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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온글>부처님은? 부처님오신날의 의미와 유래, 봉축의 의미

good해월 2007. 5. 23. 12:42
 

부처님은 누구인가?

2007년은 불기 2,551년

석가모니불부처님이라는 말은 붇다(Buddha) 곧 '깨달은 사람(覺者)'을 뜻한다.

또,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의 샤카무니 (Sakyamuni)는 산스크리트어이고, 한역으로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고 하며, 석가 또는 석존(釋尊), 불타(佛陀), 붓다 등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중인도 카필라국 성주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출생하면서 바로 사방으로 7보씩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 한다. 탄생한 지 7일 만에 어머니 마야를 잃고 이모인 마하파사파제에게 양육되었다.

어릴 때 이름은 고타마 싯달타이었고 점점 자라면서 과학 문학의 대요(大要)와 4베다를 배우며, 무예도 연마하여 숙달하였다. 선각왕의 딸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았으며, 29세에 왕성의 4문으로 다니면서 노인, 병든 이, 죽은 이, 수행승을 보고 출가할 뜻을 내어 하룻밤에 왕성을 넘어서 동방의 람마성(濫魔城) 밖 숲속에서 속복을 벗어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방으로 비야리, 마갈타를 지나다니면서 발가바와 아람가람, 울다라 등의 선인을 만나 6년 동안 고행을 한 끝에 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불타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크게 깨달아 불타(佛陀)가 되었다. 그 때 나이는 35세였다.

이로부터 스스로 깨달은 교법을 널리 퍼뜨리려고 먼저 녹야원에 가서 아약교진여 등 5인을 교화하고 다음에 3가섭, 사리 불, 목건련 등을 제도하여 교단을 조직하였다. 깨달은 뒤 3년(혹은 6년)에 가비라 벌솔도에 돌아가서 부왕을 뵙고 친척들을 교화시켰다. 한편 여러 나라로 다니면서 빈비사라, 아사세, 파사익왕을 교화하여 불교에 귀의시키고 북방의 쿠시나가라성 밖 발제하(跋提河) 언덕 사라쌍수 아래에 누워 최후의 교계(敎誡)를 하시어, 45년 동안의 전법생활을 마치고 밤중에 열반에 드셨다. 그 때가 세수 80세였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

석가모니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나무 아래서 탄생하셨다.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난 뒤, 두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사자후를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 존귀하다.

세계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외침은 장차 고통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선언, 즉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눈먼 중생들을 위하여 걸림 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부처님의 이러한 선언은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6년간의 고행 끝에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을 설함으로서 시작하였고, 이후 45년 동안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중생들을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인도하셨다.

부처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어 '붓다'(Buddha)를 따서 만들었으며,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깨달음이란 단순한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며, 부처님이 체험을 통하여 증득한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신 그 가르침 또한 배워서 알아야 하는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그 가르침을 믿고, 그에 따라 실천 수행해야 한다. 깊고 참된 진리를 깨달은 이는 마침내 생사의 괴로움이 완전히 없어진, 불교 최고의 이상인 열반(涅槃)을 성취한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로 내려 오셨다. 그 분이 나신 곳은 호화찬란한 궁궐이 아니라 길가의 동산 위다.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가신 우리 스승의 탄생은 그 자체가 중생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2천만 불자들은 부처님의 탄생을 경배하는 것은 물론 "참 나"를 찾겠다는 분발심을 내고 부처님의 중생구제 원력을 세워 실천하도록 해야 하겠다. 중생의 병의 종류에 맞춰 약을 주셨던 부처님과 같이 우리 불자들은 이 시대의 중생의 고통에 맞게 처방을 해 주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빈부격차와 정신적 혼돈, 그리고 분단이라는 굴레 속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종교적 갈등과 이념의 대립으로 고귀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 또한 우리 불자가 이 시대에 처방해야 할 과제들인 것이다.

