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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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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뒤엔 이슬람 인구가 22억 명으로 세계의 25% 趙甲濟 20년 전 세계의 이슬람 교도는 11억 명으로서 약20%를 차지하였다. 지금으로부터 20년이 지나면 이슬람 인구는 25%로 늘고 약22억 명이 된다. 40년만에 倍增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퓨 포럼(PEW FORUM)이 발표한 자료이다. 20년 뒤, 즉 2030년에 가면 파키스탄의 인구가 2억5600만 명에 달하여 인도네시아를 추월,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가 된다. 미국의 이슬람 인구도 620만 명으로 倍增(배증)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구의 4분의 1이 이슬람 교도가 된다. 나이제리아는 이슬람과 기독교 신도들 숫자가 비슷한데 20년 뒤엔 이슬람이 다수가 된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인구의 10%가 이슬람 교도로 이뤄질 것이다. 스웨덴은 9.9%.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에선 이슬람 인구가 舊敎 인구보다 많아진다. 이들 나라는 85% 가량이 루터교도이다. 2030년에 유럽의 이슬람 인구는 전체의 8%에 달할 것이다.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이들이 多産이기 때문이다. 2010년 현재 舊敎, 新敎를 합친 기독교 신도는 약20억 이상(세계인구의 30~35%)이므로 2030년에도 이슬람 인구보다 많을 것이다.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국내인 약5만 명, 외국인 약10만~12만 명으로 추산된다. ,,,,,,,,,,,,,,,,,,,,,,,,,,,,,,,,,,,,,,,,,,,,,,,,,,,,,,,,,,,,,,,,,,,,,,, 이슬람을 누른 터키 군대 터키 군대는 헌법상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의 世俗的 개혁 노선을 수호하도록 명령 받은 조직이다. 趙甲濟 미국 언론은 이집트의 군대가 터키의 군대처럼 이슬람 과격 세력을 제어하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글을 많이 올리고 있다. 터키 군대는 헌법상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의 世俗的 개혁 노선을 수호하도록 명령 받은 조직이다. *터키에서는 군대와 대통령과 내각이 행정권을 나눠갖고 있다. 군대와 대통령은 내각과 상의없이 독립적으로 정책을 집행하기도 한다. 3者가 균등한 것이 아니고 국방 외교 부문에선 군대가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한다. *군대는 행정, 사법, 재정 부문에서 독립적이다. 예컨대 고등군사법정과 최고군사평의회는 군사와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민간인들에게도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군대가 제출한 예산안에 대해서는 내각과 국회가 異見을 제기할 수 없다. *軍 인사에 대해서도 수상과 국방장관은 거의 발언권이 없고 최고군사평의회에서 독립적으로,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터키 헌법 117조는 참모총장은 수상에게만 책임을 진다고 규정했다. 군사문제에 관한 최고결정기관인 국가안전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참모총장은 장관급 위원들보다 높고 사실상 수상과 동급이다. 1992년 참모총장 도간 귀레스는 "나는 국가로부터 지명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터키는 군사국가이다"라고 공언했다. 참모총장의 공식 서열은 대통령, 국회의장, 수상 다음이지만 實權은 가장 크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터키는 헌법118조를 통해서 국가안전위원회(NSC)를 만들었다. 이 기구는 국방 및 외교 정책을 자문한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결정한다. 구성은 군대에서 다섯 명, 민간장관들이 다섯이다. 참모총장, 육해공군 사령관, 헌병사령관이 군대 대표이다. 대통령, 수상, 국방장관, 내무장관, 외무장관이 민간인 대표이다. 국방장관은 군부가 지명하므로 이 회의에서는 군대 의사대로 결정이 나게 되어 있다. 