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당당한 자기중심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은 늘 주변상황에 이끌리고, 조건에 휘둘리며, 좋고 나쁜 일이나 칭찬과 비난에 휘둘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릇이 크고 자기 안에 중심이 선 사람은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이나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며, 언제나 자기가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갑니다.
임제록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대들이 여법하게 살려면 대장부의 기상을 가져야만 한다. 분명한 마음의 중심도 세우지 못하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린다면 결코 법다울 수 없다. 그릇이 크고 중심 잡힌 사람은 남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외부에 휘둘리지 않는다. 조건에 휘둘림 없이 자기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인이 되라.’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써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바로 그 곳에서, 지금 이 모습, 이 환경, 이 상황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지금 그 모습으로 주인공이 되면 바로 그 자리가 진실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법우님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와 삶과 조건과 처한 환경 일체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온전히 자기 자신의 상황을 대긍정으로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
바라옵건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당당하며,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맑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끄시어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림 없는 대장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마하반야바라밀
우리 몸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따르듯, 내가 한 행위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따릅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이라는 세 가지 행위는 그대로 이 우주에 저장이 되고 축적이 되어 있다가 언젠가 우리 앞의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 또한 고스란히 과거에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거나 세상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좋든 싫든 지금의 이 현실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만이 업을 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길입니다.
악업을 지었으면 최대한 빨리 받는 것이 좋고, 선업을 지었으면 최대한 늦게 받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면 거부할 것이 아니라, 빨리 받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하며, 좋은 일에 대한 결과는 오히려 늦게 받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괴로운 일이 생기면 아파하고 좌절하며 즐거운 일만 많이 일어나도록 해 달라고 기복적으로 빌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괴로운 일이 생기면 지난 악업의 과보를 빨리 받아 없앨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즐겁고 기쁜 일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날마다 복을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괴로우면 괴로워서 걱정이고 즐거우면 그 즐거움이 금방 떠나갈까 싶어 걱정이지만, 지혜로운 이는 괴로우면 악업을 녹여서 좋고 즐거우면 선업을 받아서 좋습니다. 우리 모든 법우님들도 이처럼 좋고 나쁜 양 극단의 모든 상황을 대긍정으로 받아들여 자기 안에서 긍정으로 녹여낼 수 있길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화엄경이라는 경전에서는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에 그리는 것은 곧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에서 그리는 것은 언젠가는 내 삶이라는 현실 위에 고스란히 그려지게 됩니다. 심지어 한두 번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을 했더라도 그것은 일정부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물며 반복적이거나 지속적인 어떤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 삶의 바탕 위에 언젠가는 그려지게 됩니다.
어떤 사물을 보든, 사건을 보든 늘 밝고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은 점차 긍정적이고 만족스러워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부정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사는 사람의 미래는 부정적이며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스스로 마음에서 연습한 것이 그대로 내 삶 위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은 이미 내 마음 안에 다 갖추어 져 있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고 쓰느냐에 따라 내 삶의 현실은 내 스스로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무한 능력의 주인공이 바로 이 안에 있습니다. 참된 행복과 자유 평화 그리고 심지어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내 마음을 외면하여 밖으로 찾아 나서지 않고도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모든 이들이 자신이 현재에서 행하고 있는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자신의 미래를 매 순간 창조해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매 순간 따뜻한 말과 긍정적인 생각, 상대방을 돕는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창조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마하반야바라밀.
깨끗하고 더럽다는 차별, 좋다 싫다는 차별, 옳다 그르다는 차별은 다 우리 마음의 집착심이 만들어 낸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본래 모든 존재의 근원은 불성이고 신성으로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차별에서 만들어집니다. 좋다 싫다는 차별심이 일어나면 좋은 대상은 더 가지려고 집착하며, 더 많이 갖지 못했을 때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반면에 싫은 대상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멀어지려고 애쓰며,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 할 때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좋다 싫다는 분별도 너무 극단적이 되면 그것은 곧 괴로움을 동반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상황은 완전한 중립입니다. 이 세상에는 본래부터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르거나,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 분별이 생겨났다면 그것은 인간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지 그것이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텅 비어 조용한데, 그 조용한 무분별의 세상을 우리 마음이 분별과 집착으로 어지럽혀 놓은 것입니다.