출처-연등축제 홈페이지url-http://www.llf.or.kr/<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부처님오신 날의 유래


이 날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 하여 불탄일(佛誕日) 또는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하나, 민간 에서는 흔히 초파일이라고 한다. 석가의 탄생일이기 때문에 원래는 불가(佛家)에서 하던 축의행사 (祝儀行事)였으나 불교가 민중 속에 전파됨에 따라서 불교 의식도 차츰 민속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신라는 여러 가지 불교 행사가 성했는데,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이 불교를 호국(護國)의 바탕으로 참여시키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불교행사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세시행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병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의 팔관회(八關會)는 불교행사가 신라의 세시풍속으로 승화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월 초파일은 불도의 행사가 신라의 호국불교로 승화된 이래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조에 이르는 동안 우리의 민속과 동화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와 고구려 본기에는 불도의 행사가 세시의 행사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신라본기에서는 석가모니 탄생일을 팔관회로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고려사 (高麗史)》에 따르면, 왕성(王城)에서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월 대보름에는 14일, 15일 이틀간 을 저녁에는 연등(燃燈)을 하던 풍속이 있었으나 최이(崔怡)가 4월 8일로 옮겨서 하게 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사월 초파일은, 불교의 축의행사로 전래되었다가 민간의 세시풍속과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신라의 팔관회, 고려의 연등회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국립민속박물관 url-http://www.nfm.go.kr/main.jsp<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부처님 오신 날에서 '봉축'의 의미


봉축(奉祝)에서의 봉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捧 이라고 하여서 '받들 봉'자의 한자어이며, 두 번째는 逢 이라고 하여서 '맞이할 봉'자의 한자어입니다.

두 한자어가 의미하듯이 축이라는 한자어와 함께 '받들어 섬기다'의 의미와 '맞이하여 섬기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따라서 '봉축 부처님오신 날'은 ‘부처님 오심을 마음속 깊이 받들어 섬기다’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처-마니주 홈페이지url-http://manijoo.com/<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봉축 법요식

  음력 4월8일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다. 이날은 전국의 사찰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며 법요식을 봉행한다.

  초파일 오전 10시면 전국의 사찰에서 28번의 타종과 함께 의식이 시작되고 큰스님을 모셔 법문을 청한다. 법요식 중 욕불의식이 있는데 부처님이 탄생하신 것을 축복하여 향탕수로 목욕시키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아기 부처님이 탄생하셨을 때 아홉마리 용이 공중에서 향기로운 물을 솟아나게 하여 신체를 목욕 시켰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 날은 부처님전에 등을 밝히는데, 인간과 더불어 모든 생명의 존엄성을 선언하시고 온 세상의 고통을 구원하고자 서원하신 부처님의 높은 뜻을 기리며 사바세계에 나투신 크나큰 인연을 경축하는 의미이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 변천사


고려부터 현재까지 “불국정토 서원”

고려 연등회 집집마다 등 밝혀

1975년 공휴일 제정 ‘국민축제로’


● 연등축제의 기원


초파일이면 등을 밝히는 풍속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연등회’란 이름으로 집집마다 등을 밝힌 때는 고려시대부터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통해 팔관회와 연등회로 대표되는 불교의식을 널리 행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 때부터 성행했던 연등회·팔관회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2대 명절로 정착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관 중심의 연등행사는 중지되었으나 민가에서는 관등놀이, 호기놀이(呼旗; 등불을 밝힐 재료를 구하기 위해 아이들이 깃발을 만들어 쌀이나 돈을 구하는 놀이), 불꽃놀이 등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민속행사로 전래되었다.

해방 전의 초파일


봉축 기록상에 보이는 최초의 초파일 봉축행사는 1911년 서울 각황사에서 8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대규모 연등회는 1914년 음력 4월 15일 해인사에서 2만 연등회로 열렸다. 1921년 정부는 석가탄신일을 명절로 기념함은 물론 ‘관등날’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렀다. 1927년에는 불교중앙교무원이 종단차원에서 처음 법요식을 거행했다. 1938년 ‘석존강탄기념 봉축회’가 총독부의 방침으로, 양력 4월8일에 초파일 법회를 개최했다. 노방전도(路傍傳導) 즉, 거리 행사는 1939년 불타제전봉행회 주최로 열린 불타탄생 봉축식에 이어, 종로 탑골공원에서 처음 열렸다.


