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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욱 전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이 서울 서초구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지난 40여 년간에 걸친 자신만의 ‘세계 여행기’를 술회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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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욱前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
체신부서 근무하던 1971년에
日에 다녀온 것이 첫 외국 방문
공직생활·공사 사장직 은퇴 뒤
1993년부터 부인과 본격 여행
대륙·지역을 여러 블록 나눠서
빠지는 나라 없게끔 동선 잡아
버스·지하철·도보 ‘BMW’와
햄버거 식사 등 자린고비 여행
나폴레옹 유배된 세인트헬레나
가장 힘들고도 보람 있던 여행
아프리카선 괴한에 납치 위기도
250國 이상 방문자에 수여하는
美 TCC 인증서 국내 첫 주인공
부인도 TCC 기준 186國 기록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 책의 한 페이지만을 읽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바울 다음으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성(聖)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이해욱(81) 전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사장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표현대로라면 책 한 권을 대부분 읽고 별첨까지 섭렵한 경우다. 유엔 가입국은 193개국, 이 전 사장은 유엔 가입국보다 많은 264개국을 다녀오고 지난해 4월 미국의 세계 여행자 비영리단체 ‘트래블러스 센추리 클럽’(TCC·Traveler’s Century Club)으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플래티넘 회원’(250개국 이상 방문) 인증서를 받았다.
이 전 사장이 다녀온 유엔 가입국을 제외한 나머지 71개국 중에는 유엔에 가입하지 않은 팔레스타인도 있고, 자치령이나 통상적인 국가는 아니지만 국제표준화기구(ISO)가 국가코드를 부여하고 있는 곳도 있다. TCC는 국가·지역 등 총 327개국을 여행지로 지정하고 있다. 섬나라 100개국을 포함한 264개국 방문 도전은 그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이 전 사장 사무실을 찾았다. 20여㎡의 아담한 공간이었지만 본격적으로 펼쳐진 여행담은 ‘시공간’을 초월했다. 이 전 사장과 함께 세계를 누빈, 평생의 동반자인 부인 김성심(80) 전 대한산부인과학회 부회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 전 사장은 1964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사무관이던 1971년 5월 일본을 다녀온 것이 첫 외국방문이다. 당시 외환보유 사정이 여의치 않아 누구나 자유롭게 외국을 오고 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체신부 차관으로 공직을 마치고 한국통신 사장 등의 자리에서 모두 물러난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에 나섰습니다. 264개국을 다녀오고 2018년 TCC 플래티넘 회원 인증을 받기까지 모두 47년이 걸렸죠. 우리나라에서 외국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게 1989년이잖아요. 제가 어떻게 보면 대기록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장인어른입니다.”
이 전 사장의 장인인 고 김준섭 전 서울대 물리대학장은 철학자로서 해방 후 최초의 외국여행기인 ‘구미체류기’를 1956년 펴냈다. 이 전 사장은 “장인이 전액 장학금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당시 6·25전쟁으로 귀국하지 못했다”며 “귀국하면 다시는 밖에 못 나갈 것을 생각한 장인은 장모의 허락을 받고 몇 년간 장학금을 아껴 모은 돈으로 철학의 본고장인 유럽을 다녀오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장모의 판단이 옳았다”고 했다. 김 전 학장은 당시 유럽에서 독일의 유명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 인생의 본질적 가치를 정의하고 증명한 명저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를 만났다. 당시 헤세는 김 전 학장에게 “내가 만난 첫 동양인”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김 전 학장은 국내로 돌아와 ‘구미체류기’를 완성하고 외국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서양철학의 논리학과 과학철학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이 전 사장은 “우리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당시 남들이 장래희망을 ‘현모양처’라고 할 때 보기 드물게 ‘세계 일주’를 적어 제출하셨다”며 “내 몸에는 ‘여행가의 DNA’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사장과 부인 김 전 부회장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평화롭던 초등학생들의 학교생활은 6·25전쟁과 함께 끝났다. 이 전 사장과 김 전 부회장은 각각 대구와 충남 공주로 피란을 떠났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것은 대학 입학 후였다. 이 전 사장은 서울대 상과대학(현 경영대학), 김 전 부회장은 서울대 의과대를 진학했다. 이 전 사장은 “아내가 의대에 입학했을 때 남학생이 116명, 여학생이 4명이었다”며 “친구가 나를 이끌고 의대로 가서는 그곳에서 만나는 의대 남학생들에게 내가 아내의 연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날로 아내는 ‘임자 있는 몸’이 됐다”고 미소를 지으며 회상했다.
