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열 선수가 팔씨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jobsN
-팔씨름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살 때 다니던 피트니스 클럽에서 어느 날 팔씨름 정모(정기모임)가 열렸다. 한국 최초의 팔씨름 동호회인 ‘팔씨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곳에 속한 사람들이 모여 팔씨름 시합을 했다. 원래 웨이트 트레이닝도 즐겨 했고, 팔씨름도 잘했다. 팔씨름은 중학교 올라가서부터 삼촌들을 이기기 시작했고 학교에선 거의 1등을 했다. 그런데 그날 정모에서 8명 중에 4등에 머물렀다. 꽤나 충격이었다. 동호인들의 팔씨름을 가만히 지켜보니, 손을 움켜쥐는 모양이 우리가 알던 보통의 팔씨름과 좀 달랐다. 그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프로선수로서 활동의 시작은.
“팔씨름에서 프로란, 다른 스포츠처럼 소속팀이 있고 연봉을 수령한다는 뜻이 아니다. 노비스(Novice·초심자), 아마추어, 프로 3단계로 실력을 나누는 기준 중 최상위가 프로다. 체육관을 차리기 전에는 다른 일을 하면서 선수활동을 병행했다. 대학교 졸업 후엔 발전소에서 근무도 했다. 이후 개인 사업도 해봤고, 바이럴 마케팅 일도 했다. 팔씨름을 생업으로 삼기로는 2015년 말 결정을 내렸다. 당시 아내가 첫째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출산 이후에는 결단을 내릴 여건이 안 될 것 같아 아내를 열심히 설득했다. 처음엔 아내의 반대에 부딪쳤다. 7개월이 걸려서야 아내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체육관보다 열악한) 물 새는 지하에 체육관을 차린 것이 (전업 선수로서의) 시작이었다. ”
-선수 활동 초기에 대한 기억은.
“선수 생활 초기부터도 내내 상위권을 유지했다. 하지만 사실 별명은 ‘무관의 제왕’이었다. 각종 대회의 누적 성적으로 랭킹은 1위였지만, 정작 우승은 많이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14년 말에 ‘실비스 클래식’이라는, 국내에서 가장 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선수로서 전기를 맞았다. 당시에 팔씨름 대회는 체급 구분이 없어서 (참가 자격을 갖춘) 모든 이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힘은 좀 부족했다. 하지만 지구력과 경기 운영능력으로 이를 극복해서 결국 우승까지 했다. 지금은 지속적인 훈련으로 근력이 많이 강해졌다. 국제대회에서도 수차례 입상하는 등 더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
-선수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15년 미국 아놀드 클래식 암레슬링 챌린지에 –90kg 체급으로 나가 4위에 입상했을 때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입상권에 드는 실력자가 아니었다. 한 번 져서 패자조로 떨어졌지만, 경기 운영을 잘 해서 최종 4위까지 올라갔다. 나는 그때 입상권이 3위까지인줄 알고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런데 동료들이 축하를 해주더라. 알고 보니 그 대회는 4위까지 시상했다. 금이 씌워진 악력기와 20만원이 넘는 상금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기쁨은 더욱 더 값진 것 같다. 내가 가진 모든 걸 선보였고, 최선을 다한 결과를 얻어낸 순간이었기에 정말 기뻤다.”
-전업으로 팔씨름을 하면서 좋은 점과 힘든 점.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 아이 둘을 키우는 아빠면서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사람들의 인식이 아쉽다. 팔씨름이 직업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되묻는다. “돈이 되어요?” “먹고 살 수 있어요?”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그나마 낫다. (눈앞에서) 코웃음을 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
-팔씨름 선수, 오래할 수 있는 직업인가.
“다른 스포츠 종목들보다는 선수 수명이 긴 편이다. 본인이 관리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40대에 전성기가 온다. 50세에도 실력이 감퇴하지 않는다. 다만 성장세가 더뎌질 뿐이다. 근력말고도 다른 요소들이 많이 작용하는 스포츠기 때문이다. 선수로서 활동기간이 길어질수록 기술이 늘어나고, 경험도 쌓인다. 치명적 부상만 없으면 더 나이들어서도 선수로 활동할 수 있다. 팔씨름계의 전설 존 블젱크도 5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국내 팔씨름계 현황은 어떤지.
