 부당성과 강제성을 증명한다면 일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힘과 동시에 독립운동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칠 것이라는 의도였다. 이회영은 고종의 조카딸과 결혼한 아들의 신부례를 빌미삼아 궁궐을 드나들며 고종과 은밀히 내통한다.

고종의 외척 민영달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아 북경에 행궁까지 마련하지만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SBS스페셜]④'독립의 유일한 방안은 오직 무장투쟁뿐'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한창일 때, 이회영은 임시의정원 자리를 박차고 북경으로 돌아온다.

권력의 유혹에 빠지기보다 독립운동의 힘을 규합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민중의 무력에 의한 투쟁만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고, 의열단을 후원하며 일본군 핵심 간부나 식민지 수탈기관 등을 겨냥한 직접투쟁을 독려했다.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과 함께 '북경의 삼걸'로 꼽힌 이회영. 그는 당시 수많은 애국 청년들의 모범이자 사표(師表)였다.

 

 

[SBS스페셜]⑤타국에서 최후 맞은 치열했던 투사의 '생'

 

이회영의 사망에 대한 경위는 그를 구출러 급파된 동지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그 진실이 들어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따리앤수상 경찰서에서 체포된 이회영은 곧바로 뤼순 감옥으로 압송됐다. 뤼순 감옥에 도착한 이회영은 정치범만 들어가는 3층 독방에 수감됐다. 그곳은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생을 마감한 곳이었다.

이회영은 결국 1932년 11월 17일 이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안중근 의사 교수형 당한 그 자리에서 똑같이 처형됐다. 나흘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한 마디도 끝내 발설하지 않은 채 절명하고 말았다.

치열했던 투사의 생은 머나먼 타국에서 최후를 맞았다.

 

 

 

◆우당이회영.. 당신이 알고 있는 애국의 길은?

 

우당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 이래 영의정만 9명을 배출한 집안으로 부친은 이조판서, 당숙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동생 이시영은 평안남도 관찰사와 한성재판소장을 지낸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들은 한일합방 후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전 가족이 망명의 길을 떠났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정예의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조선에서 가져간 전 재산을 쏟아부어 척박한 만주 땅을 개간하고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의열단거사, 조선의용대, 대한광복군 등 끊임없이 이어온 항일전쟁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천여 명의 독립군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우당은 좌우의 이념대립을 거치면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프로그램은 "함께 망명의 길을 걸었던 아내 이은숙의 회고록이 아니었다면 그가 걸어온 독립운동의 발자취는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라며 "한지 200장에 빼곡히 써내려간 아내의 기록에는 100년 전 이 땅의 애국지사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우당선생 연보   우당선생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하였습니다.

 

 

▶ 1867년 4월 21일 (출생)
서울 저동(苧洞)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유승(李裕承)의 4남으로 출생

 

▶ 1896년 (30세)
항일의병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개성 인근 풍덕(豊德)지방에 삼포(蔘圃)농장 경영

 

▶ 1901년 (35세)
일인의 계획적인 삼포농장 훼손사건으로 법정투쟁 승소, 조정으로부터 탁지부(度支部) 판임관(判任官)으로 임명받았으나 사양

 

▶ 1905년 (39세)
국권회복 동지 이상설(李相卨), 아우 이시영(李始榮, 당시 외부 교섭국장)과 을사조약 파기운동 전개하였으나 실패, 나인영(羅寅永), 기산도(奇山度) 등과 을사오적 암살모의 실패

 

▶ 1906년 (40세)
이상설, 여준(呂準), 장유순(張裕淳), 이동녕(李東寧), 유완무(柳完懋) 등과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설치계획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 설립 참여

 

▶ 1907년 (41세)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 지하 상동학원(尙洞學院) 학감(學監)으로 취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대표파견을 고종에게 건의, 백지위임 밀서(대한제국 황제 신임장 및 친서)를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조정구(趙鼎九) 및 내시(內侍) 안호형(安鎬瀅)을 통하여 받아 블라지보스토크에 망명중인 이상설에게 전달,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이 합류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으로 출석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실패, 이상설은 언론에 일본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의 무효성명, 이준 사망한 소식이 전해지자 상동학원을 중심으로 추모하고 이준의 죽음을 할복자결로 공표하여 국민감정을 분기.이를 계기로 상동학원을 거점으로 이동녕,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관직(李觀稙), 김진호(金鎭浩) 등이 발기하여 최초의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인 신민회(新民會) 조직.

