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오키나와 기와에서 발견된 고려의 흔적
삼별초의 멸망 기록에 의문 던져
삼별초.
※ 삼별초 (三別抄 고려 군사)고려시대 경찰·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이름.좌별초·우별초·신의군(神義軍)의 3개 별초군(別抄軍)의 총칭이다. 고종 때 최우(崔瑀)가 도적을 잡기 위해 용맹한 자를 뽑아 야별초(夜別抄)를 설치했는데 뒤에 그 군사가 많아지자 좌·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의 고려 침입 때 몽골에 잡혀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하여 신의군이라 불렀다.
삼별초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최우가 설치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몽골이 고려를 침입한 것은 1231년(고종 18)이고 1232년 기록에 야별초의 기사가 나오므로 최우가 집권한 1219년 이후부터 1231~32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와 달리 신의군에 관한 기사가 1257년에 처음 나오고 좌·우별초에 관한 기록은 그 다음해 기사에 처음 나오므로 그 전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별초라는 임시군대의 편성은 이미 1174년 조위총의 반란 때 나타났다. 별초군은 최우집권기에 중요한 구실을 하며, 특히 대몽항전기에 큰 활약을 했다. 삼별초는 경찰·전투의 임무 외에 도성(都城)의 수비와 친위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했다. 삼별초는 고려의 정규군인 2군6위의 활약이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1232년 고려 정부가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으로 활약했다. 자주 강화도에서 나와 전국 각지에서 몽골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려 경별초(京別抄)로 불리기도 했다( → 몽골의 침략).
삼별초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병(私兵)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공병(公兵)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사병으로 보는 견해는, 그것을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 병지(兵志)에 나오는 "권신이 집권하자 이들(삼별초)을 조아(爪牙)로 삼고 녹봉을 후하게 주며, 혹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권신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고 이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했다"라는 기사에 크게 의거한다. 이에 반해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출했다는 사실과, 삼별초는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都房)이나 마별초(馬別抄)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그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병을 사병처럼 이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무인정권이 붕괴된 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자, 이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개성 정부와 몽골(원)에 대항하여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800여 년 전 몽골제국에 끝까지 저항했던 고려의 무장 사병 집단. 국내 빨치산의 원조라고도 농처럼 이야기되는 이 사병 집단은 지금도 한국인에게 민족주의 전사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260년 원나라의 압력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조정에 맞서 그들은 남도의 진도로, 제주도로 옮겨가며 3년간 전투를 펼쳤다.
처절한 대몽골 항쟁을 거듭했지만, < 고려사 > 등의 사서는 배중손이 이끄는 진도의 삼별초군이 1년여 뒤인 1271년 쳐들어온 고려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 진압됐고, 제주로 도망친 김통정의 잔여세력도 2년 뒤 소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 삼별초의 항전과 이동경로
정말 기록대로 삼별초는 그 뒤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유난히 뜨거웠던 올여름 국립제주박물관(관장 손명조)에서는 기존 사서의 삼별초 멸망 기록에 정면으로 의문을 던지는 사료들이 발굴됐다.
"찾았어요. 같은 기와예요!"
"찾았어요. 연잎 무늬도 배치한 모양새도 똑같습니다. 같은 기와예요!"
지난 6월 초 어느 날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 탐라와 유구왕국 > (7월17일~8월26일)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실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전남 진도 용장성에서 출토된 ▲ 오끼나와 우라소에서 출토된 기와
13새기의 수막새 기와
오연숙 학예사와 민병찬 학예실장은 눈앞에 나란히 놓은 수막새 기와 두쪽에 번갈아 눈길을 돌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키나와에서 빌려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이 박물관이 소장한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막 확인한 것이다.
오키나와를 지배한 옛 유구(류큐)왕국의 수도 슈리성과 우라소에라는 곳에서 나온 기와들은 막새의 한가운데 둥근 씨방을 두고 주위로 아홉 개의 연꽃잎을 돋을새김하고 다시 바깥에 연속점무늬(연주문)로 테두리를 두른 고려계 기와였다.
용장성의 기와도 연꽃잎, 연주문 무늬 등의 배치가 똑같으나 다만 꽃잎 수가 여덟 개(팔엽연화문)로 하나 적을 뿐이다.
용장성?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몽골제국과 항전하기 위해 진도에 쌓은 천혜의 요새다.