더구나 군대 대표는 한 목소리인데 민간 대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어 표결을 하면 군대의 제안이 모두 통과된다. *국방 외교 부문과 이에 관련된 內政에 대해서 군대가 최종적인 결정권을 제도적으로 확보했기 때문에 이슬람 정당이 등장해도 결국은 군대에 굴복한다. 1996-97년 사이 이슬람 정당인 복지당이 정의당과 연립하여 집권했을 때 수상인 에르바칸은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란 리비아 나이제리아와의 화해정책을 추진했다. 군대는 여기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독자적인 외교-안보정책을 밀고나가 이스라엘과의 군사적 협조관계를 강화했다. 1996년 12월에 이란의 라프산자니 대통령이 앙카라를 방문하자 군대는 공식 만찬에 불참했고, 군사대표의 무기공장 방문 요청을 거절했다. 1997년 2월 군대는 국가안보위원회에 18개항의 제안을 했다. 이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NSC를 통과하여 집권당에 통보된 18개항의 내용은 反이란, 反이슬람원리주의적 내용들이었다. 이슬람원리주의 정당에서 수상이 된 에르바칸은 18개항에 반대했으나 군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서명한 뒤 그해 6월에 사임했다. *터키가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서 참전했던 1차세계대전중 英佛 연합군이 가장 크게 졌던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이자 독립전쟁의 지도자이며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자 위대한 개혁가인 케말 파샤. 國父(아타투르크)로 불리는 그는 오토만 투르크의 유산인 政敎 일체를 깨고 정치와 이슬람을 분리시켰다. 오토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황제(술탄)는 이슬람의 교황(칼리프)를 겸했다. 터키의 서구식 근대화의 핵심은 政敎 분리를 통해서 이슬람의 정치개입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케말은 이 임무를 군대에 맡겼다. 그의 死後에도 터키 군대는 케말리즘(케말의 개혁이념)과 國體의 최종 수호자로서 세 번에 걸쳐 정치에 개입하여 혼란을 수습하고 兵營에 돌아갔다. 이는 불법 쿠데타가 아니고 헌법과 전통에 기초한 군대의 합법적 개입이었다. 1960년, 1971년, 1980년 세 차례 군대는 민간정권이 정치,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國政을 장악하고는 정치지도자들을 투옥, 연금한 뒤 정치판을 정리해주었다. 터키 군대는 특권을 많이 누리기도 하지만 국민들의 거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다. 세 번의 군대 개입 모두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슬람 세계에서 근대화 개혁에 성공한 것은 지금까지도 터키뿐이라고 할 정도이다. 이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견제할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터키 군대는 국가와 國體(케말의 개혁노선에 입각한 세속 체제)의 수호자이다. 이 군대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케말 파샤 숭배이다. 북한의 김일성을 제외하고는 터키처럼 죽은 지도자를 기리는 나라가 없을 것이다. 그의 사진은 길에도, 벽에도, 車에도 붙어 있다. 케말의 근대화 혁명은 '脫이슬람, 入서구'의 방향이었다. 이는 朴正熙의 근대화 혁명이 조선조적인 명분론과 양반정치문화를 배격하고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實事求是 노선을 추구했던 것과 비슷하다. 참고: 대한민국 헌법상의 '국군의 사명' 대한민국헌법 제5조: 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따라서 첫째, 국군은 오로지 국가 국민 國益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하며 어떤 정파 편도 들어선 안된다. 둘째, 국군은 정권을 탐해선 안되고 정치에 간여해서도 안되지만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정치를 알아야 한다. 셋째, 국군은 국토방위뿐 아니라 국가의 안전보장까지 책임을 져야 하므로 外敵뿐 아니라 內敵도 경계하여야 한다. 넷째, 국군은 외국을 침략해선 안된다. 다섯째, 국군은 국제평화를 유지하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 2011-02-07, 10:32 ] ,,,,,,,,,,,,,,,,,,,,,,,,,,,,,,,,,,,,,,,,,,,,,,,,,,,,,,,,,,,,,, 파키스탄에선 이슬람을 모독하면 死刑! 문제의 법을 비판하였다고 知事, 장관 잇따라 피살. 趙甲濟 1987년 파키스탄은 지하울 하크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슬람을 모독하는 자를 死刑에 처하는 法을 통과시켰다. 