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계천에 아주 특별한 공구 상가가 한 곳 있다.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맨주먹으로 재건, 외국 기계 베껴가며 기술 자립,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 구두쇠 정신, 그리고 아낌없는 베풂-. 스무 평 남짓한 이 공간에 한국 경제의 도전사가 응축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수표동 11-7번지, 록스기계를 38년째 지키고 있는 전병두 사장 겸 김포외고 이사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키가 155㎝나 될까. 그런데 허리는 왜 그렇게 ‘오버’를 했는지? 44인치란다. 한눈에도 “내가 바로 전병두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병두(58) 록스기계 사장은 아침 7시30분부터 서울 수표동 11-7번지, 그 자리에서 기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난닝구(러닝셔츠)에 반바지 대신 셔츠 입고 3000원 주고 드라이한 것”이다. 하얀색 티셔츠도 부랴부랴 사 입은 듯하다.
전 사장이 유명세를 탄 것은 학교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경기도 김포에 김포외국어고등학교를 세웠다. 전 재산의 절반인 200억원을 털어넣었다. 그는 명함을 앞뒤로 나눠서 쓰는데 한쪽엔 ‘사장 전병두’라고, 다른 한쪽엔 ‘이사장 전병두’라고 적혀 있다.
명함을 받아쥐자마자 “명함을 두 개 만들지 그랬어요. 그래야 체면이 설 텐테”라고 물으려고 했다. 그렇게 입술을 떼려던 차에 땟자국 분명한 책상, 모나미 153볼펜이 눈에 들어오는 것 아닌가. 이런 사람이 명함 두 장을 찍을 리 만무했다. 일단 ‘사장 전병두’를 만나봤다.
“평소엔 ‘난닝구’에 멜빵바지”
언제부터 청계천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까. “사업은 무슨? 장돌뱅이지. 69년에 (청계천에) 처음 왔어요. 행상을 했지.”
행상이라면? “리어카 위에 미제 ‘장물’을 올려놓고 팔았어. 그땐 공구라고 해봐야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것밖에 없었어요. 내 가게를 가진 것은 70년 7월 1일이야.”
경기도 포천시 운천면이 전 사장의 고향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 땅이었다. 원래는 1950년생인데, 할머니가 출생신고를 잘못 하는 바람에 49년생이 됐단다. 태어나던 해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로 피란 나왔다.
그 통에 아버지를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가 ‘세탁소 보이’로 살았지만 그를 다시 대처(大處)로 보낸 것은 생활고였다. 중학교를 마치고 경기상고에 들어갔지만 1년 만에 학업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제2의 고향의 돼 버린 곳이 청계천이다. 자기 가게를 얻자마자 ‘경기상사’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를 장돌뱅이에서 사업가로 거듭나게 한 것은 건설 붐이었다. 75년부터 강남 아파트 건축 붐이 일었고 자연히 공구 수요도 늘어났다. 록스기계는 배관설비공구, 그중에서 파이프 머신을 팔면서 엄청나게 세(勢)를 불렸다. 파이프 머신은 상하수도·난방 파이프의 양끝을 깎아주는 절삭 기계다.
“원래는 ‘파이프 슬라이딩 머신’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여기서 누가 그렇게 긴 이름을 쓰나. 그냥 ‘빠이쁘 머신’이라고 하지. 그때만 해도 일본 렉스라는 회사에서 전량 수입해 왔습니다. 그런데 (렉스 제품을) 가만히 보니 우리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엔 일제 부속품을 절반 넘게 하나 둘씩 국산화했다. 100% 국산화가 될 즈음 ‘로렉스’라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를 달았다. “멋있어 보여서” 그랬단다(외국 시계 브랜드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전 사장은 연방 “베꼈어. 잘 베꼈지”라고 말했다.
인천 남동공단에 공장까지 두고 파이프 머신을 전문 생산했는데, 하다 보니 국내 1인자가 돼 있었다. 지금이야 수요가 많이 줄었지만 20년 동안 월 300대를 팔았단다. 이 밖에도 록스에서는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뚫는 코어 드릴, 하수도 청소기 등을 취급한다. 연매출이 30억~40억원가량 된다고.
성공 비결이 뭡니까. “나야 성실이지. 아무리 머리 좋으면 뭐 해. 거북이가 토끼 이기잖아요?”