둘로 나누는 것만 떠나면 세상은 언제나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차별심이 곧 중생심이고, 무분별과 무차별이 바로 모든 깨달음의 시선입니다.
바라옵건대, 극단적으로 치우친 견해나 분별에 빠지고 자기 생각만 고집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너와 나, 네 편과 내 편을 둘로 나누어 다투는 일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 대화합으로 어우러지게 하소서. 좋아도 좋은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싫어도 싫은 것을 너무 미워하지 않는 대장부의 넓고 열린 가슴이 되게 하시옵소서. 마하반야바라밀.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도 갖지 말고, 원한의 마음도 갖지 말고, 남들의 약점이나 단점을 들출 것도 없습니다. 상대를 볼 것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얼마나 잘 사는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얼마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지, 그런 데에 관심을 둘 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을 보고 나 자신의 길을 가면 됩니다. 상대방과의 모든 비교를 놓아버릴 수 있길 발원합니다. 나는 나로써의 온전한 몫이 있습니다. 참된 진리가 나라는 존재로써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해 이 땅에 피어난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를 상대와 비교하고 차별하고 나누게 되면 온갖 질투와 성냄과 원한이 일어나고, 상대에 비해 내가 월등하다거나 우월하다는 데에서 온갖 괴로움과 시비가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행복은 상대방과의 비교 없이 다만 내 안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것이지, 상대적인 우월과 열등이 행,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모든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욕심충족에서 오는 우월감일 뿐입니다. 남들보다 행복한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 자기 행복을 안으로 품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입니다.
상대적인 비교를 떠나면 언제나 절대적인 풍요로움과 고요함이 우리 앞에 연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상대방보다 잘나거나, 누구보다 못나거나 하는데 휘둘리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님의 크신 뜻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 마하반야바라밀.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의 하루 하루는 그 자체가 여행이며, 매 순간이 휴가이자 휴식이 아닌가 생각해 보곤 합니다. 휴가나 여행은 몸이 떠나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잠시의 ‘멈춤’과 ‘비움’으로써 휴가와 여행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솟아오른 설악의 산맥을 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바쁘고 정신없던 일들은 사라지고 마음은 평온을 되찾곤 합니다. 아무리 해야 할 일로 번거롭다 할지라도 잠시 호흡에 마음을 모으고 맑은 공기를 깊숙이까지 품어 안았다가 내보내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깊은 휴식을 취하게 됩니다. 일하며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다가도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이 곳은 익숙한 일터가 아닌 호젓한 여행자가 머무는 휴가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를 휴식으로, 쉼으로, 여행으로, 휴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구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하루 일과 중에 모든 행위를 잠시 비우고, 멈추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삶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쉽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여기’라는 곳이야말로 모든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마음을 비우고, 현재로 돌아와 충분히 휴식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변의 자연 만물의 경이로움에 눈 뜨고 집중할 수 있게 하소서. 마하반야바라밀.
지혜로운 사람은 마치 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나뭇가지와 같다고 [사십이장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물 위에 떠 흐르는 나뭇가지처럼 그저 삶의 흐름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흐를 뿐입니다.