※ 용장산성(龍藏山城)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개설]
1270년 (원종 11)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몽고에 굴복한 고려 정부에 반발하여 삼별초와 그 지지자들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와 이곳에서 부서(部署)를 정하고 관부(官府)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자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어 승화후 온(承和侯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는데, 이 때 쌓은 성이 용장성이다.
따라서 용장산성의 축성연대는 1270년(원종 11) 이후이며 삼별초군은 기존의 사찰 건물을 개조하여 궁지로 삼고, 그 외곽의 산에는 구간을 따라 석축과 토축으로 된 산성을 개축하여 그들의 근거지로 이용하였다.
원종 12년(1271) 5월 고려 정부는 김방경 등을 내세워 몽고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용장산성을 공격하였고,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갔다. 제주도에서는 1273년(원종 14) 4월까지 지탱하다가 정부군의 공격으로 소멸하였다.
삼별초군이 용장산성에 주둔한 기간은 8개월간이었고, 남도석성과 함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항목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또한 용장산성은 축성연대가 확실하다는 점, 고려왕실과 대립되는 궁전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위치]
용장산성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세등리와 고군면 벽파리․오류리․유교리 일대에 걸쳐 있다. 용장산성의 북벽과 서벽 및 동벽의 일부는 바다와 접하고 나머지 구간은 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다. 북쪽은 우리나라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명량해협과 접해 있고, 3개의 만과 곶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성벽은 곶 지형에만 남아 있다.
[발굴조사경위]
1989년 연차적인 정비 복원의 일환으로 행궁지(건물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2004년에는 용장산성의 규모 및 구조, 축성 방법, 부속 시설(성문, 치) 등에 대한 현황 파악 및 종합적인 정비 복원방안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자료 확보를 목적으로 하여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결과]
2004년에 실시한 조사에서 성벽 구간 17개소, 문지 7개소, 건물지 6개소 등 총 30개소에 트렌치를 설정하여 용장산성 및 부속 시설의 규모 및 구조, 축성법 등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동․서․남벽에 2개소씩 6개소의 성문지와 치 1개소씩 3개소 등 부속시설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또한 지표 조사를 통해 용장산성 내부에 수십 개소의 건물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성벽과 그에 부속된 성문, 건물지, 치 등 다양한 부속 시설이 분포하고 있는 것도 확인하였다.
[형태]
용장산성은 전 구간이 내벽과 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석축성으로 협축법에 의해 축조되었다. 용장성 건물지는 행궁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계단식 대지를 이루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양쪽과 중앙에 회랑이 있고, 전면에 두 건물지가 있으며, 중앙 회랑 동쪽에는 방단이 위치하고, 회랑과 건물 전면에는 보도가 깔려 있는 형태이다.
서문지는 다른 성문지가 일직선상에 성문이 배치된 것과는 달리 서로 방향을 약간 어긋나게 설치한 어긋문 형식이다. 개구부와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문루 주춧돌이 있다.
제사 건물지는 성황산 정상부의 해발 219m 지점에 위치한다. 장축 방향은 남-북이며, 규모는 19m×14.4m이다. 기단부는 경사가 낮은 동쪽과 남쪽 부분에만 4단의 계단식으로 축조하였고 기단부를 포함하여 3단으로 이루어진 중앙부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제단의 내부에는 토제 전(塼)이 깔려 있다.
추정 장대 건물지는 해발 230m 지점의 성황산 최정상부에 위치한다. 기단부는 경사가 낮은 부분에만 축조되었다. 석곽묘는 용장마을로 가는 국도변 주변 트렌치 1m 외곽에서 확인되었다. 경작으로 인해 파괴되어 모서리 일부 벽석만 남아 있다.
[출토유물]
행궁지에서는 막새기와와 평기와 등 다량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그 외 청자·분청자기·백자 등 도자기편이나 청자가 주를 이루고 있고, 청동기·철기편, 불두도 발견되었다.
