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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양보호사 시절의 에피소드/한성덕

good해월 2018. 12. 7. 09:43

요양보호사 시절의 에피소드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성덕


 


 


 


 


 


  지난 8월부터 요양원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다가 11월 말로 사직했다. 원장인 친구도, 함께 일했던 요양보호사나 직원들도, 여러 어르신들도 꽤 아쉬워하며 또 오라고 했다.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어우렁더우렁 잘 어울리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던가 보다.  


 사실, 목사의 신분을 벗어놓고 일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통상적으로 ‘목사’하면, 엄숙한 표정에 진지한 태도, 권위에 찬 모습에 근엄한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가슴에 올라붙은 성경, 느릿한 걸음, 단정한 양복차림에 까만 가방을 연상하지만 나는 고루하다는 생각이었다.  


  원래 ‘티’내는 게 싫어서 자유로운 편이지만, 요양보호사가 되면서부터 그 남아있는 ‘티’마저 다 내려놓았다. 한마디로 무장해제(?)를 한 것이. 환하게 웃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취한 행동인데, 4개월 내내 코미디언 아닌 코미디언으로 살았다. 성격상 꼼꼼해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까지는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나 일단 결정하면 몸 사리지 않고 충실히 한다.


  요양보호사 일 외에도 짬짬이 밖엣 일을 하고,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건물 앞마당은 거부의 저택만큼이나 드넓은 땅이 있어 넉넉해 보였다. 갖가지 나무들은 겨울채비를 마치고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톱과 크고 작은 전정가위로 나무를 다듬었더니 여기저기서 인사를 했다. 아프긴 했어도 ‘시원하고 좋다’며, ‘더 예쁘고 아름답게 잘 자라겠다.’고 말이다. 내가 떠나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질병에 시달리지 말고, 멋진 모습으로 잘 자랄 것’을 당부했다. 나무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순간이었다. 몇 그루는 쓰다듬어주면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안쪽상황은 밖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와상(臥床)환자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불렀다. 그 짧은 시간인데도 별별 생각을 다하며 달려간다. 어르신은 살포시 미소를 머금고, ‘손녀들 학교 보냈냐? 누룽지는 잘 끓였냐? 영감은 어디 갔냐?’ 등을 물었다. 처음엔 맥이 빠졌으나 나중엔 그러려니 했다.


  잔소리가 심한 70대 남성어르신이 있다. 90도로 굽은 허리지만 생활엔 불편이 없다. 약간의 화만 치밀어도 사나운 본성이 발동한다. 충혈된 눈동자, 인상 쓰며 치켜뜬 눈, 올라붙은 눈 꼬리는 살모사처럼 느껴져 오싹할 때가 있다. 발을 동동거리고, 손가락으로 허공을 콩콩 찍으며 소리를 지른다. 말도 안 되는 언어로, 데데 데 데를 연거푸 하시며 급히 쏟아내는 말이어서 절반가량은 알아듣기 힘들다. ‘성격’이라기보다 괴팍한 ‘성질’이라는 말이 옳다.


  목욕은, 여성이 여성을 남성이 남성을 시킨다. 그런데 잔소리하는 어르신은 말이 너무 심해 딱 질색이다. 그 핵심은 ‘여자가 아닌 남자가 목욕을 시킨다.’며 생떼를 부린다. 그렇게도 여성요양보호사를 선호할까?


 


  그 어르신에게 이런 일도 있었다. 지적장애로 다리도 불편해서 종종종 걷는 60대 초반의 남성이 있다. 밤에 잠도 안자고 돌아다니며 얼마나 괴롭히는지 ‘짐승’이라고 윽박지른다. 발로 차고 주먹질을 하며 손바닥으로 뺨을 갈기기도 한다. 상대는 저항할 힘이 없어 무참히 당한다. 말려도 그때뿐이다.

  출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어르신의 오른쪽 발이 퉁퉁 붓고 절뚝거렸다. 웬일인가 물었더니, 그 장애인을 발로 찬다는 것이 침상을 차버렸다는 게 아닌가?

 “아이, 고소해라. 잘하셨네. 아유, 시원해!”

약을 바짝바짝 올렸다. 그리고 이 때다 싶어서 ‘약한 자를 발로 차니까 벌을 받았다’며, 이제 주먹질을 하면‘팔이 부러진다.’는 겁박과 함께,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배려해야 사랑받는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잘못한 걸 ‘후회하고 회개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조용한 말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맹세까지 하시는데, 그때는 또 한없이 겸손해 보였다. 그 뒤로는 아주 조용한 어르신이 되었다.

 사람 사는 것이 생각대로 되는 것도,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느 누가 살다가 요양 받을 일이 없다고 장담하겠는가? 그 가능성을 생각하며 어르신들을 섬겼다. 내 생애에서 잠깐이나마 부모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봉사한 것에 감사했다. 나 스스로도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르신들을 이해하고, 보살피며, 동거한 사실에 고무돼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요양원에 가서, 아내는 노래로 나는 코미디(?)로 어르신들을 섬길 생각이다. 함께 노래하고 즐기며 웃음을 선사했던 넉 달이, 내 인생에서 참으로 가치 있고, 보람되며소중한 삶이었다.  

                                         (2018. 12. 4.)


출처 : 김학-두루미 사랑방
글쓴이 : 두루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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