즉, 마호메드나 이슬람을 모독한 것만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法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푼잡 주의 知事와, 내각의 소수민족 담당 장관이 최근 암살당하였다. 知事는 자신의 경호원으로부터, 장관은 탈레반을 자칭하는 암살단으로부터. 이슬람을 욕하는 게 死刑에 해당하고 이런 法을 비판하면 암살되는 이런 나라를 여행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슬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독교의 종교개혁에 해당하는 게 없어 아직도 政敎가 제대로 분리되지 않아 이란처럼 神政체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 서구와 이슬람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유럽은 아랍, 타타르, 오스만 터키 등 3대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받고 고전하다가 반격에 나섰으나... 趙甲濟 동서 冷戰 종식 이후의 세계 정세를 문명의 충돌이라고 정의한 이는 하버드 대학의 사뮤엘 헌텅턴 교수였다. 문명의 충돌, 그 핵심은 종교이고 결국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의 대결이다. 1993년에 이런 주장이 나왔을 때 많은 이들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기독교 문명이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제국을 무너뜨렸는데 後進 이슬람 문명이 對敵할 만한 상대나 되나라고 의아해 했다. 이런 短見은 최근 100년사를 통해서만 세계를 바라본 결과이다.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대결은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유럽은 아랍, 타타르(몽골), 오토만 터키의 3大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7세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아랍 이슬람 세력은 중동, 이란,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와서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이슬람화했다. 그들은 프랑스 남부까지 쳐들어갔다가 물러났다. 1492년 기독교 세력이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어 스페인을 수복하기까지 약800년간 이슬람은 유럽의 심장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선진 문명을 전했다. 13세기 유럽을 덮친 몽골세력은 그 뒤 이슬람화되었다. 러시아를 약300년간 통치한 킵착 칸국은 이슬람화되어 동유럽의 기독교도들을 지배했다. 세번째 도전은 오스만 터키였다. 이 세력은 원래 몽골-투르크族이었으나 중동에 와서 이슬람화되었다. 이들은 1453년에 동방 기독교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하여 기독교 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오스만 터키는 헝가리, 발칸반도, 그리스를 점령하고 두 차례 유럽의 심장인 비엔나를 포위했다. 유럽의 호수인 지중해의 제해권을 놓고 베니스-스페인 함대와 싸우기도 했다. 이슬람의 도전에 대한 최초의 기독교의 응전이 11세기부터 약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 군대에 졌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과 싸우면서 비로소 자신들이 後進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잊어먹었던 그리스 로마 문명을 이슬람 문명이 이어가고 있음도 알았다. 이 自覺과 반성이 문예부흥 운동의 한 동기가 된다. 기독교 세력은 십자군 전쟁에선 졌지만 문예부흥을 통해서 종교개혁, 산업혁명,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어 결국은 이슬람을 누르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론 이겼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오스만 터키(오토만 투르크)가 비엔나를 포위했다가 패퇴한 1683년을 기점으로 하여 이슬람의 퇴조와 유럽 세력의 공세가 본격화된다. 