나중에 학교 교훈을 묻자 “얘기하면 뭘 해. ‘성실’ 두 글자로 끝냈지”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성실하셨는데요? “쓸데없이 외화 낭비 안 했습니다. 해외여행 안 갑니다. 일본에 영업상 세 번, 중국 한 번 간 것이 전부입니다. 수입 공구 국산화하겠다는 사람이 외국 가서 돈 뿌릴 수는 없잖아요. 40년 일하는 동안 ‘이틀 휴가’ 간 것 빼고는 청계천으로 출근했어요.”
이틀은 왜 빠지셨습니까?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다왔지. 일요일에 결혼해서 이틀 자고 올라오면 되는 거 아니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 사장은 여의도에 있는 집에서 아침 7시30분 출근해 저녁 7시30분 퇴근한다. 부인은 오피러스를, 큰딸은 쏘나타를, 아들은 액티언을 타지만 자동차를 사준 그는 정작 ‘261번 시내버스’를 타고 다닌다.
천렵도 안 갑니까. “일요일에 쉬잖아요. 토요일 2시에 문 닫고 (고향 인근인) 산정호수 가서 스케트(스케이트) 한 번 타고 이동갈비 먹고 오면 그게 휴가지. 안 써야 돈을 벌어요, 나가면 돈이야. 나는 많이 벌어서 많이 모은 것이 아닙니다. 조금 벌어도 안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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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아들이 인터넷 공구점 대 이어
다른 사업도 하셨나요? “목욕탕을 했어요. 서강대교 앞에도 있고, 인천 남동공단에는 작게 하고, 김포에는 아주 크게 합니다. ‘김포 스파월드’라고 6000평쯤 돼요.”
목욕탕 사업을 시작한 것도 이유가 간단했다. 지금이야 규제가 풀렸지만 80년까지만 해도 거리 제한이 있어서 목욕탕 영업하기가 수월했다. 전 사장은 “물만 콸콸 나오면 최고 노다지 장사였다”고 말했다. 주위의 권유로 서울 땅을 사둔 것도 보배가 됐다. “마포에 30평, 남동공단에 130평 샀어요. 그것을 20~30년 붙들고 있어 보니 돈이 됐습디다.”
그가 김포에 외국어고를 세운 것도 목욕탕 덕분이다. 김포에 대형 목욕탕을 오픈한 것이 98년. “사양업종으로 몰리면서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신도시가 세워지면서 손님이 몰리더란다. 그 당시 김동식 김포시장의 “외국어고를 유치하겠다”는 인터뷰 기사를 접했다. 그날로 “내가 김포에 있으니 내가 한번 지어 보겠다”고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돈을 마련하셨습니까. “남동공단 공장 2000평을 팔았어요. 평당 200만원을 받았어요.(지금은 평당 500만원쯤 된다고 한다) 그 돈하고 공장설비 판 돈을 합쳤습니다.”
멀쩡하던 공장을 팔아요? “학교 지으려고요. 서른 살 때부터 일생의 꿈이었거든요. 공장은 김포에 있던 목욕탕 주차장 자리로 옮겼어요.”
처음엔 100억원이면 땅 사고 건물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갑절이 들어갔다. 여기에다 김포시청에서 10억원, 경기도에서 40억원을 보조받았다. 김포외고는 외고로는 드물게 100% 기숙사 생활을 한다. ‘전병두 이사장’은 “기숙사가 두 동인데 이름이 세종관, 빌 게이츠관”이라고 자랑한다.
“생각보다 직원이 많이 필요하더군요. 교사 60명에 10여 명의 식당 직원이 있어야 해요. 내년엔 100명으로 늘어날 겁니다. 그러니까 200억원 투자해 100명 고용하는 기업입니다. 게다가 대학, 대학원까지 나온 고학력자 아닙니까. 영어 배우러 미국 가고, 필리핀 가는 세상인데 이 정도면 괜찮지요. 주제넘은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학교가 고급 인력을 고용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서비스업 아닌가 싶네요.”
왜 학교입니까? “어렵게 살았으니까요. 더 배우고 싶은 한이 있었으니까요.”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땄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은 더 깊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식한테 더 남겨주고 싶지 않은가요? “계산해 보니 그동안 모은 재산이 400억원 정도 되더군요. 내가 400억원을 자식들에게 남겨주고 죽는다고 해서 자식들이 잘 유지한다는 보장이 있나요? 그렇지 않지요. 다 까먹어. 먹고살 만큼만 줘야지요. 지난해 입학한 외고 학생들이 289명이에요. 내가 앞으로 20년 산다면 여기서 판검사도 나오고, 기업가도 나오고…. 좋잖아요. 1년에 300명씩, 게다가 외고면 영어회화도 다 잘해. 아무리 꼴찌 해도 영어는 잘하거든요. 이런 보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집안에서, 특히 부인께서 반대하지 않았나요? “그랬으면 이혼했지.”
