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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 추사 김정희 보물 무더기 공개 ★ **

good해월 2007. 2. 3. 11:27

【서울=뉴시스】‘추사 문자반야(秋史 文字般若)’ 가 2월25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계속된다. 추사 김정희(1786~1856) 150주기를 기념하는 전시회다.

‘이헌서예관 소장 추사명품’과 ‘멱남서당 소장 추사가의 한글’도 동시에 개최한다.

추사 학예세계의 전모를 보는 것이 목적인 전시다.

추사의 ‘자화상’을 비롯해 추사체의 정수가 드러나는 ‘문자반야’ ‘도덕신선(道德神僊)’ ‘사서루(賜書樓)’ ‘문자 보리(文字菩提)’ ‘만휴(卍 休)’ 등 대자서(大字書)가 나와 있다.

행서 병풍, 파체서(破體書)인 ‘가정 유예첩(家庭遊藝帖)’ , 서예 비평과 감식의 절품인 ‘완당 제산곡신품첩(阮堂題山谷神品帖)’등 분야별 대표작 100여점도 모았다.

박제가의 지두화(지두화) ‘한거 독서(한거독서)’, 정약용 초서 병풍 ‘4언고시’, 초의선사 ‘문자반야’ 시첩 등 사우 문인관계 작품 50여점, 옹방강 ‘애련 설도(애련설도)’‘담계 척독(담계척독)’ ‘세한도 발문(세한도발문)’ 등 한중 교유관계 50여점, 김한신 정순왕후 김씨 김노경 등 추사가(가) 한글 편지 등 가계작품 50여점을 포함해 모두 25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추사는 단순 서예가가 아니다. 시서화, 유불선, 문사철을 관통하는 전인적 인물이다.


추사체는 비학(碑學)과 첩학(帖學) 혼융의 결정체다. 19세기 당시 동아시아 세계 서예 역사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추사는 당과 송의 글씨는 물론 1000여년 넘게 받들어 온 서성(書聖) 왕희지를 거슬러 올라가 글씨의 이념형을 전예에서 찾아 실천해냈다. 중국에서조차 이룩하지 못한 경지였다.

추사체는 글씨의 기괴한 조형 만이 아니다. 미학적으로 기괴와 고졸함이 특장인 추사체의 아름다움은 정법(正法)을 자기부정한 결과다. 그 정신적 경계는 유불선을 회통하는 고도의 이념미나 성속을 넘나들고 있다.



얼마 전 추사 작품 조사차 어느 소장가 댁을 방문했다. 초면이지만 환대를 받았다. 수차의 시도 끝에 겨우 승낙을 얻어내는 여느 때와는 분명 딴 판이다. 이미 병풍과 액자가 어두컴컴한 거실에 대기되어 있었다. 울룩불룩한 필획이 당장이라도 병풍 속에서 뛰쳐나올 것 같았다. 소파에 앉기도 전에 이미 소장 내력이며 근 30년도 전에 전문가의 감정이야기, 어마어마한 구입가격 등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틀림이 없음도 강조했다. 그런데 어느 기관에서는 ‘아니다’라는 판정을 내렸다고 흥분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필자를 정의의 사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품 감식에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안목과 혹리(酷吏:세금을 걷는 가혹한 벼슬아치)의 손을 요구한 추사 같으면 그 자리에서 답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도 못한 필자는 아무 말도 안하는 액자를 자꾸 곁눈질하며 물러나왔다. 기실 병풍이 아니면 액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 추사체(秋史體)는 카멜레온이다.