제사 건물지에서는 동전류, 토제․철제마, 청자잔과 받침, 철화장고편을 비롯한 각종 청자 및 분청사기, 백자 등 자기류, 청동거울 및 청동수저, 벼루편 등 고려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제사 관련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추정 장대 건물지에서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철제솥편을 비롯한 각종 철기류, 청동 개, 대형 옹 등 도기류, 다량의 기와 등 주로 생활 용기가 출토되었다. 석곽묘에서는 청자병·접시·완·청동수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동전은 총 5점이 출토되었다. 성벽에서 출토된 상평통보(常平通寶) 1점을 제외한 나머지 4점은 모두 제사 유적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중국제 동전으로는 황송통보(皇宋通寶)·원부통보(元符通寶)·정화통보(政和通寶) 등 3점으로 모두 11세기 중반~12세기 초반에 걸쳐 발행된 중국 북송대의 것이다. 우리나라 동전으로는 조선통보(朝鮮通寶)·상평통보(常平通寶)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현재 용장성 기슭에 약간의 석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에 용장사지(龍藏寺址)와 행궁지(行宮址)가 남아 있다.
[의의 및 평가]
용장산성은 단기간에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행궁지와 제사 유적, 약 13km에 이르는 대규모의 산성과 그에 부속된 여러 개의 성문과 적대, 치 등 부속 시설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용장산성의 도시 공간 구조를 밝혀줄 수 있는 산성 내부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특히 출토 유물 중 명문 기와류와 동전류를 비롯한 청자 유물 등은 축조 시기 및 사용 시기를 밝힐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앞으로 체계적인 학술 조사를 실시하여 행궁지와 용장산성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부의 공간 구조(도시 계획) 등을 종합적으로 규명하여 고려시대 도성으로서의 용장산성의 구조를 밝히기 위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 용장산성 터
▲ 용장성 모습
이곳의 건물터 기와가 왜 수천 리 푸른 바다를 건너 남쪽의 이국땅 섬 곳곳에서 무더기로 나온 것일까.
삼별초 군사들이 망망대해를 넘어 오키나와까지 흘러들어간 것인가?
민 실장은 지난 8월21일 특별전 기념강연을 한 일본 현지 학자 아사토 쓰쓰무(오키나와 현립예술대 교수)에게 앞서 이 사실을 귀띔했다.
용장성 기와를 본 아사토는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오키나와에서 나온 수수께끼 고려계 기와들의 주인공은 13세기 삼별초 세력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그는 단언했다는 게 박물관 쪽의 전언이다.
오키나와 기와와 모양이 비슷한 비교품을 찾으려고 소장품을 뒤졌다가 거둔 뜻밖의 수확이었다.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
우리에겐 생소해도,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700~800여 년 전의 고려계 기와들이 삼별초 세력의 것이라는 추정은 일본 학계에서 새삼스러운 가설은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녔고 시기도 훨씬 앞서는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다.
현지 학자들은 수십 년째 이 기와를 만든 주체와 시기를 놓고 논란을 계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된 유물이 특별전에도 선보인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씨가 새겨진 암키와다.
사다리꼴 모양에 물고기 뼈대 모양 무늬가 함께 새겨진 이 대형 기와의 명문은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이 기와 명문에 고려 장인임을 떳떳이 알린 것으로 봐서 고려 장인의 정치적 지위와 긍지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인지다. 고려 장인이 언제 오키나와에 진출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정황상 기와의 계유년에 맞출 수 있는 고려의 연대는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삼별초가 멸망한 1273년과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3년이다.
1273년설은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 선단들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추정이다.
제주도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 정도이기 때문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1393년설이 유력했다.
< 고려사 > 를 보면 오키나와의 첫 교류가 고려 우왕 때인 1389년 유구국 사절을 파견한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멸망 직전 공식 교류가 시작됐다고 봐야 하므로 양질의 고려 기와를 만드는 고급 기술자 파견은 이런 공식 교류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의 공식 기술자 파견이나 고려 멸망 뒤 상당수 유민이 정착하면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논지다.
▲ 고려와 오끼나와, 유구와의 관계지도
하지만 진도 용장성 수막새 기와의 등장은 1273년설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됐다.
오키나와 출토 수막새가 용장성터의 것과 같은 반면, 중국이나 일본 본토계 기와에서는 이런 유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별초 세력 일부가 곧장 진도에서 오키나와로 흘러들어갈 수 있을까.
동서로 1천km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km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도항 준비를 치밀하게 한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 이동할 수도 있다.
< 조선왕조실록 > 에는 제주~류큐열도 사이 무수한 표류민 송환 기록이 실려 있고, 드물게 진도에 표류해온 유구국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유구국 사절에 넘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게다가 진도를 빠져나와 2년간 더 항전한 김통정의 잔여 세력이 항거했던 제주도 항파두리성은 여지껏 제대로 된 발굴이 이뤄진 적이 없다.