17세기부터 유럽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해양세력화되어 세계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터키는 유럽의 교두보를 하나씩 잃어가고 중동은 영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편에 든 오스만 터키 제국은 패전하면서 해체되고 한 타스가 넘는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수세로 몰린 중동 이슬람 세력은 그러나 1970년대에 석유파동을 통해서 세계사의 主무대로 복귀했다. 유럽의 산업화가 이슬람을 몰아붙였던 것처럼 中東 사막에서 솟아나기 시작한 산업의 혈액이 이슬람의 반격을 가능하게 했다. 이슬람은 과학기술에선 서구에 뒤지고 정규군끼리의 싸움에서는 일패도지하지만 지하드 정신으로 무장한 인간폭탄들이 테러戰에선 미국 등을 상대로 거의 대등한 싸움을 하고 있다. 유럽과 이슬람의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슬람파시스트" 조갑제 이슬람 청년들에 의한 런던 테러 이후 "이슬람의 교리와 테러는 상관 관계에 있다. 이 사실을 외면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서구 언론에서 제기되고 있다. 주간지 타임誌의 한 컬럼은 "자살테러에 이슬람 교리가 이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런던 테러범들의 동기를 사회적 소외나 차별로써 설명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피해가는 이야기란 지적이었다. 뉴스위크誌는 '테러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무슬림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무력만으로써는 안된다"고 했다. 이 주간지는 런던 테러 하루 전에 요르단의 압둘라 왕이 주재한 세계 무슬림 지도자회의가 테러주의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성명서를 낸 사실을 지적했다. 이 잡지는 이 정도의 선언으로써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99.99%의 무슬림 신도가 이 성명서를 지지한다고 해도 2만 명의 테러 지지자가 남게 된다. 99.9%가 이 성명을 지지한다고 해도 약100만 명의 무슬림은 위험한 존재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유에스 뉴스 엔 월드 리포트의 칼럼은 "이슬람파시스트"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이슬람 테러분자들은 히틀러처럼 유럽의 문명을 파괴하려는 자들이라고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 2005-07-27, 12:00 ] ,,,,,,,,,,,,,,,,,,,,,,,,,,,,,,,,,,,,,,,,,,,,,,,,,,,,,,,,, 메모/이슬람에 대한 理解와 誤解 趙甲濟 1. 이슬람의 발상: 메카의 상인 마호메드, 40세이던 서기 610년에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고 포교하기 시작했다. 서기 622년에 메카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동, 포교함. 630년에 메카 점령, 이어서 全아라비아 반도를 점령, 이슬람화. 632년에 마호메드 사망. 칼리프(교황) 계승권 문제로 시아파, 순니파의 분리. 2. 이슬람 교리: 마호메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일곱번째의 마지막 선지자 자처, 예수는 여섯번째라고 주장. 코란은 천사가 계시해준 것을 마호메드가 외워서 가르친 것인데 그의 死後 문서화. 아랍어로써만 가르쳐야 하고 번역이 허용되지 않음.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차이: 유대교는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 하고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슬람은 마호메드가 마지막 先知者라 하고 예수를 여러 先知者중 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기독교는 예수가 마지막 선지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 3. 종교-군사-정치가 일체화된 종교 우위 집단. 발상 뒤 100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인도에 걸친 大帝國 건설: 아라비아, 이집트, 시리아, 이란,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 스페인 점령. 움마야드(다마스쿠스)-압바시드(바그다드)-맘루크(이집트)-오스만 터키로 주도권이 이어짐. 11세기까지,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로 진출. *서기 732년, 지금 프랑스의 포아체에서 프랑크 왕국의 칼 마르텔이 이끄는 기독교 군이 움마야드의 이슬람 군을 격파, 유럽 중심부 진출을 저지하였다. 이슬람은 한때 부르고뉴 지방도 장악하였었다. 