 

▶ 1908년 (42세)
블라지보스토크로 이상설을 찾아가 다음단계 독립운동 방약을 논의하여 우선 후진의 실력배양에 힘쓰기로 하고 귀국하자마자 익년 1909년에 걸쳐 전국 각지에 교사파견.( 평양 대성학원에 김사열(金思說), 정주 오산학교에 이강연(李康演), 안동 협동학교에 이관직, 상동학원은 여준을 각각 추천 파견. 
10월18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이은숙(李恩淑)여사와 재혼, 한국 최초의 신식 결혼

 

▶ 1910년 (44세)
7월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과 남만주 시찰후 독립운동기지 건설 구상.
9월 조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서둘러 망명을 결심.
12월 6형제와 가솔 과 노비를 해방하였으나 수행을 자청한  일꾼까지 합하여 40여명을 거느리고 신의주-안동을(安東, 현재의 丹東)을 거쳐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

 

▶ 1911년 (45세)
3월 북경에서 원세개(袁世凱) 총통과 회담하여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독립군 기지를 설치한 후 이동영, 장유순과 함께 각지의 동지를 모아 대회를 열고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후 경상도 유림 대표 안동출신의 이상룡(李相龍)을 초대회장으로 추대

 

▶ 1912년 (46세)
경학사를 기반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설립하여 교주에 이석영(李石榮), 교장에 이철영(李哲榮)으로 학교 경영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계속하여 獨立軍을 양성,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토록 함. (총 배출 인원 3,500명)

 

▶ 1913년 (47세)
독립운동 자금을 추가로 모으기 위하여 일시귀국.

 

▶ 1915년 (49세)
국내활동 중 8월에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연말에 방면

 

▶ 1918년 (52세)
국내동지들과 국권회복 협의. 사돈 조정구(고종의 매부이며 아들 圭鶴의 장인)의 아들 조남익(趙南益)과 내시 이교영(李喬永)과 의논 고종망명계획을 추진. 고종의 지시로 민영달(閔泳達)로부터 5만원을 받아 북경에 고종의 거처를 마련하였으나 고종의 서거로 좌절[고종의 망명계획을 눈치 챈 일제와 친일파들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있음]

 

▶ 1919년 (53세)
고종의 국장을 계기로 대규모 독립선언을 계획하고 거사직전 해외 독립운동세력 결집, 임정수립을 위한 작업차 고종망명계획에 가담한 조정구 및 조남익 부자와 함께 북경으로 망명.
4월 이동녕 아우 이시영과 함께 상해로 이동하여 임정수립에 참여. 임정내분에 실망하여 다시 북경으로 복귀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위하여 고민.

 

▶ 1922년 (56세)
북경에서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 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러시아의 맹인 시인이고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에로셍코(Yakovlevich Eroshenko)가 북경에 온 것을 틈타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벌어진 공산주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행동하는 자유주의』아나키스트 운동을 개시했다. 여기에 신채호(申采浩), 김창숙(金昌淑)도 참여하였고 북경대학의 로신(魯迅, 본명 周樹人), 대만 출신 범본량(范本粱)과의 연대도 이루어졌다.  
우당은 공산주의 혁명후 러시아의 상황을 보고 돌아온 조소앙(趙素昻)으로부터 공산정권의 실상을 듣고 “그들이 말하는 평등사상이란 하루 밥 세끼를 주는 감옥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말했으며 자유 없는 평등의 공산주의 사회 실상을 일찍이 예견했다.   