※ 항파두리성
이 칭: 항바두리성
시 대: 고려 소재지: 제주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
규 모: 둘레 약 60km
지정사항: 사적 396호
관련전투: 탐라(耽羅)전투
관련인물: 김통정(金通精) 고려시대 삼별초군이 읍성으로 축조한 성곽. 1271년(원종 12) 5월, 진도의 싸움에서 패한 삼별초는 장군 김통정(金通精)의 영도 아래 제주도에 들어와 이곳에서 내외 이중으로 된 성을 쌓았다. 내성은 사각형의 석성을 쌓았으며, 외성은 언덕과 계곡을 따라 타원형의 토성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15리에 이르렀고, 성 안의 면적은 약 30만평이나 되었다. 성에는 4대문을 설치하고 성 안에는 대궐을 비롯하여 관아·병사·군기고·후망소·옥사·훈련장 등을 시설하였으며, 우물과 저수지도 마련하였다. 삼별초는 이 항파두리성을 본거로 내륙지방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여 몇 차례 승리하였으나, 1273년 여·원 연합군에 대패하여 전멸하고 말았다. 항파두리유적지에는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돌쩌귀·기와·자기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은 항파두리항몽유적지라는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 제주 항파두리성의 성벽
발굴 결과에 따라 제주에서도 오키나와의 고려계 기와가 나올 가능성은 있다.
한을 품고 제주에서 배를 탔을까
흥미로운 것은 삼별초가 역사에서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인들은 지역 세력가들이 구스쿠라는 큰 성을 쌓고 경쟁하면서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구도 적은 조그만 섬에서 곳곳에 거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점은 성 쌓는 기술인 축성술과 전쟁 기술에 능한 외부 세력의 조력 없이는 쉽지 않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별초의 오키나와 진출설은 그런 면에서 솔깃한 가설일 수 있으나, 손명조 관장이나 고려사 연구자인 윤용혁 공주대 교수 등은 이 설을 확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키나와에서는 다량의 고려청자 조각들도 출토되는데, 도식화한 장식과 탁한 빛깔을 보이는 청자들은 출토된 명문 기와의 시기보다 늦은 14세기 쇠퇴기 청자들이다.
또 하나는 '대천'(大天)이란 글자가 쓰인 다른 고려계 암수키와의 존재다.
이 기와는 오키나와는 물론 제주도의 제주목 관아터 등에서도 똑같은 것들이 나왔다.
제주목이 조선초의 시설임을 감안하면 시기를 14세기 말에서 15세기까지도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두 가지 연대에 출토 기와의 시기가 걸칠 수 있어 좀더 정밀한 고고, 문헌 검토가 필요한 셈이다.
경위야 어찌됐건 오키나와에서 삼별초의 흔적이 더욱 확실해진다면, 우리 역사에서는 극적인 엑소더스의 장면이 추가될 것이다.
삼별초 군사들은 몽골군의 압도적 전력에 숱한 동료와 처자를 잃고 분노와 한을 품고서 진도 혹은 제주 해안가에서 푸른 바다 너머로 배를 타고 갔을 법하다.
▲ 계유년에 고려 장인이 건너와 만들었다는 사실을 몸체에
새긴 13~14세기 오키나와의 대형 암키와. 계유년의
실제 연대는 1273년설과 1393년설이 엇갈린다.
(사진/ 국립제주박물관)
유구왕국의 역사 시대는 800여 년 전부터다. 7세기 중국의 < 수서 > 에 유구가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서에 나오는 왕조의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고려의 해양 교류사를 어떻게 동아시아 역사 틀에서 보느냐 하는 점이다.
학계 관계자들은 국내에 이런 화두를 연구할 전문인력이 거의 축적돼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와 제작 기술, 삼별초 역사는 물론 당대 오키나와의 정치·경제·사회사도 차분히 섭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윤용혁 교수는 "삼별초가 갔나 안 갔나 식으로 단순히 민족주의적 화두로 접근하면 안 된다.
중세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맥락에서 고려와 오키나와의 교류관계를 결부해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반도-오키나와 교류의 역사
1389년 고려에 조공바치며 첫 교류,
임진왜란 땐 조선 침략 도움 거절해
지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오키나와 열도를 제주도와 비슷한 풍광을 지닌 레저관광지로 여긴다.