사정은 다르지만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을 두고 벌어지는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추사만 나오면 따라다니는 문제가 작품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사동에서는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한 것을 주워(?) 횡재를 하기도 하고, 반대로 수업료로 집을 날린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면 왜 추사작품이 이렇게 어려운가. 필자 생각으로는 실제 가짜도 가짜지만 추사의 작품 제작 태도가 워낙 변화무쌍한 데에서 진위를 오판하는 측면도 크다고 본다. 결국 알고 보면 둘 다 진짜인데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추사의 학예인생의 화두를 말한 것이자 여러 절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간송미술관 소장 ‘유애도서겸고기(唯愛圖書兼古器:오직 도서를 사랑하되 옛 기물도 아우르며) 차종문자입보리(此從文字入菩提: 또 문자를 가지고 큰 깨달음에 든다)’만 해도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네 종이 전한다. 서로 다른 종류의 예서작품이 있는가 하면 해·행서가 있다. 그것도 쓴 시기가 다르다. 게다가 보통 작가들한테 이런 작품제작 예는 아주 드물게 발견된다. 그리고 경험상 이런 동일 글귀 작품이 일괄로 한자리에서 공개되지 않는다. 즉 몇 십 년을 두고 서로 다르게 우연히 발견되니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통력이 아니라 작품의 전모를 보지 않고 추사를 말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일이 없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대련글씨 ‘대팽두부과갱채 고회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왼쪽 작품(각 31.9×129.5㎝)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며 오른쪽(각 56.5×36.5㎝)은 개인 소장품으로 8폭병풍 가운데 일부이다. 내용은 ‘좋은 반찬은 부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뜻이다.
추사의 변화는 이것뿐만 아니다. 초년글씨와 말년글씨는 완전히 딴사람이다. 변화무쌍하기로는 초년도 말년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변화’가 추사체의 기저라 할 만하다. 예컨대 추사가 24세 연행(燕行) 이후 4년 만에 쓴 ‘계당서첩’은 아직 금석기가 드러나지 않는 해서와 행서작품이지만 옹방강은 물론 미불과 동기창이 있고, 안진경과 왕희지가 동시에 소화되면서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다. 이후 40대, 50대, 60대 글씨풍이 다 다르니 그 현란함은 더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동일 시기 작품 또한 서체에 따라 다르다. 같은 서체라도 정색을 하고 쓰기도 하고, 감정을 있는 대로 담아내기도 한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도 있을까 눈을 의심케 한다. 그러니 누구든지 추사 앞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정법(正法)의 자기부정(自己否定)으로서 기괴(奇怪)와 고졸(古拙)그러나 추사체는 마구 변화만 즐기는 것은 아니다. 관조해보면 일관된 변화 원칙이 있다. 시기별로 보면 추사체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엄격한 정법을 토대로 하고 있다. 연행 이후 부터 30대에 옹방강을 통해 정법을 익혔다면 40대에는 바로 옹방강의 토대가 된 구양순법을 체득하면서 정법의 극점에 도달한 것이다. 서예사에서 ‘당법(唐法)’이라 함은 바로 해서의 전형을 두고 한 말인데 그중에서 구법(歐法)을 최고로 쳐왔다. 해배 이후 과천시절에 무르녹아난 추사체의 기괴(奇怪) 고졸(古拙)함의 미학은 첩·비가 혼융되면서 바로 정법의 자기해체나 파괴의 결과물인 것이다.

# 리듬에서 구조로, 추사체의 현대성그리고 조형 그 자체로 보면 엄격한 음양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글자의 점획이나 짜임새, 글자간의 배치를 문제 삼는 장법 등에서 서로 다른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추사 공간경영의 제1차적인 특질인 것이다.

김정희의 ‘계산무진’(谿山無盡), 165.5×62.5㎝, 간송미술관 소장. 계산(谿山) 김수근(1789~1854)에게 써 준 것이다.
그중에서도 추사체는 이광사나 이삼만 등 기존의 첩학파들의 트레이드마크인 초서의 리듬보다 건축적인 공간구성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물론 그 토대는 전서나 서한예서의 구축적 글꼴과 금석기의 획질이 해서나 행초에 녹아나온 결과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현대조각의 아버지라 할 김종영 같은 작가의 작품이 추사체에서 나왔다는 작가의 고백은 지극히 의외이면서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정법의 자기부정으로써 고졸함과 구축적인 공간구조로써 추사체의 정신적 경계는 무엇인가. 추사의 작품으로 보면 과천시절에 만들어진 ‘불이선란도’나 ‘판전’과 같은 경지다. 과천시절 추사체는 불이선란도 제시(題詩)에서 ‘성중천(性中天)’이 ‘불이선(不二禪)’과 하나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유·불·선 회통의 고도의 이념미(理念美)를 필묵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추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듯 아무도 범접 못하는 관념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다. 늘 성속(聖俗)을 넘나들며 고도의 관념미마저도 추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필묵 하나로 시 서 화에 담아내고 있다. 요컨대 선(禪)이 일상 속에 내려와 들어차 있는 것이 추사인 것이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소원학공자’(所願學孔子), 종이에 먹, 26.0×155.0cm, 동산방 소장.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요즘 서예가들의 글씨는 글 짓는 것과 별개다. 서예가들은 글 짓는 것보다 쓰는 데 더 치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자는 본질적으로 내용과 조형을 동시에 문제 삼고 있다. 여기에 현대서예의 딜레마가 있다. 글씨를 액션페인팅처럼 뿌리고 쳐바르면 재미도 있겠건만 서법에다 시인까지 되어야 한다니 이것 참 죽을 노릇이다.