 

▶ 1923년 (57세)
아나키스트 운동의 표본으로 중국 호남성(湖南省) 한수현(漢水縣) 양도촌(洋濤村)에 이상마을 건립을 위해 중국인 진위기(陳偉器)와 이을규, 이정규와 함께 설립 추진

 

▶ 1924년 (58세)
김창숙, 신채호, 유자명 김원봉(金元鳳)과 적극적 항일운동을 위하여 행동조직인 의열단(義烈團)조직을 후원하는 한편,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鄭華岩, 본명 鄭賢燮), 백정기(白貞基) 등과 아나키스트의 운동의 중심이 될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결성하고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한다. 우당은 중국에서의 무장투쟁의 주도권이 점차 공산주의자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모아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한다. 

 

▶ 1925년 (59세)
우당의 조카 이규준(李圭駿)과 아들 이규학, 이성춘(李性春 등 신흥학우단(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중심이 된 행동조직인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한다., 이 조직이 북경 중국유림(儒林)에 침투한 일본 고등밀정 김달하(金達河)와 그에게 포섭하여 전향한 독립운동 거두 박용만(朴容萬)을 암살하여 위난을 겪음.

 

▶ 1927년 (61세)
중국 후젠성(福建省) 천주(泉州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는 농민자위군운동에 참여하여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동지들과 중국측 이석증(李石曾), 오치휘(吳稚暉), 채원배(蔡元培) 등과 상해노동대학 설립을 적극 추진.

 

▶ 1928년 (62세)
7월 상해에서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일본, 안남(베트남)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주최하는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 운동’이라는 제하의 글을 보내어 이 논문의 취지가 동 대회 결의안에 채택되었다. 8월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탈환(奪還)』에 축시를 기고했다. 또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발간하는 『동방(東方)』창간호에 묵란(墨蘭)을 한 폭 그려 보냈다. 

 

▶ 1929년 (63세)
아나키스트 동지인 이을규, 정화암, 백정기, 김종진(金宗鎭), 오면직(吳冕稙 중국명 楊汝舟),  이달(李達), 엄순봉(嚴舜奉, 본명 嚴亨淳) 등을 북만에 파견하여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비밀리에 결성하는 한편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추진하는 『재만한족연합회(在滿韓族聯合會)』조직에 대거 가담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건설 시도.

 

▶ 1931년 (65세)
만보산(萬寶山)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독립운동이 심대한 타격을 받고 상해로 철수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남화한인연맹(南華韓人總聯盟)』[강령 규약 등 별항참조]을 결성하고 의장으로 추대됐으나 고사하고 연부역강한 유자명을 회장을 선임. 기관지로 남화통신(南華通訊)을 발간했다.
9월 우당은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金性壽) 중국인 왕아초(王亞樵), 화균실(華均實), 일본 아나키스트 전화민(田華民, 일본명 佐野), 오수민(吳秀民, 일본명 伊藤) 7인이 상해에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 부서를 두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였다.
이 공포단의 천리방, 백정기,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유기문(柳基文) 등은 중국국민당의 친일 그룹인 왕정위(汪精衛)를 암살하고자 했다가 그의 부관을 사살했으며 아모이(厦門) 일본영사관을 폭파했다.

 

▶ 1932년 (66세)
1월 흑색공포단은 천진부두에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했고, 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그 일부를 파괴했다.  
9월 중국 국민당 요인 李石曾, 吳稚暉, 호한민(胡漢民)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점 확보와 동시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武藤)대장을 암살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코자( 윤봉길 의사의 상해 히라가와(白川)대장 폭사와 같은 의거) 북행을 결심.

 

▶ 1932년 11월 17일 (순군)
우당은 침체된 무장독립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만주에 항일의용군의 결성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비밀리 동지들과 수립한 후 대련(大連)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상해 밀정에게 정보가 누설되어 대련에 도착하자마자 일경과 중국수상서원에게 검거되어 모진 고문 끝에 순국

 

출처 : 우당기념관/우당연보

출처 : ☆Dream
글쓴이 : Drea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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