이때까지도 유럽의 기병은 발걸이를 쓰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프랑크 군은 이슬람 騎兵의 발걸이(등자)를 보고 그 뒤 이를 채용하였다. 4. 異敎徒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나, 세금에서 차별. 5. 文明國 이란을 이슬람화하여 아랍 세계에서 탈피, 세계종교로 업 그레이드 됨. 중세 암흑기에 이슬람은 先進문화를 자랑, 그리스 로마문화를 계승, 발전시킴. 당시 유럽은 가톨릭 지배 시대. *시리아에 근거지를 둔 움마야드 王朝(661~750)는 아랍제국으로 불린다. 시아파와 페르샤 세력이 주동, 이 왕조를 타도하고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겨 압바시드 王朝를 열었다. 이때부터는 이슬람 제국으로 불린다. 압바시드 왕조는, 아랍사람들에게만 주던 특권을 폐지 이슬람 교도 전체에서 人材를 등용하였다. 움마야드 왕조의 일파는 스페인으로 도망, 751년에 코르도바에서 움마야드 왕조를 再建하였다. 당시 코르도바는 인구가 50만으로 유럽의 등불로 불렸다. *압바시드 왕조의 이슬람 군대는 서기 751년 지금의 우즈벡에 있는 탈라스 강변에서 高仙芝가 이끌던 唐軍과 대결, 승리, 唐 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고 이곳을 이슬람화하였다. 이때 이슬람군은 唐의 종이기술자를 포로로 잡았다. 종이 만드는 기술이 中東과 유럽으로 전해졌다. 6. 아랍어를 공용어로 선포. 이란만은 고급문화로 아랍화되지 않고 이슬람의 폭과 깊이를 더했다. 7. 7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1096~1270)에서 기독교 패퇴, 그 충격이 르네상스의 동기가 됨. 셀죽 터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이 계기가 됨. 교황 우루바누스 2세의 제창에 유럽의 기독교 국가가 호응, 1차 십자군만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 이집트 아유비드 왕조의 살라딘이 재차 예루살렘 점령, 3차 십자군을 격퇴. 4차 십자군은 베니스 상인들에게 이용당해 콘스탄티노풀을 공격, 라틴왕국을 세움. 8. 몽골의 침입과 이슬람化: 1260년에 맘루크가 몽골군을 패퇴시켜 이슬람 세계를 수호했다. 러시아 남부 킵착 칸국이 이슬람화하여 러시아 및 동유럽이 부분적으로 이슬람화. 우즈벡에 본부를 둔 티무르도 이슬람 세력화. 9. 투르크族의 이슬람화: 셀죽 터키와 오스만 터키의 중동 아나톨리아 점령과 이슬람화로 武力을 더했다. 10.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1453년 콘스탄티노풀 점령, 그 뒤 두 차례 비엔나 포위, 지중해 제해권 장악 시도는 실패(레판토 해전). 그리스, 발칸, 헝거리를 점령, 3대륙에 걸친 大帝國 건설. *1529년, 슐레이만 大帝의 12만 군대, 비엔나 포위, 보름만에 철수, 코피를 유럽에 전하는 계기가 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는 新敎를 인정, 종교분쟁을 일시적으로 봉합한 후 오스만 터키에 대응. *기독교의 반격: 1492년 기독교 세력이 그라나다를 점령,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을 추방.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유럽의 해양진출이 본격화된다. *1571년 10월7일, 그리스 근해 레판토 海戰에서 스페인과 베니스, 제노바 및 말타의 연합함대는 오스만 터키 해군을 거의 전멸시킴. 쌍방 450척의 군함과 약5만 명의 병력 동원. 쌍방 약3만 명의 사상자. 스페인군에 참전하였던 동키호테의 著者 세르반테스도 터키군에 포로가 됨. 11. 아랍의 해양진출: 인도양, 지중해, 더 나아가서 동지나해와 신라에까지 진출. 12. 17세기부터 퇴조: 유럽은 르네상스로 산업화, 민주화 시작. 이슬람은 종교의 억압속에서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함. 이스탄불의 천문관측소를 이슬람 법학자의 명령으로 황제가 파괴한 적도 있다. 13. 18세기부터 확고한 유럽 優位: 대서양, 신대륙 개척. 중동세력은 유럽의 발전을 배우려고 하지 않음. '과거의 제자로부터 배워야 하나' 하는 반발도 강했고 과학에 대한 종교의 간섭이 발전을 저지하였다. *19세기 세계 4大 제국중 오스만 터키와 인도의 무갈제국은 이슬람화한 투르크 세력이 지배층이었다. 14. 오스만 터키의 내부 개혁 시도와 좌절: 기득권 세력과 예니세리 근위대의 반발로 개혁적 황제나 재상들이 희생됨. 유럽식 군대 제도가 정착된 것은 19세기 초이다. *이슬람은 종교개혁이 없었다. 종교優位로 政敎분리가 어렵다. 이란이 좋은 예이다. 15. 1차세계 대전 이후에 중동은 유럽의 영향권안으로 들어감. *터키의 성공적인 世俗 개혁. 케말 파샤의 군대를 主力으로 한 근대화 개혁이 성공. 16.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발생, 東西 대립 양상 보임. 17. 