# 구체적인 일로 실질 되게 하고 옳음을 추구한다 - 실사구시아직 우리에게 추사는 서예가다. 기괴한 조형의 대명사인 추사체를 만든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있다. 이것은 다분히 추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한 결과지만 추사체가 추사의 전부는 아니다. 그 나머지는 학문이다. 추사의 학문은 경학(經學)으로, 당시 경학은 고증학(考證學)이다. 고증학은 송·명대 공리공담에 치우친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고증을 통한 고대 금석이나 기물을 통해 유교경전 본래 의미나 자구해석에 치중한 학문이다. ‘고고증금’하는 고증학에 대한 인식을 그의 ‘실사구시잠’을 보자.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사서루’(賜書樓), 종이에 먹, 27.0×73.5cm, 개인 소장.
攷古證今(옛 것을 상고하여 지금 것을 증명했으니) / 山海崇深(산처럼 높고 바다같이 깊도다) / ●實在書(사실을 조사함은 책에 있고) / 窮理在心(이치를 궁구함은 마음에 있네) / 一源勿貳(한 가지 근원을 둘로 나뉘지 말아야) / 要津可尋(중요한 나루를 찾을 수 있다네) / 貫徹萬卷(만권 서적을 관철하는 것은) / 只此規箴(다만 이 실사구시잠에 있다네)근대의 추사연구자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에 의하면 ‘실사구시잠’은 추사가 옹방강이 보낸 편지를 읽고 지은 찬사라고 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추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다. 여기에는 학문의 방법뿐 아니라 그 지향점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추사는 ‘실사구시설’ 첫머리에서 ‘구체적인 일로써 실질 되게 하고 옳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이다(實事求是 此語乃學問最要之道)’라고 했다. 여기에서 ‘실사(實事)’는 한학(漢學)의 훈고학적 실증주의를, ‘구시(求是)’는 송학(宋學) 즉 주자학의 의리(義理)적 도덕주의를 지칭한다. 추사는 바로 그의 학문의 지향점인 ‘실사구시’를 통하여, 한학과 송학 즉 훈고학과 의리학의 절충 혹은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 학문과 예술은 하나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판전’(板殿), 종이에 먹, 68.5×180.0cm, 개인 소장.
사실 추사 작품을 내용적으로 보면 모두 이러한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所願學孔子(소원학공자)’는 추사 예서의 절품(絶品)이기 이전에 추사 경학의 지향처다. 정약용의 저서가 500권이 넘는 것에 비하면 추사는 초라하다. 하지만 추사 작품 간찰 시고 하나하나가 알고 보면 추사학문의 결정체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실에 근거하여 이치를 밝힌 학예일치의 주인공은 추사인 것이다. 그런데 추사를 두고 기괴한 조형만큼이나 또 고도의 관념론만 이야기한다. 예컨대 완당의 ‘관념’ 바람이 조선후기 진경산수나 풍속화 등 사실주의 화풍을 일시에 꺾어버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구시(求是)만 보고 실사(實事)를 보지 못한 처사다. 여전히 일부 학계에서는 추사를 두고 ‘실학자’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추사 자신은 이런 시비에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추사에 대한 오해는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어디 농사나 장사, 먹고 사는 문제만이 실학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추사야말로 학문은 물론 예술에서도 실사와 구시를 일치시켜 낸 인물인 것이다.

# 문자반야(文字般若)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 종이에 먹, 31.9×44.5cm, 개인 소장.
그러면 서예에서 실사구시는 무엇인가. 추사에서 배워본다면 우선 내용을 온전히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조형을 고전에서 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사’다. 서법에 있어 추사의 실사는 진당 고법이고, 또 그것을 넘어선 한예(漢隸: 한나라의 예서)다.

그러나 그것에만 얽매여 있어도 안된다. ‘구시’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념이나 지향처다. 추사가 글씨를 통해 구한 것은 고졸(古拙)의 아름다움이고 그 정신적 경지는, ‘불이선란도’를 빌려 말하자면 ‘성중천(性中天)’이고 ‘불이선(不二禪)’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내가 하늘로 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 안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또 다른 말이자 문자반야(文字般若)이기도 한 것이다.

‘반야’는 인간 생명의 근원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예지(叡智)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분별심을 초월한다. 예로부터 이를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실상반야는 진리 그 자체(理經)를 말하고, 관조반야는 사물의 근원자리를 사무쳐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한다. 반면 문자반야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율(律)·논(論) 전부를 가리키는데 이는 실상반야와 관조반야를 실어 나르는 도구이다. 요컨대 추사 예술, 즉 서예 또한 문자를 통해 내용과 조형으로 사물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지혜, 즉 반야의 경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학예일치인 것이다.

# 나는 누구인가그러나 추사의 실사구시와 학예일치의 경지는 경학과 글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년의 추사는 어느 날 거울을 들고 자기를 대면했다. 파란만장했던 70 평생을 나를 그리며 정리할 심사였다. 소략한 옷 처리에서 영락없는 과천 촌로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봉발(蓬髮)에 가까운 털 올 하나하나를 리얼리티의 극치라 할 필치로 이 잡듯이 헤아리며 담아냈다. 이것은 화원의 도식화된 필치도 아니고, 붓 몇 번으로 그림이 완성되는 세한도(歲寒圖) 유와는 딴판이다. 여전히 부리부리한 봉황눈매며 꽉 다문 입술은 부러질지언정 굽힐 수 없는 추사의 결연한 의지와 고집 그대로다. 하지만 추사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리얼리티만을 위해 붓을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을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나이다/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제주가 주렁주렁한데 누가 큰 마니주 속에서 상(相)을 집착하는가. 하하(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是我亦我 非我亦我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呵)’이미 추사의 붓은 자신의 내면 실상(實相)을 더듬으며 세상의 시비는 물론 자신마저도 넘어서고 있었다.
출처 : 끝없이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을 위해서...
글쓴이 : 릴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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