김 전 부회장이 여권을 처음 만든 건 이 전 사장이 공직을 떠나서부터다. 김 전 부회장은 “외국에 나가는 걸 사회적으로 꺼리던 시절, 공직자인 남편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어 아예 외국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며 “외국여행이 자유화된 이후에도 나가지 않고 남편이 퇴직하기만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뒤늦게 세계여행을 시작했지만, 김 전 부회장은 TCC 기준으로 186개국을 다녀오는 기록을 세웠다. 이 전 사장 부부는 프랑스 나폴레옹(1769∼1821) 황제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뒤 영국군에 의해 유배돼 숨진 대서양의 고도이자 영국 자치령인 세인트헬레나를 다녀온 일정이 가장 힘들면서도 보람 있었다고 떠올렸다. 방문 당시(2016년)만 해도 세인트헬레나섬을 가려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우편운송선’을 타고 편도로 5박 6일이 걸려야 갈 수 있는 험지였다.
“배가 심하게 흔들려 준비해 간 멀미약은 물론, 주사까지 맞았지만 소용없었어요. 심신이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의사인 아내가 곁을 지켜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죠. 과거에 아내 없이 떠난 여행은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아프리카에서는 괴한에게 납치될 뻔한 위기를 맞았고, 아프리카를 다녀온 뒤에는 ‘봉와직염’(급성세균 감염증의 일종)에 걸려 입국하자마자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죠. 아내는 저에게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여행에서도 ‘수호천사’라고 할 수 있죠.” (이 전 사장 부부가 세인트헬레나섬을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이 개통돼 지금은 우편운송선이 아닌 비행 여행이 가능해졌다.)
이 전 사장이 5대양 6대주 264개국을 다녀오는 대기록을 세운 비결은 치밀한 기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름대로 치밀한 작전이 있었죠. 먼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먼 곳부터 다니자고 해서 중남미부터 시작했습니다. 한 대륙이나 지역을 잡으면 몇 개 블록으로 나눠 빠지는 나라가 없도록 동선을 짜는 것이 중요했죠. 중남미는 40여 일 단체 여행을 다녀온 뒤 빠진 나라를 적어두고 아내와 배낭 여행을 3차례 더 다녔습니다. 1997년 1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중남미와 카리브 지역을 도는 데 약 5년이 걸렸죠. 남극 대륙과 남극 주변의 사우스조지아, 포클랜드 등은 남미와는 별도로 다녀왔습니다. 그 후에는 태평양의 섬나라, 중동과 아프리카 순이었습니다. 아시아 각국은 틈나는 대로 단체나 개별여행을 다녀왔고요.”
그는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지로 수만 마리의 펭귄이 가득했던 ‘남극 대륙’과 바다에 잠기고 있는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를 꼽았다. 9개의 산호섬으로 구성된 투발루는 평균 해발고도가 3m 정도로 이미 2개는 바다에 잠겼다. 지구 온난화로 극지방 빙하가 녹아 바다로 흘러드는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연평균 해수면 상승률은 3.9㎜다. 투발루는 2050년쯤 섬 전체가 수몰될 위기에 놓였는데, 투발루섬 곳곳에 이미 물에 잠긴 곳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본 이 전 사장은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주민들은 뉴질랜드로 이주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사장은 2005년 피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투발루로 가던 중 비행기 고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는데 3년 후에 다시 갔다. 그곳을 가지 않으면 태평양의 섬을 다녔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이 전 사장 부부가 전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은 ‘근검절약’이다. 부부는 “우리는 지금까지 차 한 대 없이 오직 BMW(Bus(버스), Metro(지하철), Walking(도보))로 살고 있다”며 “여행을 가서 햄버거로 끼니를 해결하거나 저렴한 숙소에 묵으면서 경비를 최소화했다”고 했다.
이 전 사장은 아시아 최초의 TCC 지부를 한국에 설립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그는 “아시아 최초의 TCC 지부를 한국에 설립하려면 100개국 이상을 다녀온 TCC 회원이 최소 15명 필요하다”며 “지금까지 여행사 등의 도움을 받아 14명을 모집했다”고 말했다. 이 전 사장은 “나는 늦게 여행을 시작했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TCC 한국지부가 생기면 더 많은 유익한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더 많은 국가를 효율적으로 다녀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2011년 한 회사에서 진행한 ‘직장인 노후준비 실태’ 설문에서 ‘은퇴생활 롤 모델’ 1위에 올랐다.