하지만 '류큐(유구)왕국'으로 불렸던 이곳은 한반도와 700년 이상 외교적 인연을 맺은 오랜 친구 나라였다.
< 고려사 > 를 보면 첫 공식 교류는 1389년 유구국의 중산왕 찰도가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면서부터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수십 차례 사절을 파견해 진귀한 물산을 바치고 표류자 등을 교환했다.
< 조선왕조실록 > 을 보면 세조 3년(1457)부터 순조 32년(1831)까지 약 400년간 20여 차례의 표류 기록이 나온다.
명분상으로도 중국의 명과 청나라에 조선과 같이 조공했던 국가로서 유구국은 국제 외교 등급에서 우호적인 교린관계를 유지한 '적례국'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표류해 들어온 상대 국민을 자기네 백성처럼 후대한 뒤 송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해류 때문에 표류자가 많았고, 숱한 표류자 송환 교섭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사이가 되었던 셈이다. 심지어 태조 때인 1394년 세력 간 다툼으로 쫓겨난 남산왕이 조선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고, 중산왕이 송환을 요구하는 기사도 < 조선왕조실록 > 에 보인다(조선은 송환을 거부하고 남산왕은 4년 뒤 병사했다).
또 유구 쪽으로 표류한 조선인들의 견문 기록은 드문 해외 정보들이어서 대외정책 자료로 요긴하게 쓰였다.
< 조선왕조실록 > 과 < 해동제국기 > 에는 표류민과 유구국 사자에게 들은 유구에 대한 정보가 다수 기록돼 있기도 하다.
※ 류큐 왕국 [유구국]
류큐 왕국(표준어: 유구 왕국, 琉球王國, 일본어: 琉球王国, りゅうきゅうおうこく, 중국어: 流球國/琉球国)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류큐 제도에 있었던 왕국이다. 당시 정식 명칭은 유구국(流球國)이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조선 등과의 무역으로 번영했으며, 무역에 참여한 류큐의 상인들은 결속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포르투갈 상인의 기록이 있다.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오키나와의 역사입니다.
류큐 왕국은 1429년, 제3대 쇼하시 왕의 산잔 통일(三山統一)에 의해 성립되었다.
[건국]
14세기부터 오키나와 일대에는 왕권이 약해지고 각지에 왕을 자처하는 안지(지방호족)들이 생기면서 추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의 삼산(三山)시대가 시작된다. 세 나라는 추잔의 쇼하시에 의해 통일되어 류큐 왕국이 세워진다.
[제1 쇼씨왕통]
쇼하시는 산잔 통일을 통해 류큐 왕국을 연다. 하지만 지방의 안지는 여전히 강하였고 중앙집권적 왕이 등장하지는 못하였다. 쇼하시의 죽음 이후 왕권은 미약하고 내란이 끊이지 않는 등, 류큐 왕국은 불안한 치세를 이어간다.
[제2 쇼씨왕통]
쇼도쿠왕이 급사하면서 쇼타이큐왕의 중신이었던 카나마루가 왕위를 선양받는다. 그는 쇼엔왕을 자처하여 제2 쇼씨왕통을 연다. 제2 쇼씨왕통때 류큐는 일본, 조선,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왕조들과도 무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보낸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활발히 무역을 재개하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면서 류큐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한다. 1609년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고 지역정권인 사쓰마번이 침공해오자 류큐는 저항하지 못하고 패배, 아마미 제도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된다. 하지만 이후 류큐는 다시 청과 일본에 이중조공을 하면서 다시 중계무역으로 번성을 되찾는다.
[말기]
18세기 말부터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으며,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과 일본에 개항의 압력을 가하면서 류큐는 중계무역의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1879년 일본 제국은 무력으로 왕국 체제를 폐지,류큐왕국의 국왕 상소를 멋대로 일본 도쿄에 압송하였다. 류큐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쇼타이 왕은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졌다. 그리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사실상 류큐를 몰락시켰다(류큐 처분, 琉球處分). 결국 류큐 왕국은 멸망하고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1945년 일본 제국 패망 후 별다른 논의 없이, 류큐 독립주의자의 의견조차 묻지 않고, 미국이 점령한 채 일본의 영토로 간주되었으나, 현재에도 류큐민족의 민족자결정신에 의거하여 류큐독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종교
[고유 종교]
옛날부터 류큐는 고유 종교가 있었다. 슈리에는 기코에오키미우둔(聞得大君御殿/きこえおおきみうどぅん), 수의둔치(首里殿内/しゅりどぅんち), 마카베둔치(真壁殿内/まかべどぅんち), 기보둔치(儀保殿内/ぎぼどぅんち)가 있었다.
