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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훈련한대로 대피하자"... 은명초 삼킨 불길서 116명 살렸다

good해월 2019. 6. 27. 16:28

"평소 훈련한대로 대피하자"... 은명초 삼킨 불길서 116명 살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7/2019062702276.html

입력 2019.06.27 16:08 | 수정 2019.06.27 16:21
순식간에 번진 대형 화재에 5층 별관 건물 전소
장난인 줄 알았던 아이들에 "그래도 배운 대로 대피하자"
지난달 진행한 ‘화재대피훈련’ 기억한 아이들
‘입 막고·허리 숙이고·가까운 계단→운동장으로’
화재 알람부터 학생 귀가까지 1시간 채 안 걸려

"휴대전화만 들고 얼른 교실 밖으로! 평소 배웠던 것처럼 가장 가까운 계단으로 내려가!"

‘위이이잉~.’ 지난 26일 오후 3시 59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은명초등학교에 갑자기 화재 비상벨이 울렸다. 정규 수업이 끝난 뒤 오후 3시쯤부터 방과 후 학교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또 장난 아니야? 엊그제도 누가 장난친 거였잖아." 학생들은 잘못 울린 비상벨이겠거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앞에 있던 교사가 "오작동일 수도 있지만 우선 배운 대로 모두 가방은 두고 휴대전화만 갖고 밖으로 나가자"라고 외치며 학생들을 일으켰다.

불은 필로티 구조인 은명초 별관 건물 1층 아래 쓰레기 집하장에서 시작돼, 옆에 있던 차량을 태운 뒤 건물 1층 천장과 외부 마감재를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 기름이 채워진 차량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발화 5분 만에 불길은 별관 건물 3층까지 확산했고, 결국 건물이 전소됐다.

당시 학교에는 총 10개 과정, 학생 116명과 교사 11명 등이 방과 후 수업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 병설 유치원에도 원아 12명이 있었다. 특히 발화 지점 바로 위에 위치한 교실에서는 학생 11명, 교사 3명 등이 수업 중이었다. 자칫 대규모 참사로 이어질 뻔한 아찔 순간이었지만, 단순 연기흡입 환자인 교사 2명을 제외하고 아이들은 모두 교사의 지도로 무사히 학교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 학교 교사·학생들이 평소 재난 안전대피 훈련에서 교육받은 ‘매뉴얼대로’ 질서 있게 대피했기 때문이다.


26일 오후 서울 은평구 은명초등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해 건물이 불타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26일 오후 서울 은평구 은명초등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해 건물이 불타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은 당시 화재 현장에 있던 복수의 학생과 교사의 말을 종합해 사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 장난인 줄 알았다가 ‘진짜 불’…"평소 배웠던 대로 입·코 막고, 허리 숙이고 대피"
학생들은 교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학생들이 주섬주섬 일어나려 할 때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는 교감 선생님의 육성 방송이 나왔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앞세워 가장 가까운 계단으로 이끌었다. 일부 교사들은 학생들의 뒤를 따라 내려가며 통로를 안내했다. 3층으로 내려가니 시커먼 연기가 꽉 들어차 있었다. 짙은 연기에 코가 시큰해지자 학생들은 그제야 ‘진짜 불’이 난 걸 느꼈다고 한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오기 시작했다. 일부 학생들은 휴대전화로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했다.

"엄마, 불났어. 장난인 줄 알았는데 검은 연기가 보여. 나 어떻게 해?" 독서 토론 방과 후 수업을 듣다가 대피하던 6학년 김미소(12·가명)양이 울먹이며 말하자,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평소 학교에서 배웠던 대로 해. 입 막고, 허리 숙이고 빨리 운동장으로 내려가"라고 답했다.

27일 오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은명초등학교 앞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불에 탄 건물을 보고 있다. /최지희 기자
27일 오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은명초등학교 앞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불에 탄 건물을 보고 있다. /최지희 기자


‘평소 배웠던 대로’. 이날 5층 별관을 전소시킬 정도의 큰 불이 났는데도 연기를 흡입한 교사 2명 외에 인명피해가 없었던 데엔 평소 학교에서 진행해 온 화재 대응훈련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개교한 지 11년 된 은명초는 매년 두 번씩 전교생 1136명을 대상으로 재난 안전대피 교육을 해왔다. 화재 시 대피 방법과 소화기 사용법을 만화 캐릭터들이 나와 설명하는 영상을 보여준 뒤, 실제로 학생들이 건물 안에서 운동장으로 대피를 해보는 식이다.