“저희 부부는 여행을 통해 배려와 협동심을 키웠습니다. 지금도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고 대화 소재가 무궁무진합니다. 이게 바로 여행의 매력이죠.”
이 전 사장은 ‘세계는 한 권의 책’(2011년), ‘이해욱 할아버지의 지구별 이야기’(2013년) 등 책을 쓴 여행작가이기도 하다. 또한, 서울을 비롯해 전국 대도시에서 외국여행 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는 “건강이 허락한다면 꼭 가보고 싶었는데 물리적으로 가지 못한 곳을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탈레반과 전쟁 등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은 끝내 가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2006년 8월 3박 4일간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게 전부예요. 평양을 가야 제대로 북한을 갔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평양 옥류관 냉면을 먹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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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욱 전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은 지난해 4월, 250개국 이상 방문을 인정받아 미국의 세계 여행자 비영리단체 ‘트래블러스 센추리 클럽’(TCC)으로부터 ‘플래티넘 회원’ 인증서(사진 왼쪽부터)를 받았다. 이 전 사장은 카메라를 ‘여행자의 또 다른 눈’으로 정의하고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극의 다양한 종류의 펭귄 무리와 해수면 상승으로 가라앉는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 부인 김성심 씨와 남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사막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이해욱 전 사장 제공 |
이 前사장 추천하는 10곳
‘행복한 인생’ 부탄… ‘낙원의 섬’ 세이셸…
‘인도의 걸작’ 카주라호 사원
이해욱 전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은 전 세계 264개국을 여행했다. 그리고 수만 장의 사진과 함께 빼놓지 않고 여행의 소감을 꼼꼼히 기록했다. 동영상도 250시간 분량을 촬영했다. 그가 추천하는 국가와 유적지, 최고의 경관은 어디일까. 우리에게 생소한 10곳을 엄선했다.
△행복한 인생은 부탄, 다른 행성이 궁금하면 마다가스카르 = 부탄은 자연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지리적 특성상, 범인도권과 티베트 문화가 독특한 형태로 고착됐다. 행복 지수가 최고인 나라, 순수하게 보존된 자연환경, 때 묻지 않은 인심, 신화와 전설이 숨 쉬는 곳이다.
마다가스카르는 귀중한 동식물의 보고인 나라다. 아프리카 대륙과는 다른 독자적인 진화로 인한 것이다. 식물은 8000종이 있으며 마다가스카르의 고유종이 80% 이상이라고 한다. 원숭이 원종의 하나인 여우원숭이도 이곳에 서식하고 있다.
편안한 휴식이 필요할 때는 세이셸이 좋다고 이 전 회장은 추천했다. 산호섬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낙원의 섬’으로 불린다. 유명한 식물로는 지름 50㎝인 바다 코코넛이 있다. 나무에서 떨어지면 녹색의 외피 부분이 없어져 엉덩이처럼 생긴 모습이 된다.
△자연경관…앙헬 폭포·나미브 사막·갈라파고스섬·응고롱고로 보호지역 = 앙헬 폭포는 베네수엘라 카나이마 국립공원 내에 자리해 있다. 높이가 979m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1935년 미국의 모험가 제임스 에인절에 의해 발견돼 널리 알려졌다. 폭포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땄다.
나미브 사막은 아프리카 대륙의 서남부에 있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이다. 그 폭이 80∼140㎞에 이르는 광활한 모래밭이다. 철 성분이 많은 모래가 오랜 산화 작용으로 붉은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갈라파고스섬은 남미 에콰도르 동쪽 960㎞ 지점에 있는 섬들. 이곳 동물들은 철저히 격리된 환경에서 진화됐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모른다. 응고롱고로 보호지역은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북부 세렝게티 평원 동쪽에 있는 거대한 분화구다. 350종 2만5000마리에 가까운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자연 동물원이다.
△유적지…페트라·카주라호·이스터섬 = 페트라는 요르단 남부에 있는 대상 도시(가늘고 긴 띠 모양으로 형성된 시가지) 유적이다. 7세기부터 활약한 유목민인 나바테아인이 건설했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붉은 사암 덩어리로 된 바위산을 깎아 조성한 바위 도시다.
카주라호는 인도 북부에 있는 건축과 조각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사원이다. 인도 예술 최대 걸작으로 사원을 장식한 조각이 성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스터섬은 태평양 한가운데 칠레로부터 약 3700㎞ 떨어진 곳에 있다. 거대한 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모아이 석상은 원형 그대로 신비를 간직한 채 여전히 만족할 만한 설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해완 기자 paras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