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줄서 커피 한잔.. 가치 있는 경험인가,
특유의 쏠림인가
안영 기자
새 브랜드에 열광 줄서기의 심리학
"이쪽, 저쪽!"
목이 콱 잠긴 직원이 수신호를 섞어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안내했다. 오전 8시부터 5시간 가까이 긴 줄을 통제하느라 목이 쉬었다고 했다. 줄 서 있는 사람들 뒤로 하늘색 병 모양 로고가 박힌 입간판이 보인다. 기온 25도, 초미세 먼지 지수 77(매우 나쁨).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시감이 든다. 2016년 7월 서울 강남대로에 미국 프리미엄 버거 브랜드 '쉐이크쉑' 1호점이 개점했을 때 문 열기 전부터 1000여명이 몰려 한여름 무더위에 장사진을 이뤘다. 2년 전엔 '평창올림픽 롱패딩'을 사기 위해 '줄 서기 대란'이 일어났다. 지난 2015년 명동 H&M 매장 앞엔 발망과 협업한 한정판 제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침낭을 챙겨들고 밤샘 노숙을 했다.
인간은 줄을 서는 유일한 동물이다. "줄 서기는 자기 순서를 알고 기다리는 것, 즉 사회 계약을 이해하고 준수한다는 전제가 깔린 행위다. 개미 등 동물이 줄지어 가는 것은 줄을 따라가는 것이지 사람이 줄을 서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생태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말처럼 인간의 줄 서기는 개인의 판단, 의지, 질서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행위다. 이 줄 서기가 한국에서 일상다반사가 됐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국내 상륙 1호점, 맛집 프로그램 출연 식당엔 이제 긴 대기 줄이 디폴트(기본 설정)처럼 됐다. 줄 설 일도 많아졌고,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인스타그램·유튜브 인증, 줄 서기도 놀이로
"'브이로그('비디오'와 '블로그'의 합성어. 자신의 일상을 촬영한 짧은 영상 콘텐츠)' 찍어 제 유튜브 채널에 올리려고요. '커피계의 애플'이라는데 친구들에게 얼리어답터 인증도 하고요(웃음)." 블루보틀 1호점 앞에 줄 서 있던 이보라(24)씨가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가족, 친구들한테 '원두 셔틀(사다 주는 것)' '텀블러 셔틀' 해주려고요. 2~3시간 고생해서 기다린 만큼 '인증샷'은 꼭 남길 거예요." 같은 줄에서 대기 중이던 김지연(가명·28)씨가 웃었다.
인증이 줄 서기를 부른다. 줄을 서서 획득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대기 줄 자체도 인증용 피사체다. 이런 현상을 확산한 결정적인 지렛대는 인스타그램. 개점 일주일을 맞은 9일 현재 '#블루보틀'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총 15만5000여개, '#블루보틀코리아' '#블루보틀성수'라는 해시태그의 게시물은 각 2900여개였다. 여기에 최근 1~2년 사이 유튜브가 강세를 보이면서 줄 서기가 영상 콘텐츠로도 활용된다. 줄 서기 자체가 '놀이'이자 '콘텐츠'가 된 셈이다.
이번 블루보틀 줄 서기가 3년 전 쉐이크쉑 상륙 때와 닮은꼴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이 부분. 쉐이크쉑 국내 파트너사인 SPC 그룹 김현호 홍보과장은 "개점 후 100여일까지 평균 300~350명이 줄을 섰다"며 "3년 차이지만 당시엔 인스타그램은 지금처럼 확산되지 않아 '페이스북'에 인증샷 올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인증도 좋지만 커피 한 잔 마시려 5시간 줄 서고, 냉면 한 그릇 먹으러 두세 시간 줄 서는 데 곱지 않은 시선도 따른다. 인터넷엔 "과시를 위한 가짜 행복 경쟁" "허영·허세의 방증"이라는 비판도 많다.