물 위에 떠서 흐르는 나뭇가지는 억지로 마른 땅으로 가려 애쓰지 않고, 빨리 가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양 갈래 길이 나오더라도 어느 한 길을 고집하지 않고, 물길을 거슬러 가려 하지도 않은 채 다만 큰 물줄기의 흐름을 타고 완전히 온 존재를 그 흐름에 맡겨 흐를 뿐입니다. 삶의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않고, 너무 힘쓰지 않고 다만 힘을 뺀 채 자연스럽게 흘러 갈 뿐입니다. 그렇듯 흐름에 들 때에만 비로소 썩지 않은 채 저 드넓은 바다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내맡기고, 내 뜻대로 해 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조바심을 놓아버리고, 삶의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빨리 가려고도 늦게 가려고도 애쓰지 않고, 다만 우주적인 삶의 큰 물줄기에 온 존재를 내맡긴 채 다만 흐르기만 할 수 있다면 그는 반드시 큰 본성의 바다에 다다를 것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인생이라는 흐름을 거스르지 말고, 완전히 나뭇가지처럼 나를 내맡기고 흐를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그렇게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이미 지나온 과거나 아직 다다르지 않은 미래에 무엇이 오게 될 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다만 매 순간 순간 흐르기만 할 때, 그 때 우리는 저 불성과 신성의 대양에서 함께 만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궁극의 그 곳에서 함께 만나게 하시옵소서. 마하반야바라밀.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과 같은 방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아무리 올바른 진리라 하더라도 거기에만 집착해 얽매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올바른 법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법이라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진리는 어떤 특정한 틀 속에만 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틀 속에 가둘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진리다’ 라고 해 놓고 그 안에 갇혀 그 밖의 것들을 ‘진리가 아니다’고 차별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성품을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을 나누어 금을 긋는 순간 진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있고, 그래서 진리는 옳고 비진리는 옳지 않다면, 거기에 시비와 투쟁과 싸움이 생겨납니다. 진리는 언제나 비진리를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울타리가 없으며, 이기고 질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나누지 않는 통합의 진리에 다툼과 나뉨은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가르침에도 머물러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지금의 시대는 모든 종교가 서로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적인 심성과 영성으로써 화합하고 하나되는 영적인 길을 걷게 하시옵소서. 종교간의 벽, 자기만 옳다는 편견의 벽, 나만 잘났다는 아집의 벽을 넘어 내가 옳은 것처럼 상대도 옳을 수 있다는 활짝 열린 지혜를 깨닫게 하시옵소서. 마하반야바라밀.
생각이란 정말이지 끈질기고 지치지 않으며 하염없는 솟아오릅니다. 우리 안에서는 하루에 수천에서 많게는 2~3만 개 정도의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 좀 하고 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 많으면 안되니까 생각을 없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많이 하면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 쉽고, 생각을 없애려고 하면 생각을 대상으로 한바탕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생각을 잘 다루는 방법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지눌스님은 수심결에서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그 망상을 관찰’하는데 그 해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매 순간순간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무의미한 생각들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하루 중 우리 감정은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합니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들떴다가 가라앉았다가. 그러나 그 감정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건 생각이 공연한 감정의 진동을 가져온 것일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올라오는 생각을 바라보게 되면 비로소 오직 지금 이 순간, 평범하고도 평이하고, 평화로운 그냥 지금 이 순간을 가볍게 살아가게 됩니다.
전혀 무겁지 않게, 전혀 심각하지 않게, 전혀 앞일을 걱정하지 않고서도, 그냥 그냥 아주 평화롭게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그냥 저냥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이들이 매 순간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음으로써 평화로운 매 순간을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모든 종교에서는 이웃과 일체 중생들을 사랑하고 자비로 감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월감에 우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이웃을 나아가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받을 만한 부분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어려운 부분까지도 기꺼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져봐서 사랑할 만 하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는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할 만하지 못한 부분, 심지어 추악하고 잘못된 부분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허물은 없습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바로 그 생각이야말로 내가 가진 유일한 잘못입니다.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만족하고, 무한한 감사를 표명하며,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다 용서해 주고, 따뜻하게 돌보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더 나아지지 않았더라도, 남들보다 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줌으로써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수용하고 만족하고 감사하며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흘러넘처 이 세상, 우주 전체에까지 이르게 하시옵소서.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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