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인사이드 - 경찰팀 리포트 < 서울청 경제범죄특별수사대 >
세금 한 푼 안내고 金 수입하고, 진료기록 조작해 보험금 타내고…
범인은 있는데…피해자는 없다?
고소·고발없는 사건 전담…베테랑 수사관 24명 맹활약
경찰 유일의 자금추적반 가동
각계각층 사람들 만나며 첩보 모으는 게 수사 시작
병원 보험사기 파헤칠 땐 7개월간 각종 기록 싹 뒤져
26일 서울 사직동 서울지방경찰청 1층 경제범죄특별수사대 사무실에서 임욱성 대장(왼쪽 두번째)이 고철문 1팀장(세번째)에게서 내사 중인 사건의 진행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2004년 10월 이모씨(당시 53세·여)는 서울 종로에 N골드 등 6개 회사를 세웠다. 금지금(金地金·순도 99.5% 이상의 금괴) 수입·도매·가공·수출업체라고 간판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모두 ‘유령회사’였다.
이씨는 수출용 금 가공품의 원재료로 쓰겠다며 4개 수입업체로부터 1㎏짜리 금괴를 사들였다. 수출용 가공품의 원재료로 사용되는 금괴를 살 땐 영세율(零稅率·부가가치세 비부과)을 적용받기 때문에 금괴 판매가격에 붙는 10%의 부가세는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들인 금괴는 전혀 가공·수출하지 않고, 수입된 형태 그대로 서울 종로3가 등지에 있는 귀금속상에 되팔았다. 금 가공품 대신 일본 오사카의 수입사 A사에 수출한 것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산 구리로 만든 목걸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씨는 3년간 총 109억원가량의 세금을 포탈했다. 1000억원어치의 금괴를 세금 한푼 내지 않고 사들이면서도 국세청과 관세청 등 세무당국에는 단 한 번도 적발되지 않았던 것이다. 감독 당국이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손을 놓고 있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씨로 인해 물질적·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그를 고소하거나 민원을 제기한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 없는 범죄’였다. 이씨는 지난해 5월에야 경찰에 구속됐다.
감독 당국의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묻혀버릴 뻔한 이씨의 범죄 행각을 적발해낸 것은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특별수사대(대장 임욱성) 대원들이다. 수사경력 14년차의 강성운 경위(43)를 필두로 대원 5명이 달라붙어 8개월에 걸쳐 추적한 끝에 올린 개가였다.
당시 강 경위의 수사는 친분이 두터운 한 지인의 제보로부터 시작됐다. 지인은 2010년 9월 강 경위와 저녁식사 도중 지나가는 말로 “요즘 금 밀매로 재미를 보는 애들이 있다는데…”라고 했다. 강 경위는 이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속칭 ‘나까마’(중간책)로 불리는 종로3가 금 중간 유통상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한 끝에 이씨 회사가 ‘면세금을 빼돌리고 있다’는 첩보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일본 주재 경찰에도 협조를 요청, 이씨 회사가 금을 수출한다는 A사가 오사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특별수사대는 사기·횡령·보험사기·주가조작 등 경제범죄를 전담 수사하는 경찰 내 유일한 수사팀이다. 경제범죄가 갈수록 조직화, 전문화, 지능화, 광역화함에 따라 이 분야 전문 수사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2007년 1월 출범했다. 임욱성 대장 밑에 23명의 대원은 평균 경력 9년 이상의 남성 베테랑 수사관들이다. 수사1팀(6명)과 수사2팀(6명), 금융범죄수사팀(8명·자금추적반 2명 포함), 관리팀(3명)으로 구성된다. ‘1000억원어치 금지금 변칙거래 사건’ 외에도 ‘되의뢰 병원(치료는 다른 병원에서 받게 하고 숙식만 제공하는 병원) 보험사기 사건’(2011년), ‘302억원 코스닥 상장사 주가조작·횡령 사건’(2011년), ‘35억원 휴대폰 소액대출 사기 사건’(2012년) 등 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했다. 임 대장은 “국가 경제를 무너뜨리고 막대한 국민 세금을 쏟아붓게 하는 반국가적 악성 범죄에 대처하는 게 우리 조직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고소·고발 없는 ‘암수(暗數) 범죄’
경제범죄특별수사대가 다루는 경제범죄 사건은 피해자가 없거나, 있어도 신고를 하지 않아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해 공식적 범죄통계에 잡히지 않는 ‘암수 범죄’가 많다. 고소·고발 사건은 다루지 않는다. 이 때문에 수사대 대원들은 정보원이나 지인 등을 통해 우연한 기회에 입수한 첩보나 풍문을 바탕으로 수사에 착수하는 경우가 많다. 임 대장은 “경제범죄는 밑바닥 수사, 저인망식 첩보활동이 중요한데 이 부문에서 대원들만의 노하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간 관리해온 폭력·절도 전과자에서부터 금은방 주인, 시민단체 회원, 손해사정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을 매일 만나 범죄 동향을 수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제범죄라고 해서 회계장부만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범죄 첩보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정보원 한두 명 만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 만나는 게 습관이 돼 있어야 해요. 신용카드는 매달 사용한도가 초과돼요.” 강성운 경위의 말이다.
