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도, 이렇게 제작했다.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지도를 꼽으라면 대부분 대동여지도를 꼽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지도인 8도총도를 비롯해,
실학자 정상기가 제작한 동국지도등 꾀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긴 하지만,
그 정확성과 세밀함은 물론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 대동여지도가 단연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수많은 지도는 과연 어떻게 그려졌을까?
우리는 어렸을 때 한번쯤은 위인전을 통해 김정호가 개나리 보짐하나를 둘러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그리는 장면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눈대중과 일정하지도 않는 보폭을 기준으로 과연 그렇게 정밀한 지도를 그려 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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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만해도 지도의 개념은 상당히 관념적이어서, 여기 저기서 수집한 지리적 정보만을 가지고 대략하여 그렸다. 한마디로 실측하지 않다보니 지도의 왜곡이 심하고 대체적인 윤곽만이 강조된 지도가 그려졌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8도 총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하지만 조선후기 들어서면서 실학이 발전하고 그에따라,
실측에 의한 보다 정확한 축척의 지도가 그려지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1752년 실학자 정상기에 의해 제작된 동국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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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는 제척(梯尺)의 형태인 백리척을 사용하여 그린 대전도로서, 당시로서는 대축척지도인 약 1 : 42만 지도이다.
정상기는 백리를 일척으로 십리를 일촌으로 하는 백리척축적을 창안하여 이 같은 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르면 숙종시기부터 영조임금(1678~1752)사이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는 실학이 최전성을 이루던 정조임금 원년에 완성되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 제작으로 인해, 우리나라 지도제작은 일대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이 지도를 바탕으로 정조임금 때에는 아국총도, 조선팔도지도 등이 그려?으며, 이 지도의 단점인 섬이나 팔도에 대한 표시가 좀더 상세해지고 분명해 져 갔다.
즉 이 지도는 관념도에서 실측도로 전환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
그리고 이렇게 정밀한 지도제작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조선시대 반자동 측량기구라 할 수 있는 기리고차 (記里鼓車)차에 의해서였다. 기리고차란 거리를 측정하던 수레로 중국에선 진(晉)나라 때부터 사용되었다고 전하는데
《송사(宋史)》에는 둘레가 18자인 바퀴가 돌 때마다 그 회전수가 톱니바퀴[齒車(치차)]에 나타난
거리를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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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선 1441년(세종 23) 왕과 왕비가 온수현(溫水縣;지금의 溫陽)의 온천에 가던 도중, 가마골에서 사냥하는 구경을 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말이 끄는 초거를 탔는데, 그 수레가 바로 거리를 잴 수 있게 만든 거리계차, 즉 기리고차였다 한다.
이 수레가 처음 제작되었을 때는 단순히 톱니바퀴의 원리에 따라 1리를 가면 한번 종이 울리는 정도였다. 하지만 계조를 거듭하면서 반리를 가면 한번치고 1리를 가면 두번치며 5리를 가면 큰 북이 울리고 10리를 가면 북이 여러번 울리게 된다.
따라서 지도제작자, 혹은 측량자는 수레위에 앉아서도 종과 북소리만으로 거리를 측정 할 수 있게 된다. |
위의 그림과 같은 정밀한 기리고차는 조선시대의 개발품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대폭 개선된 것으로 중국은 물론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나 이를 능가할만한
측량기구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동시대에 만들어진 유럽의 측량기구와 비교해 보아도
조선이 개발한 기리고차가 얼마나 정밀하고 뛰어난 기구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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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g.blog.yahoo.co.kr/ybi/1/9a/3d/shim4ro/folder/3/img_3_2163_6?1201611920.jpg)
기리고차로 경도 1도를 측정하면 108km가 나오는데,
이는 현재값 110.95km 와 비교해도 표본오차가 3%미만이 매우 정밀한 것이었다.
위의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 지도측량기술이 얼마나 우수한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구는 휴대가 불가능하고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해안이나 산간지방처럼 수레를 사용하기 힘든지역에서는 운영이 더욱 힘들다. 그리고 이럴 때 쓰는 것이 마를 엮어 만든 간승 (間繩) 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모내기 할 때 일정한 간격으로 표시하여 줄을 띠우는 노줄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줄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밖에 대나무 자인 竹尺(죽척)등도 보다 정밀한 거리측량이나 지도제작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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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초기작 청구도역시 실측도라기 보다는, 그동안 조선시대 전해내려오던 각종지도와 지리서를 참고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지도는 순수한 의미의 지도와, 각 고을의 특징을 적어놓은 지리의 개념이 혼합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정호는 여기서 만족치 않고 실제 측량한 지도를 제작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대동여지도였다. 즉 대동여지도는 실측도였던 만큼 청구도에서 부족하였던 지도적인 측면을 보다 섬세하고 정확하며 간편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하게 만들수 있었다. 뒤이어 지리서인 대동지지를 따로 편찬하여 청구도의 地志(지지)적인 면을 더욱 확대하고 보충하였다.
그런면에서 볼 때 김정호는 단순한 지도제작가를 넘어 종합적인 지리학자였다. 그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역대 지리적 문헌을 모조리 섭렵한후, 자기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이론과 수법을 지도에 적용하였다.
그 결과 대동여지도에서는 마치 한국화를 보는듯한 필체로, 산맥과 하천이 그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도로망은 그물을 친것처럼 종횡으로 전개되고, 그 위에 십리 간격의 이정점을 더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멀고 가까운 곳을 쉽사리 알게 하였으며, 보는 동안 실제로 산천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였다.
이렇게 대동여지도는 조선이 보유하고 있던 우수한 장비와, 축척된 지도제작 기술, 여기에 김정호의 혼신에 담긴 열정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간혹 위인전기나 잘못된 상식으로 김정호가 대원군에 의해 지도를 너무 상세히 제작하여 우리나라 기밀을 유출하려 하였다는 의혹을 받고 결국 죽음을 당한것으로 인식되기도 하나,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일제가 조작해낸 루머에 불과하다. 오히려 김정호는 대원군 시절 병조판서 직책을 지냈던 신헌에게 지원을 받아가며 우리나라의 지도를 완성하였다.
우리국토를 보다 정확하고 보자 자세히 알고자 하였던 마음은 저 멀리 최고위층인 대원군에서부터, 변변한 벼슬조차 하지 못했지만 지도제작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도 강렬하였던 김정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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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는 도면의 첫 머리에 표시된 축척 방안을 현대식 축척으로 환산하면
1:162,000이며 이를 기초로 거리, 방위, 면적을 측정 할 수 있다.
지표의 정보를 통일적인 기호 체계에 따라 표시하여 산악과 산맥은 소박한 회화식 기호를 사용하였으며,
산의 형태, 산정의 모양, 하천, 호수, 항만 등을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행정구역의 경계, 문화유적, 군사시설, 교통 등은 근대식 방법으로 도식화 하였으며
22개의 첩본으로 이루어져 휴대하기에 편리하다. 동시대에 제작된
프랑스지도의 표준 오차율이 8%에 비해 대동여지도는 5%이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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