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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복(祈福)과 작복(作福).

good해월 2019. 1. 20. 08:11



★ 기복(祈福)과 작복(作福). ★











2019년은 일명 ‘황금돼지해’이다.
내 기억으로는 2007년에도 ‘황금돼지해’라고
언론에서 떠들썩했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당시는 정해년(丁亥年)으로 붉은색을 나타내는 천간으로
정확히 말하면 ‘붉은 돼지해’라고 해야 맞다.
반면에 2019년은 기해(己亥)년으로
육십 간지 중 36번째의 해로,
‘기(己)는 노란색을 말하므로 ’노란 돼지해’
즉 노란 것은 누를 황(黃) 즉 황색을 의미하므로
‘황금 돼지해’라고 말한다.

또 '황금 돼지해'는 '붉은 돼지해'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에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더해 따지기 때문에
600년 만에 한 번꼴로 나타난다는 것이 역술가들의 주장이다.

이 황금돼지는 광명의 길운을 타고나기 때문에
황금 돼지띠 아이는 매우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운명은
이러한 태어난 간지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새해가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혹은 ‘부자 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난 의식적으로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며 인사를 한다.

그럼 ‘받는 복’과 ‘짓는 복’의 차이는 무엇이고,
어떤 복이 더 크고 참된 복일까?
혹자들은 이 차이를 남에게 주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고
받는 것에 익숙한 한국식 망국적인 인사 방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몰라서 한 말이다.

‘복 많이 받으세요’는 기독교적인 기복(祈福)의 의미
즉 기독교에서는 늘 깨어있으라고 가르친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라는 것은
깨어 있고자 노력하라는 의미로
유일신 신앙이므로 구원의 근원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복 많이 지으세요’는 말은
불교적 용어로 작복(作福)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즉 자신을 마음을 갈고 닦아 윤희의 고리에서 벗어나
열반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려 애쓰는 것일 뿐
부처를 신으로 믿는 것을 아니다.

물론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새해 복을 많이 지으라고 인사를 나누었다고 고문에도 나와 있다.
불교에서 구체적인 복을 짓는 것에 대한 여섯 가지는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의 제도와 상하가 따로 없는
올바른 도(道)를 구(求)한 것을 말한다.

작복(作福)의 더 정확한 어원을 살펴보면,
불교 경전 중의 역품(力品)에 나오는 '복 짓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가 기원정사에서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제자 ‘아니룻다’도 같이 있었는데,
아니롯다가 설법 도중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처님은 설법이 끝난 뒤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하였다.

"아니룻다,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곧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제부터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타일렀다.

"아니룻다,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의 타이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이 날로 심해진 것을 보시고
부처님은 의사 지바카에게 아니룻다를 치료해 주도록 당부했다.
아니룻다의 증상을 살펴본 지바카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니룻다께서 잠을 좀 자면서 눈을 쉰다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다만,
통 눈을 붙이려고 하지 않으니 큰일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아니룻다를 불러 말했다.

"아니룻다, 너는 잠을 좀 자거라.
중생의 육신은 먹지 않으면 죽는 법이다.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 것이다.
귀는 소리로 먹이를 삼고, 코는 냄새로, 혀는 맛으로,
몸은 감촉으로, 생각은 현상으로 먹이를 삼는다.
그리고 여래는 열반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먹이로 삼습니까?"
"열반은 게으르지 않은 것으로 먹이를 삼는다."
아니룻다는 끝내 고집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차마 잘 수 없습니다."

아니룻다의 눈은 마침내 앞을 볼 수 없이 되었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육안을 잃어버린 아니룻다의 일상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어느 날 해진 옷을 깁기 위해 바늘귀를 꿰려 하였으나 꿸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말로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바늘귀를 좀 궤 주었으면 좋겠네."라고 하였다.

이때 누군가 그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받아
해진 옷을 기워 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스승인 부처인 것을 알고 아니룻다는 깜짝 놀랐다.
"아니,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또 무슨 복을 지을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룻다,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법이란,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 제도와
위 아래가 없는 바른 도를 구함이다."

아니룻다는 말했다.
"여래의 몸은 진실로 법의 몸인데 다시 더 무슨 법을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셨는데
더 지어야 할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 아니룻다, 네 말과 같다.
중생들이 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을 참으로 안다면
결코 삼악도(三惡道)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이렇듯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은 어원의 차이일 뿐
그중 어느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또 어느 복이 큰 것인지 아니면 작은 것인지의 문제는 아니다.

또 혼자 복은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혼자 가질 수 없고 함께 공유해야 하는 것들이 어디 복뿐일까?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말, 시집 속의 시어(詩語),
거리를 걷다가 어디선가 들리는 음악 소리,
밤하늘을 채우는 둥근 달, 비와 바람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을과 아침 태양, 바다와 강, 가을을 재촉하는 풀벌레 소리,
파도에 휩쓸리는 몽돌 부딪히는 소리, 서걱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
얼음장 밑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 길을 걷다가 빵집 앞의 빵 냄새 등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닌
당신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어 세상은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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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우곡 김덕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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