장엄물과 문화행사


연등 이외의 화려한 장엄물은 1925년 표충사에서 처음 등장했다. 표충사는 이 때 1천 등을 밝히고 탑 학 거북이 륜선(輪船) 백로 비행기 등 다양한 형태의 장엄등을 선보였다. 1959년에는 서울 종로-을지로-광화문에서 제등행진과 함께 코끼리 장엄물이 처음 등장해 일반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79년부터 전국 각지로 제등행렬이 확산되면서, 각종 장엄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서울시가 4·8 봉축탑을 처음으로 건립해 봉축탑 점등의 효시가 되었다. 한편 조선불교청년총동맹과 경성동맹은 1932년 석존성탄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강연 및 ‘아란과 마등가’ 등 연극 공연 등 문화행사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이어 경성제국대학 불교청년회가 1934년 조선불교 전적전람회를, 조선불교중앙교무원과 나남관북불교회는 1936년 연극과 동극대회를 잇달아 개최했다.


● 부처님오신 날 공휴일 제정


조계종은 1968년 4월 초파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명칭을 통일했다. 1969년 2월에는 불교 13개 종파가 대표자회의를 열어 4·8 공휴제정운동을 결의했다. 이윽고 1975년 1월 14일에는 부처님오신 날이 드디어 공휴일로 제정됐다. 공휴일이 된 첫 부처님오신 날인 5월18일을 기념하기 위해 불교예술대전이 11일부터 부처님 오신 날까지 개최됐다. 1981년 5월11일 부처님오신 날에는 국무회의에서 통금을 해제하기로 결정했으며, 모범재소자 587명을 특별 가석방했다.


초파일 전후 훼불사건들


1989년 부처님오신 날은 봉축 제등행렬이 무장경찰에 의해 유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불교계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조계사에서 경찰 폭력 만행 규탄 및 불교자주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1991년에도 여의도에서 시작된 제등행진 때 비구니 스님과 어린이들의 행렬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는 만행을 저질러, 5월 20일 최루탄 발사 규탄 시위가 열렸다. 이어 24일에는 제등행렬 최루탄 발포에 대한 시경국장의 사과가 있었으나, 25일에는 불교탄압 규탄 범불교도대회가 조계사에서 열렸다. 1996년에는 부처님오신 날을 전후해 서울 삼성암, 본원정사, 화계사 등에서 잇따라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진해 청룡사에 목사가 난입해 불상과 탱화를 파괴하는 등 훼불행위가 계속되어 1천만 불자를 경악케 했다.


종단분규 때의 봉축


1955년 비구·대처승간의 분규로 비구측 선학원과 대처측 총무원이 분리되어 봉축 법요식을 따로 봉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총무원 측은 창경원에서 석가세존 탄신일을 축복했고, 선학원은 조계사에서 불전 예식을 거행했다. 1960년 5월3일 4.19사태로 비구·대처승간에 분규가 재연된 스산한 분위기속에서 해마다 거행되어온 관등행렬 등 옥외행사는 계엄령 관계로 모두 중지됐다. 당시 380만 명에 달하는 신도들은 재연된 불교계의 분쟁이 가라앉길 기원했다. 1979년에는 분규를 겪던 조계종이 조계사 및 개운사에서 각각 별도의 봉축 법요식을 개최해 망신을 샀다. 1980년 5월 21일의 불탄일 범불교연합 봉축행사는 조계종 분규로 취소되기도 했다.


시민과 함께 하는 축제


범종단 차원의 제등행진은 1982년 처음 벌어져, 18개 종단 20만여 불자가 참여하는 제등행렬이 장관을 이뤘다. 이어 1984년 18개 종단 대표가 참가해 ‘나라와 국가원수를 위한 축원법회’를 봉행했다. 1993년 부처님오신 날부터는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행사가 활기차게 펼쳐졌다. ‘화엄경 선재동자’ ‘탈속’ ‘사모곡’ 등 불교연극을 비롯해 전시 강연 국악공연 등이 열렸으며, 여의도에서 열리던 봉축대법회 및 제등행렬이 동대문운동장으로 옮겨져 개최됐다. 1995년 다시 여의도에서 부처님오신 날 봉축 제등행렬 및 대법회를 봉행했으며, 5월 5일 조계사에서는 첫 외국인 노동자 초청법회를 봉행했다. 1996년 제등행진이 다시 동대문운동장으로 옮겨졌고 조계사까지 이어지는 종로통 곳곳에서 거리 연등축제를 시민축제로 열고 있다. 96년부터 봉축행사는 불교계만의 단순한 제등행진과 기원법회라는 의례적인 행사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참여하는 연등축제로 전환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김재경기자 ⓒ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