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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삼일절은 1919년 3월 l일, 우리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린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국경일로 공포되었다.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 또는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펴는 한편,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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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우리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였다. 이로써 정치·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 갔고 더욱이 미국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를 위해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이 기회를 이용한 지식인·종교인들이 불길을 댕기자 항일민족운동은 삽시간에 거족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비록 많은 희생자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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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삼일운동은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 및 삼일운동의 꽃이라 불리는 유관순열사, 그리고 200여 만명의 시민이 참가 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사망 7,500여 명, 부상 1만 6,000여 명, 투옥 4만 6,000여 명의 희생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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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조선 태조 1) 7월에 제정된 관계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도습하여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다(1420). 그 직제는 겸관(兼官)으로 영전사(領殿事:정1품) 2명, 대제학(大提學:정2품) 2명, 제학(提學:종2품) 2명을 두었으나 실제로 직무를 집행한 것은 녹관(祿官)인 전임직이었다. 그 인원은 처음에 10명이었으나 점차 증원되어 36년(세종 18)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세종은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전적(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는 한편, 재주 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었다. 이로써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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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여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임무는 ① 학사 20명 중에서 10명이 경연(經筵)을, 다른 10명은 서연(書筵)을 담당하였고, ②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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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유로 그들 중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으며, ③ 사령(辭令)의 제찬(制撰)을 담당하는 한편, ④ 중국 고제(古制)에 대하여 연구하는 일 등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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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반드시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착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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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했던 한 공무원이 직장을 상대로 제기한 성차별 소송에서 승소했다. 매튜 톰슨은 자신의 직장인 맨체스터 구직사무소의 동료 여직원들은 자신과 같은 복장을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내복장규정은 인권을 침해한다고 말했다. 톰슨은 "여직원들에게는 티셔츠나 축구유니폼 상의를 입는 것이 허용되는 반면, 나는 반드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착용하도록 규정하고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은 행정직원이기때문에 고객들을 만나러 구직민원센터에 가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영국 PA 통신은 톰슨이 맨체스터 노동법원의 판결을 통보 받고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여성에게는 기대되지 않는 기준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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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다는 것은 한 남성으로서, 나에게는 차별이다." 그의 고용주인 노동연금부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 "실망스럽다"며,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톰슨(32세)은 자신의 인권이 침해 당했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정신적 피해배상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피해배상 명령이 내려질 지에 대한 즉각적인 판정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피해배상에 대한 판정은 근무 중 와이셔츠와 정장차림을 해야 하는 것이 성차별이라고 주장했던 엑세터 교도소의 교도보안직원의 사례를 포함한 기타 유사사례의 판정과 반대되는 것이다. 지난주 노동법원에서는 교도보안직원인 마크 칼디코트(34세)의 경우에는 차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정을 내린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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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이름이 무척 아름다운 이 굴은 제주도의 용암동굴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동굴이다. 우선 이름자체가 평평한 암반을 뜻하는 제주도 말인 빌레와 연못의 못이 합쳐져, 이 동굴이 연못과 관련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동굴 주위에는 중산간지대 수풀속에 가리워진 두 개의 연못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으며 이 주위에 동굴이 있기에 빌레못 동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이 동굴에서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주거 흔적이 발견되어 그 굴의 역사가 결코 녹록치 않게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제주군 애월읍에 지하에 세상 모르게 자리잡은 이굴은 60여개의 가지굴까지 합쳐 길이가 11,749m로서 단일 동굴로서는 세계 최장이며 옛부터 "어음굴(빌레못굴)에 고양이가 들어가면 한림이나 협재굴에서 나온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길며 그 굴이 다른 굴과 곳곳에서 연결되어 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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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몇몇 고고학 연구자들이 이들 굴을 탐사했는데 이 굴 입구에서 약 900여m 들어간 지점에서 큰곰, 붉은 사슴, 노루 등의 뼈화석과 함께 집게, 박편도끼 등 석기조각 1백여 점을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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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하였다. 