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보야”…평생 ‘아래’에서 살다간 선지자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
“나는 바보야”…평생 ‘아래’에서 살다간 선지자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 “나는 바보야”…평생 ‘아래’에서 살다간 선지자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
활짝 웃는 김수환 추기경
2009-02-16 21:44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환하게 웃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
2009.2.16
김병만
김수환 추기경, 그 '낮은 삶'을 돌아보다
노컷뉴스
2009.02.16 19:09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 12분경 향년 87세의 나이로 선종(善終)했다.
지난 2008년 10월 4일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한 김 추기경은 그동안 노환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선종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 요셉은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김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자 모친인 서중하 마르티나는 옹기와 포목행상을 하며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김 추기경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가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 길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을 명령을 받고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 유학길에 오른다.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휴학했던 김 추기경은 해방 이후인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68년 5월29일 대주교 승품된 그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됐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당시 주교였던 김 추기경은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에 나선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과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큰 버팀목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김수환 추기경이 종교를 넘어 이 땅의 버팀목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더 낮는 자리에 있는 이들을 한 없이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참조=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maxpress@cbs.co.kr “나는 바보야”…평생 ‘아래’에서 살다간 선지자<김수환 추기경의 일생>
헤럴드경제
2009.02.16 18:39
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선지자(先知者)로 살았던
김수환 추기경. 그는 지난해 8월 우리 앞에 뜻밖의 그림을 내놓았다. 당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
동성중고교 개교 100주년'전에 추기경은 직접 그린 자화상 '바보야'를 출품해 화제를 모았다. 노년에 이르러 스스로를 '바보'라 칭한 추기경의 소탈함에 모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당시 김 추기경은 자화상에 대해 "내가 잘 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 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어이쿠.. 그러니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몰라요."
동그란 얼굴에 눈, 코, 입을 쓰윽쓰윽 단순하게 그린 후, 많고 많은 글귀 다 마다하고 '바보야'라는 세글자를 써넣은 이유를 묻자 추기경은 "글쎄요, 그림을 보고 '아이고 미련스럽다. 이걸 무슨 작품이라고 내놨나'할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어때요? 나 바보같이 안 보여요?"라고 되물었다.
또 "어떻게 사는 게 괜찮은 삶이냐"는 질문에는 "그거야 누구나 아는 얘기 아닌가"라고 주저없이 답했다.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알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해요. 그걸 실천하는 게 괜찮은 삶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세간에 큰 화제를 뿌렸던 김 추기경의 그림 '바보야'는 추기경이 혜화동 주교관서 하루 만에 그린 것이다. 김 추기경은 1941년, 동성중?고교의 전신인 동성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인연으로 기념전에 참여했다. 당시 추기경은 건강상태가 나빴음에도 후배들이 정성스레 마련한 전시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1922년 독실한 가톨릭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1951년
사제서품을 받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됐던 김추기경. 그동안 시대를 꿰뚫으며 주옥같은 말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주었던 그는 그림으로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것. 스스로를 꼭 빼닮은 순수한 그림들은 보는 이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었다.
당시 추기경은 드로잉 14점과 평소 아끼던 글을 쓴 판화 7점을 내놨다. 모두 직접 그린 작품이다. 그림을 받았던 후배 한진만 홍익대 교수(화가)는 "추기경님은 연로하셔서 그림을 그릴 때 유성파스텔을 오래 못 들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중간중간 팔을 주물러드렸는데 몸은 불편하셔도 정신은 얼마나 맑으셨는지 모르세요. 유머감각도 뛰어나시고요"라고 했다.
추기경은 문화사랑도 남달랐다.
숭례문이 화재로 붕괴됐을 때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TV화면을 지켜본 그는 "너무나 통탄할 일입니다. 국보에는 얼마나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풍요하든, 그렇지 못하든 선조의 얼이 담긴 유산은 내 집 물건보다 더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국민의 문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문화적 안목 또한 높아져야 합니다"고 지적했다.
추기경은 틈 날 때마다 어머니 서중하(1955년 작고)여사를 떠올리곤 했다. 어머니는 당신 이름 석자와 하늘 천(天), 따 지(地)밖에 몰랐지만 추기경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어머니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추기경의 어머니는 평생 옹기와 포목을 팔고다니며 아들 둘을 성직자로 만들었다. 김 추기경이 참으로 험난했던 시절 독재정권에 맞서 올곧은 소리를 당당히 낼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강인함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무릎에 기대 영면한 어머니를 회고하며 "어머니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다 받아주시고, 어떤 허물과 용서도 다 덮어주셨다"고 했다. 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추기경은 가난하고 못 배운 어머니에게 자신이 늘 미치지 못했음을 이처럼 고백하곤 했다. 지상(地上)에서건 천상(天上)에서건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결코 마르지 않듯 김추기경 역시 우리 겨레를 위해 오늘도 천상에서 기도를 올리고 계실 것임에 틀림없다.
이영란 기자/
yrlee@heraldm.com
<김 추기경 선종 순간에도 "고맙다">
[연합뉴스] 2009년 02월 16일(월) 오후 07:08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하고 큰 고통없이 영면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마지막까지도 큰 고통 없이 영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주치의였던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추기경께서는 노환에 따른 폐렴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했다"면서 "선종때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추기경께서는 평소 늘 하시던 말씀대로 임종을 지켜본 교구청 관계자들과 의료진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고 덧붙였다.
고 김 추기경은 지난해 7월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 뒤 한때 호흡 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면서 위중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생명에 지장을 줄 만큼 크게 위중하지는 않았었다는 게 의료진의 설명이다.
특히 김 추기경은 선종 순간까지도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 호흡하고, 말을 건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폐렴에 따른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고 의료진은 덧붙였다.
폐렴은 면역력이 강한 젊은 층에는 상대적으로 발병률이 낮으며, 설사 걸린다 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치유될 수 있다. 하지만 평소 활동량이 적은 노인이나 과거에 결핵이나 폐렴을 앓았던 사람, 또는 지병으로 면역력이 약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치명적이며 감염확률 또한 급격히 높아진다.
bio@yna.co.krhttp://blog.yonhapnews.co.kr/scoopkim김수환 추기경과 테레사 수녀
연합뉴스
2009.02.16 19:09
(서울=연합뉴스)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께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ㆍ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 향년 87세. 사진은 테레사 수녀를 안내하고 있는 김추기경. 2006.2.16
“나는 바보야”…평생 ‘아래’에서 살다간 선지자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 출처 : 소디프 신소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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