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슬프고도 무서웠다. 자신도 언젠가는 형택이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꼬박꼬박
동치미국물을 머리맡에 떠다놓았다.
"자다가 속이 메슥거리거나 어지러우면 문부터 열고 이걸 마셔라" 동치미
국물을 떠다놓을 때마다 손자들에게 당부하고는 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일가족을 하룻밤 사이에 죽일 만큼 무서운 연탄가스가 그깟 동치미 국물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지 않았다.
나무를 때던 시절,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새어 올라오고는 하던 방이었다.
그러니 연탄을 때는 지금 형태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연탄가스는 얼마나
많이 새어들어 올까.
그리 생각해서인지 아침에 일어날 때면 머리가 무거웠다. 나무 때던 시절이
그리웠다. 지게 지고 나무를 하러갈 때마다 그렇게 지겨웠는데….
1960년대를 정점으로 연탄의 급격한 보급확대는 일종의 생활혁명이었다.
베어내고 긁어내어 늙은 짐승의 등처럼 헐벗은 산들은 갈수록 땔감을 공급
하는데 인색해졌다.
나라에서는 홍수방지 같은 명분을 내세워 나무 채취를 엄격하게 금했다.
그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이 연탄이었다. 연탄은 하루 종일 방을 따뜻하게
해줬고 언제나 밥과 국을 끓일 수 있는 매력적인 연료였다.
도시는 물론, 농어촌에서도 앞다퉈 연탄화덕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연탄은 화력도 좋고 값도 비교적 싼 편이었다. 그래도 서민들에게 연탄
값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나누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부잣집들은 온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 창고에 쌓아놓고 땔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한 두 장씩 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저녁 무렵 새끼줄에 연탄 한 두 장을 꿰어들고 골목길을 올라가는
가장의 등 굽은 뒷모습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 서민들의
꿈은, 독에 쌀을 가득 채우고 광에 연탄을 높다랗게 쌓아보는 것이었다.
연탄은 생활을 편리하게 해줬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제대로만 갈아주면
몇 년이라도 꺼질 리 없는 게 연탄이었지만, 새벽에 깜박 시간을 놓치면
그대로꺼져버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집에서는 갈아줄 연탄이 없어서 가장이 사들고
올 때까지 눈물을 머금고 꺼트리기도 했다. 한번 달궈지면 밤새 따뜻하던
구들장과 달리 얇디얇은 시멘트 방바닥은 금세 식어버렸다.
새벽녘 연탄불이 꺼진 뒤, 아이들은 바들바들 떨고 가게문은 안 열리고,
주부들의 가슴은 연탄처럼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
부리나케 달려가서 번개탄(착화탄)을 사다가 불을 붙였다. 번개탄이 나
오기 전에는 숯불을 피워 살리거나 옆집으로 밑불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추울 때는 무턱대고 불문(공기구멍)을 열어놓았다가 비닐장판을 새까맣게 태우고,
연탄은 후르르 타버려 불이 꺼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연탄을 갈 때 가장 곤혹스러
운 건 불붙은 연탄이 서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였다.
타버린 맨 아래 연탄을 떼어내야 위의 연탄을 아래에 넣고 새 연탄을 올리게 되는데
이게 서로 붙어버리면 난감했다. 성급하게 두드리다가 위 연탄까지 깨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때는 녹슨 식칼로 떼어내기도 하고 삽 같은 도구를 동원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연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대한제국 시절 일본인에 의해서라고 한다. 1960년대는
연탄산업의 전성기였다. 63년 말 국내의 연탄공장은 40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영원히
서민들의 곁을 지킬 것 같았던 연탄도 세월의 창날을 비껴 가지는 못했다.
기름보일러가 보급되고
도시가스 같은 청정연료를 쓰게되면서 석탄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90년대 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석탄산 업은 본격적인 정리단계에 접어들었다.
탄광은 대부분
폐쇄되고 한 때 시커먼 모습으로 도시에 자리잡고 있던 연탄 공장들도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문을 닫았다.
달동네에 공급되거나
비닐온실 난방용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연탄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이상현 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연탄소비가 다시 늘고 있다는 것이다. 기름 보일러를
연탄 보일러로 다시 바꾸는 집도 늘고 있다.
연탄 값도 꽤
올랐다고 한다. 때마침 불어온
복고바람 덕인지 거리에서 연탄구이집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면 연탄의
시대는 막을 내렸을지 몰라도 연탄으로 상징되던 고난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찬바람이
기웃거리는 어느 골목길에는 내 가난한 어머니와 내 아픈 형제들이 터져나오는 기침을
깨물며 하얗게 바랜 서러움을 연탄재처럼 쌓아가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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