20세기 초, 中東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이슬람은 역사의 주무대로 복귀. 18. 나세르에 의한 汎아랍주의의 태동과 좌절. 19. 냉전 종식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의 충돌 현상 노출. 9.11 테러. 20. 2011년 중동민주화 혁명은 이슬람식 종교개혁인가? ,,,,,,,,,,,,,,,,,,,,,,,,,,,,,,,,,,,,,,,,,,,,,,,,,,,,,,,,,,,,,,,,,,,,,, 몽골군을 격파, 이슬람 文明을 지켜낸 노예戰士들 이야기 튀르크族 출신인 맘루크는 한때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인도를 통치하였다. 1260년엔 이스라엘 땅에서 몽골군을 섬멸, 西進을 저지하였다. 趙甲濟 세계사에는 바이킹 海賊, 몽골 騎馬군단, 사무라이, 요한 기사단, 예니세리(오스만 터키의 외인步兵), 프랑스의 외인부대와 같은 용맹한 戰士집단들이 등장, 커다란 足跡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가장 오래 영향을 끼친 戰士 집단은 맘루크이다. 맘루크는 黑海 및 카스피해 북쪽 草原 지대에서 활약하였던 튀르크(돌궐) 계통 기마민족 출신 노예집단을 가리킨다. '소유물'이란 뜻이다. 9세기부터 이슬람 세력(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압바시드 왕조)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면서 충성심이 강한 튀르크계 청년들을 노예로 사들여 독립부대를 편성, 왕을 保衛하도록 했다. 노예들은 토착세력과 연고가 없어 오로지 왕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장점이 있었다. 튀르크족은 몽골족과 비슷한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몽골 騎馬군단의 主力은 항상 튀르크족이었다. 튀르크족은 훈족이나 흉노족과 같은 뿌리이다. 신라 金氏 집단을 몽골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흉노족 출신이라고 보는 視覺이 有力하다. 맘루크 戰士들은 이슬람으로 歸化하여 아랍 말을 썼다. 그들은 집단생활을 통하여 단련되고 충성심이 강하였으며 종교적 열정 또한 대단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주민들은 주로 아랍족인데 그들은 맘루크 집단을 존경하였다. 일부러 노예가 되어 맘루크 부대에 편성되려고 한 이들도 많았다. 이슬람 지배층은 맘루크들 사온 뒤엔 노예로 대우하지 않았다. 후견인 역할을 하고 교육을 시켰으며 고위직에 등용하고 軍의 지휘를 맡겼다. 서서히 맘루크 戰士 집단은 이슬람 여러 나라에서 중견층을 형성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王權을 차지하였다. 맘루크가 맨 처음 집권하여 王朝를 세운 곳은 이집트이다. 1249년 6월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지휘하는 제7차 십자군이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도시 다미에타에 상륙하였다. 이집트의 아유비드 왕조 술탄은 이 와중에 죽고 권력은 아들을 거쳐 부인에게 넘어갔다. 바이바르가 지휘하는 맘루크 부대는 반격을 개시, 루이 9세를 포로로 잡았다가 돈을 받고 풀어주었다. 정권의 불안정이 계속되다가 맘루크 부대장 쿠투즈가 왕이 되어 바흐리 王朝를 창건하였다. 1259년의 일이다. 奴隸戰士 집단이 왕조를 세운 것이다. 이듬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決戰에서 승리한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후레구는 1258년에 바그다드를 점령,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압바시드 왕조의 왕을 죽이고,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를 향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몽골군 사령관 키트부가는 기독교인이 된 튀르크族이었다. 이슬람 文明세계는 이집트만 남은 상태였다. 1260년 9월 지금의 이스라엘 아인 잘루트(예루살렘 북쪽)에서 몽골 기마군단과 이집트 맘루크 기마군단이 정면대결하였다. 후레구는 몽골의 칸이 죽어 歸國하였고, 그의 부하 키트부가가 지휘를 맡았다. 양쪽은 각기 1만~2만으로 추정되는 기마군단을 동원하였다. 兩軍의 主力은 다 같이 튀르크族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생리를 잘 아는 사이였다. 말과 활, 그리고 기습과 기만과 역습을 주로 하는 戰法도 비슷하였다. 맘루크 부대를 지휘한 것은 쿠투즈 왕과 바이바르 장군이었다. 하루 만에 끝난 이 결전에서 맘루크 기마군단이 압승, 몽골군의 지휘자 키트부가를 잡아 처형하였다. 戰史학자들은 맘루크 騎馬軍團이 승리한 이유를 조직적인 훈련과 이슬람 교리로 무장한 정신력에서 찾으려 한다. 