“팔씨름 단체는 원래 동호회의 형식이었다. 그러다 2017년에 ‘대한팔씨름연맹’이라는 사단법인이 생겼다. 연 2회 국가대표 선발전을 하고 있다. 올해는 ‘1대1 매치’를 활발히 열고 있다. 1대1 매치란 UFC나 다른 격투기와 같이 (토너먼트가 아니라) 선수들을 1대1로 맞붙이는 방식이다. 관객들 흥미 유발차원에도 좋고, 선수들 입장에서도 서로 전력분석을 하면서 준비하기 좋다.”
-세계 팔씨름 선진국들과 비교하자면.
“많이 부족하다. 우선 개인이나 협회의 스폰서가 없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만 보아도 모두 스폰서가 있다. 중국에선 챔피언에게 개인 체육관을 차려주기도 한다. 팔씨름 선진국인 카자흐스탄에선 팔씨름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연금이 나온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선수를 준비하기도 하더라.
한국은 (스포츠로서) 팔씨름의 역사가 아주 짧다. 이미 20~30년 전부터 챔피언이 나오고, 코치진이 있던 나라들과는 환경이 다르다. 하지만 기량적인 부분에서는 최근 2~3년 동안 한국 선수들이 급격히 발전했다. ”
-현재 수입은 어떻게 발생하는지.
“유튜브와 체육관 운영이 주 수입원이다. 현재 유튜브로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200여만원을 번다. 300만원 이상의 수입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 체육관으로는 100만~150만원 정도 순이익을 낸다. 사실 국내에는 상금이 걸린 대회는 많지 않아서 대회 출전만으로 먹고 살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면 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시합 영상 시청자가 늘어난다. 또 유튜브 구독도 늘어나고, 체육관으로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은 마사지를 새롭게 배우고 있다. 마사지는 팔씨름 선수들에게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해볼 생각도 있다.”
-체육관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의외로 프로선수들은 많이 오지 않는다. 노비스나 아마추어 레벨의 선수가 60% 정도, 일반인 30% 정도, 그리고 나머지 10%가 프로선수이다. 요즘은 대부분 유튜브 영상을 접하고 문의를 한다.”
-팔씨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많이 늘고 있는지.
“확실히 늘고 있다. 작년과 재작년이 다르고 올해와 작년이 또 다르다. 체육관을 처음 차릴 무렵, 전업하고 4년 정도면 밥 챙겨먹을 돈 정도 벌게 되길 기대했다. 그런데 거의 4년이 지난 지금 이미 그 이상으로 (팔씨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전에도 팔씨름 유튜브를 운영하는 사람은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유튜브라는 매체가 발달하고, 팔씨름을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도 개봉하면서 인지도가 많이 높아졌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워지기를 기대한다.”
-앞으로의 목표.
“선수로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대회에 나가 입상하는 것이다. 당연히 우승하면 더 좋겠지만, 3위 안에만 들더라도 만족한다. 인간 백성열로서는 나중에 아이들이 (백 선수는 네살배기 아들과 두살배기 딸이 있다.) 아버지가 뭐하시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 아버지 백성열입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전업 팔씨름 선수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하자면.
“현실을 똑바로 봤으면 좋겠다. 단지 다른 일을 하기 싫어서 팔씨름이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 길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인지 스스로 명확히 판단해야 한다. 본인의 체급에서 1위는 하고 결정을 하기 바란다. 입상권(3위)은 전업으로 삼지 않아도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이다. 3위에 들었다고 다른 일을 그만 두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은 성급하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를 마무리하려는 찰나, 백 선수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마디 더 보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해야지 어떻게 해.”
글 jobsN 김지상 인턴 jobarajob@naver.com 2019.05.28.
'성공으로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보] 추신수, 亞 최초 메이저리그 통산 200홈런l (0) | 2019.06.05 |
---|---|
불가능을 이겨내다 (0) | 2019.06.02 |
한국전에 종군한 유일한 [종군 여기자] (0) | 2019.05.30 |
30초안에 끝…망해본 경험있는 30대가 만든 500억 대박 사업 - 빅터 칭 스타트업 미소 대표 (0) | 2019.05.28 |
사회 부조리 꿰뚫어 온 ‘봉테일‘···‘밥때‘도 정확히 지켰다- 김경학 기자 / 경향신문 2019.05.26 (0) | 2019.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