이 유적은 적어도 7∼8만년 전인 중기구석기 유적으로 추정됐기 때문에 이 굴은 제주도 최초의 선사시대 사람들의 주거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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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미국의 신문발행인. 1896년부터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를 소유하면서 이 신문을 세계적인 유력지로 성장시켰다. 옐로 저널리즘을 경멸한 그는 폭넓고 신뢰성 있는 뉴스 취재를 강조했다. 제럴드 화이트 존슨이 쓴 그의 전기 〈영예로운 거인 An Honorable Titan〉(1946)을 보면 그가 미국 신문 산업에 기여한 공헌과 폭넓은 영향을 잘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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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있는 유대계 이주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옥스는 테네시 주 낙스빌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신문배달을 했다. 그는 1872년 낙스빌의 〈크로니클 Chronicle〉지의 인쇄소 견습공이 되었다가 뒤에는 켄터키 주 루이스빌의 〈쿠리어 저널 Courier-Journal〉지의 식자공이 되었다. 1877년에는 채터누가의 〈디스패치 Dispatch〉지의 창간을 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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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7월 2일 103위 성인이 탄생함에 따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공문을 통해 한국성인의 공경에 대한 지침을 발표했다. 지침내용은 첫째, 9월 6일 한국순교복자 대축일을 없애고 9월 20일을 한국성인 대축일로 기념하며, 각 교구에서는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며, 둘째, 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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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월(福者聖月) 9월은 순교자성월로 지낼 것 등이다. 1984년 10월 14일 로마 교황청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103위 시성 로마 경축대회가 열렸다. 이듬해 3월 12일 교황은 한국순교성인축일을 세계공용 로마 축일표에 수록하고 기념하도록 선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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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14∼15일 8시간 동안 구미공업단지 내 두산전자에서 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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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용 회로기판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페놀 원액 30t이 배관 손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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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출되어 낙동강 수원지로 유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직후 누출사실에 대한 두산측의 보고가 늦어지고 페놀이 원수검사 항목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수원지에서는 원수에 페놀이 함유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균제인 염소를 투입했고, 그 결과 페놀과의 화학반응으로 생성된 심한 악취성 클로로페놀이 대구광역시 내 각 가정에 송수되면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하천의 수질관리와 수원지 관리의 문제점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었고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이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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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해마다 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곱게 단장한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원형으로 늘어서서,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를 할 때는 목청이 좋은 여자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앞소리[先唱]를 부르면, 놀이를 하는 일동은 뒷소리[合唱]로 후렴을 부르며 춤을 춘다. 유래는 임진왜란 때, 당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이 수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많음을 보이기 위하여,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특히 전지(戰地)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면서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뒤 그곳 해안 부근의 부녀자들이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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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 행사로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며 놀던 것이 전라도 일대에 퍼져 전라도 지방 특유의 여성 민속놀이가 되었다. '강강술래'라는 말은 한자의 '强羌水越來'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강강'의 '강'은 주위 ·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한자어로 된 '巡邏(순라)'에서 온 말로서 '경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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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는 뜻이니, 이는 '주위를 경계하라'는 당시의 구호인 것으로 생각된다.여기에 주위의 뜻인 '강'이 둘 겹친 것은 특히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술래'가 '수월래'로 들리며, 그렇게 기록되기 쉬운 것은, 진양조(晋陽調 또는 진양)로 길게 뽑을 때 '수월래'로 들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표기는 '강강술래'라고 하는 것이 옳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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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1937년 미국 시카고의 쿡카운티(Cook County) 병원에서 처음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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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되었고, 혈액은행(Blood Bank)이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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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6 ·25전쟁 후 군에서 수혈부(輸血部)로 시작되었고, 민간에서는 국립중앙혈액원이 1954년에 창설되었으며, 1958년 대한적십자사에 이관되었다. 