그 뒤 시리아를 중심으로 맘루크와 몽골군의 싸움이 계속되는데, 일진일퇴를 거듭하지만 몽골군은 아프리카로 들어오지 못한다. 맘루크는 몽골군의 말발굽으로부터 이슬람 文明을 지켜낸 것이다. 뿐만 아니다. 맘루크 군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은 십자군 세력도 몰아냈다. 기독교와 몽골군으로부터 이슬람을 지켜냈다는 게 맘루크의 브랜드가 되었다. 아인 잘루트에서 개선한 바이바르 장군은 쿠투즈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들은 산업을 발전시키고 카이로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맘루크들은 재산을 상속할 권한이 없었다. 돈을 모으면 當代에 다 써야 했다. 주로 건축물을 짓는 데 썼다. 지금 카이로에 남아 있는 이슬람 건축물들은 맘루크 시대 것이 많다. 유목기마민족 출신, 즉 맘루크, 튀르크, 몽골족은 권력세습을 부정하였다. 권력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가장 힘센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맘루크 시대에 王(술탄)은 제 命대로 사는 경우가 드물었다. 늘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王이 죽으면 다음 王은 實力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권력투쟁이 극심하였으나 사회는 活力이 있었다. 맘루크 왕조 시절 카이로와 이집트는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중심이었다. 영토도 지금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北아프리카로 확장되어 오스만 터키가 패권을 잡기 전엔 가장 큰 이슬람 帝國이었다. 맘루크 시절 이집트는 카이로를 흐르는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팠다. 카이로는 나일강 下流를 통하여 지중해와도 연결된다. 즉,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 무역을 중계하는 立地를 갖게 된 것이다. 맘루크는 베니스와 함께 東西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이슬람 세계를 종교적으로 통치하는 교황을 칼리프라고 한다. 8세기 초, 이슬람 主力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움마야드 칼리프 체제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에 압바시드 칼리프 체제를 세웠다. 1258년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점령, 칼리프를 죽였다. 그 3년 뒤 이집트 맘루크 왕조는 압바시드 칼리프 체제를 카이로에서 재건, 이슬람의 정통을 잇는다. 맘루크 왕조는, 1517년 오스만 터키 군대에 패전, 이집트는 屬國이 된다. 맘루크 軍과 오스만 터키 軍은 튀르크족을 主力으로 한 점에서 비슷하였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맘루크 군대는 그때까지도 기마전술에만 의존하였으나 터키는 기마부대뿐 아니라 소총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스만 터키가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 되면서 문화의 중심도 카이로에서 이스탄불로 옮겨갔다. 오스만 터키의 술탄은 이슬람 교황(칼리프)도 겸하도록 하였다. 오스만 터키가 명실공히 이슬람 세계의 정치와 종교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오스만 터키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데 여전히 계급화된 맘루크 세력을 활용하였다. 맘루크 세력은 이집트의 지배층으로서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1798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였을 때 그들을 맞아 싸운 것도 맘루크 기병이었다. 포병과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 군대는 카이로 근방에서 벌어진 이른바 피라미드 전투에서 간단하게 맘루크 騎兵을 제압하였다. 나폴레옹은 맘루크 기병의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였다. 맘루크 戰士를 호위병으로 채용하고 맘루크 출신의 기병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1805년의 아우스텔리츠 전투와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지금의 체코 브루노 근교에 있는 아우스텔리츠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프랑스의 大勝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王家가 이끌던 神聖로마제국이 800년만에 해산된다. 