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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가 늙은 부모님을 산에 버렸다고?

good해월 2017. 2. 23. 10:40


우리가 늙은 부모님을 산에 버렸다고?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
우리가 어릴 때 만화에서도 보고 책에서도 읽었던 그 풍습, 사실이 아니었다. 

고려에 '고려장(高麗葬)'은 없었다  


영화 '고려장' 스틸컷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속의 구덩이에 버려두었다가 죽은 뒤에 장례를 지냈다는 풍습으로, 오늘날에도 늙고 쇠약한 부모를 낯선 곳에 유기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고려(高麗)라는 명칭 때문에 우리나라 고려 시대에 있었던 장례 풍습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나 고고학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풍습과 관련된 설화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나타난다.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마치 이러한 풍습이 실재했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고려장이라는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한,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20세기 초까지 노부모를 유기하는 장례풍습보다는 연고를 확인할 수 없는 '고분(古墳)'을 이르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고려총(高麗塚)ㆍ고려산(高麗山)ㆍ고려곡(高麗谷)ㆍ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11일자에는 "근일에 일인들이 고려장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1916∼17년에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조사한 '고적대장(古蹟臺帳)'에도 고려장은 고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학계 다수설은 고려장은 실재하지 않았던 풍습이라는 것"
[일사일언] '고려장'은 거짓이지만…

일본이 날조한 역사?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노부모를 산에 버리는 장례 풍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 처음 확인되는 기록은 미국의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가 일본에 머무르며 1882년에 발간한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그리피스는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 노인을 산 채로 묻어 버리는 고려장과 산신이나 해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제(人祭)가 성행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그리피스는 역사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자로 일본 정부의 초빙으로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전신인 도쿄가이세이학교(東京開成學校)에서 강의했으며, 일본이 주체가 되어 조선에서 미신과 전제왕권을 몰아내고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자료들에만 의존해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했는데, 한국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일부 설화의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왜곡하여 서술했다.

"출처도 없고 조선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외국인이 쓴 책에
등장하는 고려장 이야기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 한국 학자들의 주장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기로(棄老)설화*들이 각종 설화집과 동화책 등에서 소개되면서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1919년 미와 다마키(三輪環)가 펴낸 '전설의 조선'과 1924년과 1926년 조선총독부와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펴낸 '조선동화집' 등에서 이 설화들이 수록되었다. (두 권의 책에 실린 이야기는 중국 '효자전'에 실린 원곡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즉, 중국의 전설을 우리나라 것인 양 둔갑시킨 일본에 의해 각인된 것이 고려장이라는 이야기다.) 이후 1948에 발간된 이병도의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 1963년에 발표된 김기영의 '고려장'이라는 영화 등을 통해 그러한 인식이 더욱 확산됐다.

'전설의 조선'(왼쪽), '조선동화집' /방송 캡처
* 기로 설화: 아들이 늙은 아버지를 버리기 위해 산중으로 들어가, 지고 온 지게를 놓고 돌아가려 하자 그들을 뒤따랐던 아들의 아들이 아버지를 버릴 때 써야한다며 지게를 도로 가져가려 한다. 그 말에 크게 뉘우친 아들이 아버지를 다시 집에 모시고 가 봉양했다는 이야기.

* 원곡 이야기: 원곡의 아버지가 연로한 원곡의 할아버지를 수레에 싣고 버리려 하자, 원곡이 아버지를 버릴 때 쓰겠다며 수레를 가지고 간다고 하는 것을 보고 다시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

▼ 서프라이즈 '고려장은 없었다'