1970년 혈액관리법이 공포되면서 매혈로 충당하던 혈액수급을 헌혈혈액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모든 혈액수요를 헌혈로 충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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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트루먼(Truman, Harry, S., 1884~1972) 미국 대통령이 1947년 3월 12일 미국 상하 양원합동특별회의에서 `그리스·터키 원조 법안` 승인을 위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그리스·터키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국내외로부터 위협받을 경우 미국은 자유국가를 지키기 위해 양국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트루먼은 "무장한 소수 또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국가 국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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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2차대전 중 협력했던 미국과 소련의 우호관계를 파기하고 반소 반공 입장의 냉전정책을 보다 확고히 한 `트루먼 선언`이 발표되자 미국 국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외담에 참석하고 있던 마샬 국무장관이 무장관회본국에 전화를 걸어 트루먼에게 발표배경을 묻자, 트루먼은 "법안통과를 위해 공산주의의 위험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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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유럽 오데르강(江)유역의 슐레지엔 귀족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난 아이헨도르프(Eichendorff, Joseph Freiherr von, 1788~1857)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첫 번째 시집을 펴내고 문학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숲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그는 독일 낭만주의 민족운동의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향토색 짙은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넓은 시야는 하이델베르크대학시절 교류하였던 낭만파 시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그의 작품들에 잘 나타나 있다. 1813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주하는 기회를 틈타 벌어진 프로이센 해방전쟁에 참전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우기도 하였던 아이헨드르프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향수어린 시로서 그의 고향이 나폴레옹군대에 의해 유린당한 고통을 표현하였다. 1831년 이후 베를린에서 공직에 있었던 그는 이 시기 그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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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한 작품들은 자연에 대한 풍부한 감상과 서정성을 지닌 작품들로서 많은 인기를 얻으며 슈만, 멘델스존과 같은 유명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민요로서 인기를 얻었다. 1826년 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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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낭만주의 작품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어느 무위도식자의 생활에서(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를 발표하였고 말년에는 오직 집필에만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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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유명 무용수였던 아버지와 형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발레와 인연이 깊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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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주제를 몸으로 표현하는 기술에 대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였던 그는 18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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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낭트에서 데뷔한 후 유럽과 미주지역을 순회하며 명성을 쌓았다. 1847년 러시아로 초빙된 프티파는 상트페테부르크 발레단의 최고의 남성 무용수로 활약하며 그의 전성기를 열기 시작하였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파키타 (Paquita)’로 데뷔하였고 이후 창작활동에 전념 1862년 ‘파라오의 딸 (La fille du pharaon)’로 연출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수석안무가로서 마린스키 극장에서 60년간 활동한 프티파는 차이코프스키 등과 협력하며 ‘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 ‘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 ‘백조의 호수(Swan Lake)’, ‘지젤 (Giselle)’을 비롯한 러시아 발레의 황금기를 이룩하며 고전발레의 화려한 양식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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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곡이 넘는 독일가곡을 발표하며 슈베르트와 함께 독일 가곡의 중심을 이루는 볼프. 기악 연주자처럼 정리된 음악과 단정한 창법이 돋보이는 곡을 많이 남겼던 볼프는 동시대 독일가곡의 한 흐름을 주도하는 작곡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빈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던 볼프는 반항적인 기질 때문에 음악원을 그만둔 후 바그너에게서 음악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 빈의 여러 유명 음악가들로부터 제정적인 도움을 받기도 하였던 볼프는 1879년 브람스를 만나게 됨으로써 결정적인 음악적 시야와 안목을 넓히는 계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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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었다.뛰어난 비평가로서 유명해 지기 시작한 볼프는 그를 따르는 친구들과 항상 어울려 다녔고 그로 인해 제정적인 도움을 계속 받았지만 방탕한 생활덕분에 전염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였다. 볼프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주로 사후에 이루어졌으며 생전에 발표한 많은 기악곡들 역시 사후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볼프는 가곡의 제왕 슈베르트와 더불어 19세기 독일 가곡을 정상에 올려놓은 작곡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스페인가곡집’, ‘이탈리아가곡집’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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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F.길리(Gilly, Friedrich, 1772~1800)의 작품을 보고 감격하여 그에게 건축기법을 사사한 후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고전 건축을 연구하였고, 1811년에는 베를린 건축 아카데미 회원이 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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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초기에는 걸출한 그리스 양식 재흥의 디자이너로 알려졌고, 베를린의 왕립극장(Schauspielhaus)(1821), 구미술관(舊美術館 Altes Museum)(1828), 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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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담의 니콜라이교회(Nikolaikirche)(1830∼1837) 등의 대표작이 있다. 