맘루크 세력의 역사적 역할이 끝난 것은 1811년 3월1일이다. 나폴레옹이 영국군의 공격을 받고 이집트에서 물러난 후 다시 이집트의 통치권을 회복한 오스만 터키는 알바니아 출신인 모하메드 알리를 이집트 총독으로 보냈다. 그는 이집트의 봉건영주 계급 역할을 하는 맘루크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알리는 이날 700명이 넘는 맘루크 지도자들을 시타델이라고 불리는 궁전으로 초대하였다. 연회를 베풀겠다고 속인 것이다. 맘루크 지도자들이 말을 타고 正門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지날 때 미리 매복시켜놓았던 알리의 군대가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한 명만 살아서 달아나고 전원 학살되었다. 그날 밤 알리는 부하들을 지방으로 보내 맘루크 영주들을 다 죽였다. 1206년엔 이슬람이 지배하던 인도에서도 맘루크 戰士들이 왕조를 만들고 1290년까지 집권하였다. 이 기간 맘루크는 인도를 몽골군단으로부터 지켜냈다. 이라크는 1747년부터 1831년까지 맘루크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오스만 터키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하였다. 이들은 주로 그루지아 출신이었다. 1831년 오스만 터키 정부는 맘루크의 마지막 지도자 다우드 파샤를 타도하고 직할 통치를 하게 되었다. 맘루크의 군사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군사제도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해병대 장교들이 행사 때 착용하는 禮刀(예도)는 맘루크 칼이다. ,,,,,,,,,,,,,,,,,,,,,,,,,,,,,,,,,,,,,,,,,,,,,,,,,,,,,,,,, 新羅에 온 아랍-페르샤인들 Shilla를 서방에 맨처음 알린 것은 9세기 아랍인들. 趙甲濟 9세기에 신라는 동지나해를 지배한 해양세력이었다. 장보고는 중국 山東省에 본부를 놓고 중국의 곳곳에 신라인의 네트웍을 형성했고 일본에도 연락책을 두고 있었다. 유럽과 중동에선 이때 아랍과 페르샤의 해양세력이 인도양과 지중해를 주름잡고 있었다.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 스페인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이슬람인들은 배를 타고 중국(唐)에 와서 무역을 했다. 일부 이슬람 상인들은 신라에까지 왔다. 이렇게 하여 신라가 처음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신라"라고 정확하게 발음했다. 아랍어 표기를 영어로 옮기면 Shilla, 또는 Silla가 된다. 페르샤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라는 이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중국 너머엔 황금이 풍부한 신라가 있다. 이 나라에 들어간 이슬람 교도들은 신라에 매혹되어 떠날 생각을 포기하고 정착해버렸다> 신라에 아랍-이란계통의 이슬람 교도들이 와서 살았다는 증거는 많다. 경주 掛陵(괘능)의 武人石像은 페르샤 사람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이 무덤은 798년에 죽은 원성왕의 것이라고 한다. 836년에 죽은 흥덕왕릉에도 비슷한 조각품이 있다. 아랍-페르샤인들이 신라에 와서 근위대원으로 일했을지 모른다. 처용전설도 아랍인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항해술이 발달한 아랍과 신라상인들이 서로 만나고 무역을 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말을 잘 타고 배를 잘 몰았던 신라는 草原의 길과 바다의 길을 두루 장악하고 있었다. 7세기말 신라 사신이 초원의 길을 따라서 지금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소그디아 왕국에 갔다는 증거가 있다. 사마르칸트 박물관에 보존된 벽화그림에 신라인 복장을 한 사신이 보인다. Korea 이전에 Shilla가 먼저 이슬람 사회에 알려진 것이다. 아랍 지리학자 알 마수디는 7세기에 움마야드 왕조의 탄압을 피해 시아파 이슬람인들이 신라로 도망쳤다는 기록을 남겼다. 1970년대 중동의 건설시장으로 한국이 진출하여 집단적인 中東체험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서로 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아랍과 신라가 다 전성기에 있을 때였다. |
출처 : 迎瑞堂
글쓴이 : 素夏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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