[기독교]
류큐 왕국에서 기독교(로마 가톨릭)의 전래는 쇼호 왕의 치세인 1622년, 야에야마에 서양 선박이 도항하고 포교를 시작한 것이 최초이다. 당시 일본에선 기독교가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종교로 간주되어(기독교의 교리 중 '자살금지'가 있는데 이는 일본의 사회질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할복'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추가로 임진왜란의 맹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의 2차 전국전쟁당시 이시다 미츠나리와 손잡고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맞섰지만 패배하여 결국 할복을 하게 되는 처지가 되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가 할복을 거부한 이유가 그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처형한 후 기독교를 박해했다.), 이미 1612년 기독교 금령으로 금지가 된 상태였지만, 자와 섬이나 루손 섬에서 왕래한 서양 선박이 가끔 류큐 제도에서 기항을 한 관계로 류큐 제도에서 포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불교]
류큐왕국은 조선에서 주어진 불전(佛典)을 연못(엔칸치 圓鑑池)안에 섬을 만들어, 건물(벤자이텐도오 辯財天堂)에 보관했다.
[문화]
류큐 왕국의 문화는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 이곳에서 개발된 가라테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문학]
쇼세이 왕에서 쇼호 왕의 통치 기간(1531년에서 1623년)에, 류큐 최고의 가요집(歌謡集)『오모로소오시』(おもろさうし)가 편찬되었다.
[한국과 류큐왕국]
한국과 류큐왕국의 공식적인 교류는 고려시대로부터 시작했다. 1389년,류큐왕국은 왜구의 피로인(노예)이 되고 있던 고려인을 보호해, 고려에 송환했다. 고려사 신창(辛昌) 원(1)년 팔(8)월 참조. 조선시대가 와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왕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또한 자주 류큐왕국(유구국)에서 표류하여 경상도나 제주도에 도달한 표류자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오며, 대부분의 경우는 인도적으로 처우하여 돌려보내도록 했다.하지만, 1430년대에는 류큐과 조선 사이의 항로(航路)에 왜구가 많이 나와, 또, 조선에 와서 류큐국 국사(國使)라고하는 일본인 (상인)이 있다는 위사(僞使)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앞으로 중국를 경유한 교류으로 바뀌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편 세종오(5)년 정(1)월 사(4)일 참조.
[임진왜란과 류큐왕국]
임진왜란 직전, 일본은 명나라를 치도록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조선에 하게 된다. 한편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 협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를 해명하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마침 류큐왕국의 사신이 일본의 침략준비에 대해 같은 내용을 보고하여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는 섬라와 류큐왕국, 조선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이 먼저 조선을 침략하였고 이후 명나라가 조선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게 된다.[1]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과 그 진로에 있는 조선을 정복하려고 해서, 류큐에 조력을 명령했지만, 류큐는 명의 책봉국 이었기 때문에 끊었다. 덧붙여 실제로 임진왜란 으로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갔을 때, 류큐는 일본군에 반만 식료를 제공하고 있다. 덧붙여 이 때, 일본으로부터 위협에 가까운 서신이 류큐에 보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도 유구국은 외교사에 등장한다.
조선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유구와 가장 가까운 규슈 남쪽의 사쓰마번(현 가고시마)을 통해 군량미 비축과 군사적 도움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구왕은 단박에 거절하고, 왕을 책봉해준 명나라 조정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정보를 흘려준다.
일본이 조선에서 쫓겨간 뒤에도 사쓰마번은 에도막부와 명나라의 화평 중재를 유구국에 요구했으나, 유구국은 다시 거부한다.
결국 사쓰마번의 무력 침공으로 오키나와 열도의 위쪽 부분을 빼앗기고 사실상 유구국은 일본에 복속된다.
이후 조선과의 공식 교류는 끊어지고, 표류민 송환만 되풀이됐다.
1770년 제주목사 이기빈은 교역하러 온 유구국 상선의 재물을 탐내어 상인들과 유구국 태자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기빈은 훗날 유배돼 죗값을 치렀으나, 한동안 제주도 주민들은 유구국에 표류할 경우 보복을 받지 않기 위해 제주인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수칙을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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