"우리나라의 무덤을 도굴하기 위한 일본의 꼼수"
- 최인학 인하대 교수

일본이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떨어뜨리고 열등감을 주기 위해 고려장이란 악습이 있었다고 퍼뜨렸다는 의견이 많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고려장을 이용했을까? 우리나라 문화재를 강탈하기 위해 어떤 행위로 서슴지 않았던 일본은 우리의 순장 풍습을 알고 있었고, 무덤 속 물건들을 강탈하기 위해 고려장을 이용했다고 한다. 유교 문화가 강했던 우리나라에서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은 고려장이라는 저급한 문화가 있었고, 이 무덤은 고려장을 통해 만들어진 무덤이기 때문에 파헤쳐도 된다'는 식의 꼼수로 도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고려는 오히려 효(孝)의 나라"
- 설민석 강사

한국사 강의를 하는 설민석 강사도 한 TV프로그램에서 '고려장'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는 "고려는 부모를 갖다 버리지 않고 오히려 효의 나라였다. 고려의 법률을 보면 최고의 형벌이 반역죄와 불효죄였을 정도"라며 "70세 이상 노부모를 봉양할 가족이 없는 경우 형벌을 보류한다. 또한 귀양 중 부모상을 당하면 휴가도 줬다"고 말했다. 설민석은 "늙은 부모를 지게에 지고 갖다버리는 걸로 알려진 고려장, 하지만 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왜곡된 역사"라고 덧붙였다.


고려는 어떤 나라일까?

'태조 왕건' 등의 사극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긴 하지만, '고려가 어떤 나라였지?' 생각하면 거의 '왕건'만 떠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고려(918∼1392)는 왕건이 신라말에 세운 왕조로 918년에 건국되었고, 34대 공양왕까지 475년간 존속했다. 왕건은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개경(현 황해도 개성시)을 수도로 삼았으며, 936년 후삼국 시대를 형성하고 있던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통일했다. 왕권보다 지방 토호 세력이 강력했지만 4대 광종에 이르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과 교류하였고 멀리 아라비아와 페르시아까지 무역을 했다.

고려시대 개경의 거리 그림 /한국생활사박물관

11세기에는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년)으로 이를 물리쳤고, 대각국사 의천을 통해 불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불교의 가장 전성기를 맞이했다. 12세기에 들어 권력투쟁과 내분이 격화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왕권이 약화하면서 무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피폐화되었고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31대 공민왕이 즉위하여 왕권을 다시 세우고 국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그의 정책이 실패로 끝나고 왕권이 무너지고 민심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갔다. 이에 무신이었던 이성계와 그의 책사였던 정도전 등이 주도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1392년에 멸망했다.

* 노비안검법: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처한 법.

고려의 장례문화
불교의 영향이 강했던 고려 시대의 장례는 매장(埋葬)과 화장(火葬)이 주를 이뤘다. 시신을 태운 후, 그 유골을 사찰에 보관하는 화장이 대부분이었고, 왕들은 주로 화장하지 않고 무덤을 만들어 묻는 매장을 했다. 관리의 무덤은 생전의 관직에 따라 무덤의 크기와 높이가 각각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크게 만들 수 없었다. 고위층들은 순장(殉葬)이라 하여 귀중품과 생활용품 등을 함께 묻기도 했다. 일부 하위계층은 풍장(風葬)이라 하여 시체를 바람에 의해 자연 부패 되도록 산속 등에 버리기도 했다. (풍장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고려장의 증거라고는 볼 수 없다.)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에 있는 고려 말의 관리 박익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로 고려 시대 여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오른쪽) 고려의 왕이나 귀족들은 대개 화장을 하지 않고 무덤을 만들어 묻었다. 사진은 충청남도 서천에 있는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리였던 목은 이색의 무덤이다. /조선 DB
고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 역사 속의 풍습인 것처럼 인식되며, 아이러니하게 효(孝)에 대한 교훈까지 이끌어내고 있었던 고려장 이야기를 무조건 일제의 소행 탓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역사적 사실이 아닌 고려장 이야기가 어린이 만화와 동화, 교과서에까지 정확하지 않은 내용으로 알려진 것은 바로 잡아야 하며, 일본에 의해 날조된 역사라면 더더욱 적극적인 연구와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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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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