그러나 중기 이후에는 자유롭고 합리주의적인 사고로 전환하였으며, 영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는 영국의 픽처레스크 양식의 영향까지도 받아 독창적인 양식을 개발하여 19세기 최대의 거장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고전 연구에 의한 합리적 설계는 근대건축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벽화에도 손을 대어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고 무대장식에도 관여하는 등 다채로운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Grundlagen der praktischen Baukunst》(2권, 183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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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하나우에서 태어난 실비우스는 스위스의 바젤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1658년 레이덴대학의 식물학 · 해부학 교수가 되어 유럽 최초의 화학 실험실을 레이덴대학에 설치하였다. 정확한 실험에 의해 확인된 결과를 가지고 강의 하는 교수법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던 실비우스는 생명과 질병의 모든 현상이 화학반응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기초를 둔 의료화학(醫療化學)의 진정한 창립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이론은 생체(生體)의 생리현상을 철저하게 화학 과정으로 파악하여 정상적으로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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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리학적으로 생명의 가장 중요한 과정은 혈액에서 일어나고, 질병은 화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체액에서 일어나는 생리현상을 충분한 실험결과로 증명하였고 이 산·알칼리설은 화학의 근대화에의 길을 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레이덴대학교 시절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교수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실비우스는 의학교육에 병실교육의 도입, 대학 최초의 화학연구실 설립 등 기초의학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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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초기 무선전신의 발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던 포포프(Popov, Aleksandr S., 1859~1906)는 마르코니에 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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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세계 최초로 무선전신을 발명한 러시아의 무선연구가이다. 포포프는 당시 헤르츠, 브랑리, 로지 등이 연구한 전자기파(電磁氣波)와 검파기(檢波器)에 관한 연구에 고무되어 본격적으로 무선전신을 연구 개발하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1895년 5월 최초의 공개실험 성공과 더불어 인류의 통신방법에 획기적인 길을 열었다. 그러나 포포프가 이루어낸 신기원적인 무선통신은 세계최초라는 공식 기록에서는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하였다. 포포프는 자신의 발명에 대한 특허를 내어 시장을 독점하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더불어 외국자본의 원조를 받아 그 기술의 보급과 발전을 도모하는 데 반대하였다. 결국 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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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원조(元祖)로서의 공적은 한 해 늦게 세계 최초의 특허를 낸 이탈리아의 마르코니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최초의 실험이 성공을 거둔 이후 포포프는 1897년부터 해군과 협력하여 무선전신 시설을 장치하여 지속적인 실용화에 노력하였고 1899년에는 50km 떨어진 거리에서 무선통신을 성공시키는 등 초창기의 무선전신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01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전기기술 연구소의 교수가 되었고 후에 소장으로 선임되었다. 러시아는 매년 5월 7일을 무선전신의 날로 정하여 최초로 무선전신을 실험한 그의 공적을 기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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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조직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생리학자 말피기(Malpighi, Marcello, 1628. 3. 10~1694. 11. 30). 그는 거의 40년간을 현미경을 통해 동식물 구조의 주요한 유형들을 기술했다. 그의 업적은 광학기술을 이용 육안으로는 관찰할 수 없었던 생물체의 복잡한 구조를 관찰해 미지의 영역을 밝혔으며 그 결과를 체계화시켜 많은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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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신체기능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말피기는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였고 일생을 통해 생체의 미세구조를 보여줌으로써 체계적인 해부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현대 생리학, 발생학, 실용 의학의 발전에 필수적인 학문인 현미 해부학의 창시자로서 그가 남긴 발자취는 절대적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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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시인, 외교관 세페리스 |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080310/18.gif) ![](http://image.epost.go.kr/stamp/data_img/newimg/pp/05/start.gif) 세페리스(Giorgos Seferis, 1900.3.13 ~1971.9.20)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청년시절부터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그리스 외교관으로서 활동하였던 세페리스는 당시 출간한 첫 시집 ‘전환점 (I strofi,1931)’으로 촉망받는 시인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1957년부터 영국주재 그리스 대사를 지내기도 하였던 세페리스는 그리스만의 특색을 살린 전통적인 독특한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영국의 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몇 편의 수필 또한 중요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세페리스는 1947년 아테네 아카데미로부터 명예시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세련된 서정성과 신선한 어법으로 그리스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작가로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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