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해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로 추정
* 신사 관계자 “ 이번 공개는 극히 이례적인 일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
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1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 일본인 자객 토오가쯔아키(藤勝顯), 신사에 칼 기증 ]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6%2F7_21_13_33_0BEgd_IMAGE_0_1.jpg%3Fthumb&filename=1.jpg)
[ 쿠시다 신사 정문 ]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8%2F7_21_13_33_0BEgd_IMAGE_0_4.jpg%3Fthumb&filename=4.jpg)
[ 쿠시다 신사 내부. 신전(神殿)의 모습 ]
쿠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해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간사 혜문
스님 등 일행에 대해,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 했다
"이 칼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阿部憲之介) 궁사는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
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취재진에게 풀러 놓았을 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
느낌이었다. 전체 길이 120㎝. 칼날 90㎝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적혀 있었다. 칼주인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궁사는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며 이 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립니다.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입니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다시 말해 사람을 베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란 분이 신사에 기
증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2%2F7_21_13_33_0BEgd_IMAGE_0_0.jpg%3Fthumb&filename=0.jpg)
[ 칼을 빼고 있는 궁사의 모습 ]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2%2F7_21_13_33_0BEgd_IMAGE_0_1.jpg%3Fthumb&filename=1.jpg)
칼집에 새겨 놓은 글씨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 ’쿠시다 신사측 명성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고 기록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5%2F7_21_13_33_0BEgd_IMAGE_0_1.jpg%3Fthumb&filename=1.jpg)
기증관련 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란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도 보인다
그러나 기증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문서에는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었다. 토오가 이 칼을
기증할 당시 궁사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는 서류에는 “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
고 적혀 있었다. 그 대목을 우리가 소리내어 읽자 궁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머리만 끄덕
였다. 이 사진이 공개되면 혹시라도 몰고 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토오가 정말 명성황후를 절명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왕비의 침실에 난입한 사
람중 하나란 것은 맞습니다. 사건 당시 왕비는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해한 사람이 궁녀일 수도 있고
궁사는 그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설명을 늘어 놓을 수록 난처해질 거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런 심경을 반영하듯 그의 얼굴은 대취한 술꾼 처럼 붉게 달아 올랐고, 손
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긴장
시켰다.
이곳은 신사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이지요. 히젠도는 16세기부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거둔 칼이고 또한 유명한 칼이니까 이곳에 기증하지 않았나 생각합
니다. ”궁사는 말을 마치고서 이내 칼을 거두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외의 특별한 말
을 하지 않았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10%2F7_21_13_33_0BEgd_IMAGE_0_1.jpg%3Fthumb&filename=1.jpg)
히젠도: 한 눈에 명검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의 칼에 방안의 병풍이 반사되고 있다
* 토오가쯔아키(藤勝顯)는 누구인가? *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
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
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
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
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조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
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8%2F7_21_13_33_0BEgd_IMAGE_0_5.jpg%3Fthumb&filename=5.jpg)
[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끝 . 매우 예리하게 연마 되어 있다. ]
* 출처 : 다음 블로그 *
출처 : 레삼비리리
글쓴이 : 만월산 원글보기
메모 :
'애국으로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박정희 대통령 휘호 (0) | 2009.12.03 |
---|---|
[스크랩] 서양지도에 나타난 코리아 (0) | 2009.12.02 |
[스크랩] ‘원조 주는 나라’ 한국, 국격도 함께 높이자 (0) | 2009.11.24 |
[스크랩] `주는 나라, 받는 나라` (0) | 2009.11.24 |
[스크랩] DMZ 248km 전 구간 최초 보고서 (0) | 2009.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