그러고 보니 청계천에는 학교를 세운 기업가들이 많군요. 그것도 우연히 목욕탕 사업을 하신 분들이네요. “충청도 제천에 세명대를 세운 고(故) 권영우 회장님이 유명하지요. 그분은 버스 사업을 크게 했지만 처음엔 전농동에서 목욕탕을 했다고 들었어요. ‘복만탕’이라고 청계천 근처에서 목욕탕을 하던 분도 대전 인근에 학교를 세웠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과는 비교가 안 돼요. 기껏해야 조그만 고등학교 하나 세운 건데요.”
자녀는 어떻게 두셨어요. “삼남매입니다. 큰딸이 재단 이사로 가 있어요. 한 달에 200만원씩 받아요. 아버지가 밥 먹여주면서 200만원이면 충분하지. 둘째딸은 대학에 다니고,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튼튼’이에요, 전튼튼.”
아드님이 학교 다닐 때 주위에서 놀림 많이 당했겠네요? “(웃으며) 그랬지요. 그래도 군대에서 제대하더니 얘가 ‘이름’을 써먹더라고요. 인터넷에서 ‘튼튼공구’ 치면 아들이 만든 공구상이 나와요.”
전 사장의 아들인 튼튼(26)씨는 인터넷에 공구 쇼핑몰 만들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공구 업계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아들이 대견했는지 전 사장의 입가에 오랫동안 웃음이 맴돌았다.
휴일엔 뭐 하세요? “딴 데 안 가요. 그냥 산은 좋아하지요. 문수산, 관악산, 저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 고려산 가지요. 돈 안 들어가는 산 갑니다.”
주중에는 청계천에서 살다시피 하고 일요일엔 ‘공짜 산’에 가고…. 그럼 학교는 언제 가세요. “일요일 오후에 갑니다. 학교 가봐야 훈수 둘 입장 아닙니다. 골치 아픈 것만 가져와요. 요샌 건축 애로사항 해결해 달라는 얘기가 많아요. 이사회 열어도 돈 내는 거밖에 없더군요.(웃음) 이사장들 학교에서 돈 빼다 쓰고 감옥소 간다는 거 옛날 말입니다. 지금은 국물도 없어요. 10원도 못 가져와.”
학교는 언제? “일요일 오후에”
교사 선발에도 관여할 틈이 없단다. 가령 두 명의 영어교사를 선발한다면 2배수로 면접대상 올릴 때 “이력서 보고 찍는 것이 고작”이란다. “면접 보라도 하는데 그러려면 김포에 가야 하잖아요. 장사 안 하고 어떻게 가?”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청계천도 ‘중국 아저씨’들이 문제예요. 저가 공세에 공구 상가들이 당해낼 수가 없어요. 여기에 맞서 자존심을 지켜야지. 그 다음엔 여건이 좋아지면 계속 학교에 투자하고 싶어요. 전문대를 짓든, 유치원을 짓든 아이들 키우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10년 후에도 출근하실 거냐”는 마지막 질문에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와야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쳤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진 찍으려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새로운 ‘뉴스’가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김영준씨에게 “사장님이 정말 짠돌이냐”고 묻자 “여기에서 7년째 일하는데 한 번도 회식을 한 적이 없다”는 것 아닌가.
어떻게 삼겹살도 한 번 안 사주세요? “내가 짠돌이라고 했잖아. 지(제) 버릇 남 주나. 월급 밀리지 않으면 됐지.”
그때 옆에 있던 서명공구의 장응철 사장이 나와서 “오늘 한 번 쏘시지요”라며 한마디 보탠다. 전 사장은 이내 못 들은 척이다. 19년째 이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장 사장은 록스기계 출신이다. 장 사장은 “록스 출신 공구상 사장이 서른 명은 될 것”이라며 “청계천 공구상가에서는 ‘싸부’로 통한다”고 말한다. 6~7년 동안 회식 한 번 없어도 김씨가 록스기계를 지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사장님은) 멜빵바지에 난닝구로 통합니다. 아무리 더워도 땀 뻘뻘 흘리면서 직접 배달 다니는 분은 사장님밖에 없을 겁니다.”(장응철 사장)
머릿속에 ‘청계천의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제목이 떠오르는 순간, 왼쪽 머리 위로 ‘보복 폭행’ 물의로 한창 시끄러운 한화그룹의 본사 사옥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재 기자 [sangjai@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 8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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