이런 시각에 반기 드는 이들도 있다. 개인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라는 것. 남편, 7세 아들과 함께 블루보틀을 찾은 김세란(38)씨는 "가족과 함께 송파구에 개장한 '서울책보고'와 블루보틀 1호점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여기로 와 줄 서기를 선택했다"며 "유명한 커피 브랜드를 개점하자마자 향유하는 것도 가치 있는 경험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전해연(29)씨는 "놀이동산은 몇 시간씩 줄 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왜 식당에서 줄 서는 건 '조선인 종특(종족 특성)'이라면서 비하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시간을 들여 즐기고 기념사진을 찍는다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니냐"고 했다. 매장 앞에서 사진을 찍던 강모(21)씨도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내겐 어느 것보다 즐거운 '소확행(소소하나 확실한 행복)'"이라며 "타인의 취향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그때도 서고 지금도 선다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해 줄 서는 건 시대 불문. 흑백 사진 한 장이 눈길 끈다. 서울 중구 명동 '줄줄이 부페' 앞. 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나다니는 좁은 골목길 한쪽으로 이웃 맥줏집, 분식집, 주차장, 구두점 앞까지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입장료 1000원에 20가지 음식을 마음껏 드세요'라고 적힌 푯말이 인파가 몰린 이유를 설명한다. 1987년 7월 17일에 찍힌 본지 자료 사진. 거리 풍경과 옷차림은 다르지만 인기 식당 앞 긴 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해외 프랜차이즈 1호점 줄 서기의 원조 격은 1988년 서울 압구정동에 맥도날드 1호점이 문 열었을 때다. '새로 들어온 외국의 맛'을 맛보려는 이들이 매장 앞에 길게 줄 섰다. 1994년 서울 광화문에 생긴 이탈리안 스파게티 음식점 '뽐모도로' 역시 점심때마다 줄을 서는 직장인들로 붐비며 화제가 됐다. 언론들은 "양식에 익숙한 젊은 층과 해외 경험자가 늘면서 생긴 새로운 유행"이라고 보도하며 당시 풍속도를 전했다.
2000년대 후반부턴 줄 서는 대상이 '음식'에서 '물건'으로 퍼졌다. 2008년 새로 출시된 '아이폰 3G'를 사기 위해 전날 자정부터 애플 스토어 앞에 노숙을 불사하는 '캠핑족'이 등장했는가 하면, 2013년 마이클 조던 농구화('에어조던11')를 사려고 나이키 매장 앞에 새벽부터 쭈그리고 앉아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2015년부터는 신제품 유행이 예고될 때마다 시급 1만~1만2000원짜리 '줄 서기 알바' 시장까지 등장했다.
줄이 줄을 부른다
줄에는 시대상이 반영된다. 박은아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비의 성격이 '필요'에서 '가치 경험'으로 바뀌고 있다"며 "줄을 서는 행위로 사람들이 희소성에 대한 열광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줄 자체가 마케팅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구민정 성균관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줄 서기에는 타인의 존재로부터 제품의 가치를 유추하는 인간의 특성이 반영돼 있다"며 "줄의 길이, 즉 대기하는 사람의 수가 은연중에 사람들 머릿속에서 해당 상품이 지닌 가치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구 교수는 "나를 기준으로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들일 '노력',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성취'에 해당한다"며 "뒤에 서 있는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성취감이 구매를 기다리는 제품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의 쏠림? 아시아적 현상?
줄 서기엔 뜨겁게 열광하고 한쪽으로 기우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 반영됐다는 분석도 있다. 황의건 HB엔터테인먼트 상무는 "줄 서기는 다수가 하나의 브랜드에 열광해 쏠림 현상이 일어난 결과로, 일종의 '집단적 리추얼(ritual·의식)'"이라며 "비슷한 카테고리에서 선택이 다양하다면 특정 매장 줄 서기는 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는 "줄 서서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얼마나 젊은 세대에서 열광할 문화가 없으면 저기에 미쳐야 하나 싶기도 하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층에서 세계적 인기를 끄는 새 문화를 먼저 향유하고 소셜미디어로 경쟁적으로 공유하는 게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으면서 줄 서기가 문화 현상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이런 경향이 심한 건 사실"이라며 "새로운 게 나오면 빨리 적응하고 받아들여서 우리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종의 '발전국가 멘털리티(정신)'"라고 말했다.
구민정 교수는 "심리학적으로 줄 서기는 '사회적 비교'와 '사회적 인증'으로 연결된다"며 "비교 우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분위기가 강한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서구권에선 '독립적 자아(independent self)'가 강조되는 반면 아시아에선 '상호의존적 자아(interdependent self)'가 강한 편"이라며 "후자의 경우 타인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심리가 강해 경쟁적 줄 서기도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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