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가을 종부기들이 백악관 앞에 와서 시위하였을 때, 그리고 여중생들을 광화문 광장에 잔뜩 동원하고 촛불시위하였을 때 그 슬로건은 미군 장갑차 운전병 마크 병장을 사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 나는 이 사건이 6.25 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당한 윤화사고와 공통점이 있으면서 정반대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약 워커 장군이 자기 부하들을 희생하면서 영동전선과 낙동강전선을 사수하지 않았더라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대한민국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두 여중생 윤화사고 지점과 지형이 비슷한 인근 도로에서 워커 중장이 한국인 운전병의 실수로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사진에서 1950년 12월 23일 오전 사고 직후의 현장 사진이 보인다. 장군 아들도 한국전 참전을 위해 지원하여 전방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그 부대 장병들을 위문하러 가던 길에 발생한 사고로서 나는 그 사고 경위를
http://mission-theology.org/essay/general-walker.htm 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날이 12월 23일이었다. 유엔 지상군 사령관의 전방 행차였으면 당연히 호송 차량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워커 중장은 찝차 운전병만 데리고 전선의 수여식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52년 후 두 여중생 윤화사고가 발생한 그 좁은 도로에서 서행하는 한국 군용트럭 대열이 장군의 찝차를 가로막자 장군은 운전병에게 트럭을 추월하라고 명령했다.
운전병이 차를 왼쪽으로 빼자 한국군 트럭 하나가 찝차를 향해 질주해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찝차가 도로 밖으로 급선회하여 논두렁에 추락하면서 워어커 장군은 즉사했으니 그의 향년 61세였다."
이때 한국 정부 입장은 당연히 그 국군 운전병을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오히려 워커 장군 유족과 미군 측에서 그 사고는 한국인 운전병의 고의적 사고가 아니라,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인 점을 참작하여 선처해 줄 것을 호소하며 구명 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그 점이 같은 불가항력의 사건을 가지고 미국 정부에 마크 병장을 사형시키라며 스스로 재판장 행세를 하던 종부기들과 완전 대조적이었다.
* 워커 중장의 사진 등 추가 사진들은http://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 에서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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