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이 사찰(寺刹) 방화범이 된 이유는?”
조선 말기 권력의 상징, 남연군묘(南延君墓)
온천으로 유명한 충남 예산군 덕산면 한 야산에 절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가야사(伽耶寺). 명종7년(1177년) 천민 망이와 망소이가 난을 일으켰을 때, 난민들에게 절이 함락된 적도 있었지만, 이후에는 금탑(金塔)이 있을 정도로 흥성했던 절이었다. 아래에 이야기할 수덕사보다 더 컸다고 한다. 이 가야사가 자리한 땅이 명당이라는 사실이 비극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헌종 10년(1844년), 조선왕실의 친족이자 야심가였던 이하응이 느닷없이 이 절에 불을 질렀다. 후안무치한 범죄행위였지만, 왕족이다 보니 승려들은 울분 가득 안고서 절을 떠났다. 불이 나던 순간, 그 참상을 차마 볼 수가 없던 산 속 미륵석불은 무거운 몸을 돌려버렸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182호로 지정돼 있는 이 미륵불은 지금도 절의 반대방향, 그러니까 북쪽 산봉우리를 향해 서 있다. 도대체 이하응은 왜 방화범이 되었는가.
이하응이 선친 남연군의 묘를 옮길 방도를 찾고 있을 때였다. 왕족으로 살기를 만족하지 않던 그는 왕 자체를 꿈꿨다. 그래,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면 조상의 음덕을 바라는 거라구! 그가 만난 한 지관 정만화가 그에게 물었다.
“자자손손 복을 누리길 바라시오, 아니면 자손 2대까지 황제가 나오기를 바라시오.”
“2대까지 황제가 되게 해주시오.”
그런데 지관이 점지해준 그 명당엔 벌써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그곳이 바로 예산 가야사 대웅전 앞 석탑 자리였다. 황제가 되겠다는데, 고깟 절이 대수랴. 숭유억불 정책으로 초지일관한 조선의 왕족 이하응은 냉큼 사람을 시켜 자신의 총감독 하에 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니 그게 1844년이다. 그리고 19년 뒤, 이하응의 아들이 왕이 됐다. 고종(高宗)이다. 그리고 1907년 이하응이 손자가 조선의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2대 황제에 올랐으니 그가 순종(純宗)이다.
2대까지 황제가 되었으니 지관의 말은 맞았다. 그런데 황제 2대로 나라까지 망해버렸으니, 그 지관이 말을 아낀 것인가 아니면 거기까지는 몰랐던 것인가.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아들이 왕이 되고도 8년 뒤에야 가야사 승려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근처에 절을 만들어 주었으니, 지금도 남아 있는 보덕사다.
남연군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도립공원 안에 있다. 가뭄에 물 줄어든 옥계저수지를 지나 시원하게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15분 정도 걸어 오르면 오른편으로 남연군묘가 보인다. 작은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얕은 야산인 묫자리를 360도 산줄기가 에워싸고 그 사이에는 너른 들판이 출렁인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오, 하고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 풍광이 수려하다.
커다란 분묘 앞으로 각종 석물들이 서 있고 오른편에는 비석이 서 있다. 아들 이하응이 직접 쓴 비문이다. 분묘가 있는 바로 그 자리가 가야사 석탑이 있던 자리다. 잔디밭에는 개망초와 쑥부쟁이들이 바람에 날린다. 자손의 발복을 위해 방화의 범죄를 저지른 아비의 탐욕도 간 곳 없고, 불구덩이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승려들의 모습도 간 곳 없다
****************************************************<조선일보/글 사진 영상=박종인 기자 2009.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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