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으로행복

[스크랩] <님은먼곳에> 사랑엔 두려움이 없나니..

good해월 2008. 8. 30. 09:43

 

<님은먼곳에> 영화포스터 갈무리

 

이준익 감독의 <님은먼곳에>가 마침내 개봉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대했던 작품이기도 했는데, 막상 두껑을 열고보니 과연 이준익 감독의 색깔이 분명히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장 먼저 받았습니다. 물론 이 평가도 개인적인 것입니다만, 이 감독은 기존의 가치관에 대해 우리가 당연히 수용하던 것들을 과감하게 탈피시키는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그의 처녀작은 지난 1993년 '키드캅' 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백화점 금고털이범을 직접 잡는다는 내용인데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황산벌'에서는 그야말로 계백과 김유신 이라는 최고 장수들의 사투리 버전의 실상을, 그리고 이어지는 '왕의남자'에서는 폭군 연산군의 동성애라는 충격적인 면을, '라디오스타' 에서도 잊혀져간 과거의 가수를 현대 무대로 올리면서 상업에 물든 오늘날의 연예계를 후벼 파고 있고, '즐거운인생' 에서도 이미 꿈을 접고 퇴물이 돼 버린 아버지들의 새로운 도전을, 그리고 이번의 '님은먼곳에' 까지..

 

한마디로 과거를 들추어 현재를 반추하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님은먼곳에>에서도 역시 우리 기억에는 잊혀져버린 '월남전쟁'을 한 여인의 눈으로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영화.. "과연 진정한 평화는 무엇인가"

 

이준익 감독이 왜 굳이 '월남전'을 배경으로 했을까요. 이 문제는 관객들에게 철학적인 물음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즉, 장면중에 베트남 공산군(일명 베트콩)의 아지트에 잡혀간 써니 일행이 해명을 합니다. 정만(정진영 분)은 자신들은 돈 벌러 왔다면서 "한국군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왔다" 고 말하고, 공산군 우두머리는 되묻습니다. "평화가 뭐냐" 고..

 

이준익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과연 베트콩들이 평화를 깨트린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지키려고 전쟁을 일으킨 연합군이 평화를 깨트린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이 감독의 말처럼 전쟁은 남자들의 싸움일때 비로소 '적군'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여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 쪽 이나 저 쪽이나' 다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전쟁당시에도 많은 연합군들에 의해서 식량이 약탈당하고 부녀자들이 강간을 당하고, 심지어 양민 학살까지 당했던 사실을 보면 그야말로 '전쟁'은 남자들이 만든 '이데올로기 놀음'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더 나아가 "과연 미국식 평화는 또 무엇인가" 를 묻습니다. 월남전은 미국의 내정간섭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미국 최초로 패배했던 전쟁입니다. 아울러 이 전쟁때 밀림을 손쉽게 없애기 위해 미국이 뿌렸던 2, 4-D 제초제는 오늘날 '고엽제'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과연 미국은 평화를 원했는가, 무엇이 평화인가, 그리고 그 평화전쟁에 희생된 병사들과 민간인들은 무엇을 남겼는가" 라고 말입니다. 

 

내용은 너무 단순하고 의미는 너무 깊고..

 

이번엔 영화 자체에 대해 평가해야겠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큰 장점은 앞서 언급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 난해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한 여인이 그 남편이 떠난 월남을 찾아가서 따귀를 다섯 대 때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냥은 못 가니 '위문공연단' 에, 그것도 실력이 안돼서 뇌물을 써서 들어갑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그러나 이 단순함에서 뽑아내는 이준익 감독의 메타포가 놀랍습니다.

"니 내를 사랑하나?" 자기를 면회 온 상길(엄태웅)이 순이(수애)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아마도 상길이는 순이의 소극적인 사랑에 지쳐가고 있었나 봅니다. 숨겨놓은 애인은 결정을 내리라며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독촉을 받는데, 눈치없는 마누라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술이나 따라주고 있고, 꼬박꼬박 면회는 빠지지 않습니다.

 

결국 상길은 이 모든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통첩을 하는데, 그게 바로 "니 내를 사랑하나"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에게 "예, 사랑합니더" 라는 말은 쑥스러워서라도 못할 여자니까요.  그게 바로 순이였습니다. 그저 속으로만 순종하며 지아비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으로 아내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학물을 먹고 신식교육을 받으며, 서울에 애인까지 두고 있는 상길이는 그런 순이가 너무도 한심스럽고 미련해 보였으며, 더나아가 마음이 떠나는 자신을 발견한 채 전쟁터로 떠나며 운명에 맡겨버립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수없이 되뇌이는 순이의 노래, 김추자의 '님은먼곳에' 라는 노래의 내용입니다.  이 노래는 순이의 마음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상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떠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상길이를 '사랑' 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단 한 마디 "사랑합니더" 라는 대답을 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며, 용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 때 "예 사랑합니더" 라고 말이라도 했더라면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고, 결국 순이는 '위문공연'단에 합류해서 월남으로 떠납니다.

 

돈이 목적인 위문공연단에서 순이의 목표는 오직 남편 상길이를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무슨 <라이언일병구하기>처럼 집으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직접 만나서 할 말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차마 못했던 한 마디...

 

사랑..남자에겐 핑계였지만 여자에겐 전부였습니다

 

상길이에게 있어서의 사랑은 핑계였습니다. 그래서 면회 온 순이에게 "니 내 사랑하나?... 니 사랑이 뭔지 아나? ... 니 이제 오지마라" 며 매몰차게 돌아누워버립니다. 그는 이미 사랑하는 애인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사랑'과 '열정'을 혼돈하는 데서 오는 착각이겠지요.

 

"말없이 자신의 곁을 지켜온 아내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다니, 그걸 꼭 말로 해야하나? "

이 질문은 대개 무뚝뚝한 남편이 부인에게 하는 얘기지요.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남편들도 애인이 생기면 온갖 닭살멘트를 남발합니다. 즉 사랑은 식어가고 느낌은 사라지는데 이놈의 마누라는 지치지도 않나? 먹고살기 바쁜데 왜 자꾸 확인하고 난리야  라는 표현이 아닐까요.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정 반대입니다. 그걸 이준익 감독이 보여주려고 했나봅니다.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그 사랑을 직접 보여줍니다. 그리고 증명해 줍니다.  순이가 그랬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편지가 아닌 몸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게 여자의 사랑이니까요. 요즘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월남전 당시면 1968년 부터 1970년대 초의 상황이면 지고지순한 사랑이 존재하던 시절이니까요.

 

 그랬습니다. 사랑 앞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뜬금없지만 성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나니" (요한일서 4장 18절). 두려움을 이긴 순이의 사랑 앞에 춤을 추는것이나 옷을 벗는 것이나 죽음이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 여인은 '사랑'을 핑계로 떠나버린 남편을 직접 찾아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 뿐이었습니다. 남편을 구출하러 간 것도 아니었고, 돈을 벌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남편의 눈 앞에서 하지 못했던 단 한 마디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녀가 몸과 바꾸고, 목숨과 바꿔서라도 증명해야 했던 가장 고귀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영화는 현대의 참을수 없이 가벼운 '사랑방정식'에 경종을 울립니다. 쾌락과 환락, 찰라적인 만남과 하룻밤 즐기기위해 감히 '사랑' 이라는 말을 지껄이지말라는 일종의 경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해 보라고 합니다.

 

"당신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순이처럼 할 수 있습니까?"

출처 : 진민용의 시사 놀이터
글쓴이 : 진민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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