가장 최근 훈련은 지난달에 진행됐다. 사고 당일 학생들은 교육받은 행동지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물 적신 손수건 등을 재빨리 입과 코를 막고, 휴대전화 외 다른 물건은 그대로 놔둔 채 지정해 준 계단으로 내려와 운동장에 모인다.’ 사고 당시, 미소양은 앞서 배운 대로 턱에 걸고 있던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허리를 숙여 탈출했다.

다른 교실에서 영어 회화 수업을 듣던 손지후(12)양도 마찬가지다. 훈련 때 반별로 내려오는 계단을 따로 지정해 총 세 군데의 각기 다른 출구로 대피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날 지후양은 훈련 때 익힌 동선을 그대로 따라 건물을 빠져나왔다.

은명초는 매년 두 번씩 전교생 1136명을 대상으로 재난 안전대피 교육을 해왔다. 사진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소방안전교육을 하는 모습. /은명초 홈페이지 캡처
은명초는 매년 두 번씩 전교생 1136명을 대상으로 재난 안전대피 교육을 해왔다. 사진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소방안전교육을 하는 모습. /은명초 홈페이지 캡처


◇ 매뉴얼대로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친구들 편의점서 생수 사서 건네
대피한 학생들과 교사들이 모두 운동장에 모였다. ‘건물에서 빠져나온 뒤 따로 움직이지 않고 운동장 가운데에 모인다’라고 훈련받은 덕이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가르치고 있던 교사는 우는 학생들을 달래며 교실에 같이 있던 친구들이 모두 옆에 있는지 살펴보라고 말했다.

그 사이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던 남학생들은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가 2리터(ℓ)짜리 생수 4병을 사와 대피한 친구들에게 건넸다. 당시 축구를 하고 있던 6학년 조모(11)군은 "가슴이 답답하다는 친구를 보고 얼른 물을 사 왔다"며 "건물에서 나온 친구들이 물통을 돌려가면서 한모금씩 마셨다"고 말했다. 물수건을 사와 콜록대는 친구 코에 대주거나, 친구 얼굴에 묻은 거뭇거뭇한 재를 닦아주는 학생들도 있었다.

학교 옆 놀이터에 있던 마예빈(12)양은 "학교 주차장 쪽에서 ‘펑’소리가 들리고 건물이 불에 타길래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친구가 무사한지 보려고 운동장으로 뛰어갔다"며 "그 친구가 안 보여서 철렁했는데, 운동장 저 끝에서 얼굴이 까맣게 돼서 달려오는 친구를 보고 눈물이 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대피를 도운 방과 후 학교 교사 김모(35)씨는 "학생들이 대피하는 계단을 잘 알고 있었고, 훈련 경험이 있어 교사들의 말을 잘 따라 우왕좌왕하지 않고 전부 운동장에 모일 수 있었다"고 했다. 학생과 교사가 훈련 매뉴얼대로 무사히 대피하는 사이, 학교는 가정에 공지를 전달하는 ‘e-알리미’ 애플리케이션으로 화재 발생과 대피 상황을 알렸다. 운동장에 모인 교사들은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와 집까지 데려다줬다. 화재 발생부터 귀가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이후 각 반 교사들은 학부모에게 전화를 돌려 학생의 위치를 묻고 안전을 당부했다.

27일 오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은명초등학교에서 국립과학수사원 등이 합동 감식을 하는 모습. /최지희 기자
27일 오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은명초등학교에서 국립과학수사원 등이 합동 감식을 하는 모습. /최지희 기자


불이 붙은 건물은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11층 이상 일반건축물)이 아니지만, 자체적으로 소방시설을 갖춰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었다. 당시 학생들이 있던 4, 5층에는 불길이 닿지 않아 작동은 하지 않았다. 건물 내 방화벽도 모두 내려와 건물 통로를 막아 옆 건물로 불길이 번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27일 오전 국립과학수사원의 합동 감식이 이뤄지고 있던 학교에서 교사들은 거멓게 그을린 교과서와 집기 도구를 상자에 담아 빼내고 있었다. "홀라당 불에 타버린 교실을 보면 마음이 아리지만, 학생들이 모두 무사히 잘 대피해줘서 하늘에 백번 천번 감사해요." 화재 당시 반 아이가 건물 안에 있다가 대피한 최모 교사가 울먹이며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7/20190627022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