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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 세대를 풍미한 인물들이 만난 이산에 거는 기대

good해월 2008. 5. 15. 08:47
한 세대를 풍미한 인물들이 만난 이산에 거는 기대


금주부터 이산에 등장하는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과 이산 정조와의 만남은 화성(華城)이라는 시대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화성은 정조 일생일대의 커다란 업적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이제원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여, 1783년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을 하였으니, 22살에 급제를 한 셈이다. 그러나 바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아니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으니, 이때의 나이는 이미 27세 때였다.


이산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부터 재미있게 그려진 드라마 이산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주며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3일 정약용이 실학자 박제가, 유득공 등과 만난다. 규장각 검서관인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은 정약용과 만난 자리에서 신참 신고식을 갖는 장면이 재미있다. 정약용으로 나오는 송창의의 표정 하나하나가, 참 오랜만에 웃음을 주는 연기였다는 평이다.


그러나 내가 이들의 만남에 기대를 거는 것은 드라마적 요소가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익히 알고 있듯, 목민심사와 『경세유표(經世遺表)』, 그리고 한 사람의 백성도 소홀히 할 수 없어,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는 목민심서, 그리고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한 『흠흠신서(欽欽新書)』등을 저술했다.


 

 

다산 정약용 유적지에 있는 정약용선생 상과 거중기의 축소모형


박제가는 아직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있지만, 시, 그림, 글씨 등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 1776년에는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그 명성을 청에까지 떨쳤다. 특히 박제가의 글씨는 추사체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을 할 정도이며, 인물화, 산수화 등도 생동감이 넘쳤다고 한다. 박제가의 유작으로 〈목우도(牧牛圖)〉〈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어락도(魚樂圖)〉등이 전하며, 저서로는 『북학의』외에 『정유집』『정유시고』『명농초고(明農草藁)』 등이 있다.


유득공은 정조 3년에 규장각 검서가 되었으며, 이덕무·박제가·서이수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유득공은 발해사를 최초로 체계화시키고, 우리 역사 속에 발해를 집어넣었다,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을 벗어나, 고구려의 옛 땅인 만주와 요동을 포함시켜 민족사의 무대로 다루는 사고를 지녔다. 유득공은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주체의식을 확고히 하였다. 아마 정조의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유득공의 저서로는 『영재집』『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盎葉記)』『사군지(四郡志)』 등이 있다. 하지만 유득공의 저서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조선시대 서울의 생활과 풍속을 전하고 있는 민속학 연구의 필독서인 『경도잡지(京都雜志)』이다.


정조는 통공정치의 일환으로 도성 밖으로 자주 행차를 하여 사영상인들과 접촉을 가졌다. 당시 도성 일대의 사회 변동으로 벽파와 시정상인들, 그리고 정조의 힘겨루기가 진행된다. 이산이 직접 나서 분쟁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금의 절대권위를 필요로 한 정조는, 화성의 축조와, 막강한 전력을 배경으로 한 장용영(壯勇營)의 설치로 나타났다.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은 임금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비책이었다.

 

이산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은 그래서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앞으로 더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박제가와 유득공 등의 활약이 기대된다. 드라마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산에 거는 기대는, 별 볼일 없는 지금에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기 때문이다.(참조/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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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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