○보험사기사건에서 수만건 서류 뒤져
수사대 대원들은 이렇게 입수한 첩보와 인적 정보를 토대로 한 조각 한 조각 퍼즐 맞추듯 혐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나가는데, 이 과정에서도 피해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지난 6월 수사대는 피해자만 3600명이 넘는 685억원대 불법 유사수신업체를 적발했다. 하지만 수사 초기 피해자들이 ‘당신 (사기) 당했다’는 수사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조사에 응하려고 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보험사기 사건 등 피해자가 ‘국가’나 ‘국민 전체’인 사건의 경우엔 더 힘들다. 피해자 진술이 없다 보니 내사 단계에선 혐의 입증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수집·분석하는 데만 오랜 시간을 쏟아붓는다. 지난해 ‘되의뢰 병원 보험사기 사건’ 땐 수사2팀 2명,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 2명, 금융감독원 직원 4명, 손해사정인·간호사 3명 등 총 11명이 투입돼 7개월 동안 병원 진료기록부와 바이탈 사인(체온·맥박·혈압 등 수치) 체크일지 수만 건을 일일이 대조한 끝에 5개 의원의 범죄 사실을 밝혀냈다. 경력 14년의 수사2팀 홍진표 경위(45)는 “한 사건을 최소 몇 달에서 길게는 1년을 수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기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심도있는 기획수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보원 위장취업시켜 유사수신업체 적발
범죄 액수만 수십~수백억원에 이르는 지능범을 상대하기 때문에 수사대 대원들은 갖가지 수사기법을 동원해 경제범죄 사건의 숨은 진실을 밝혀낸다. “경제사범들은 워낙 머리회전이 빨라요.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었는데도 오히려 ‘피해자가 주범이다’는 식으로 부인하는 범인도 있습니다. 사전증거를 충분히 준비한 다음 조금씩 압박해 들어가지 않으면 도리어 당할 수 있어요.”(홍진표 경위)
가장 먼저 잡힌 범인이 공범들의 행방을 털어놓는 것을 일선 수사관들은 ‘만세를 부른다’고 한다. 수사대도 종종 이걸 잘 이용해 진술을 유도한다. 수사대는 지난 8월 경기도 화성의 시가 50억원 상당의 토지를 자신의 땅이라고 속여 땅 구매자에게서 2억원의 계약금을 가로챈 혐의로 이모씨(40·여)를 붙잡았다. 그런데 공범 2명의 행방이 오리무중이었다. 경력 11년의 고철문 수사1팀장(53)은 “생활형편, 관심사 등을 충분히 얘기하면서 경계하는 마음이 누그러지자 공범에 대해 털어놨다”고 말했다. 지난 6월에는 유사수신이 의심되는 업체에 정보원을 위장취업시켜 범죄 정황을 파악한 뒤 급습하기도 했다.
○국내 경찰 유일의 ‘자금추적반’
수사대엔 국내 경찰 조직 내 유일의 자금추적반이 따로 있다. 범죄자금 추적 분야에서만 7년 넘게 잔뼈가 굵은 송용준 경사(41)는 “자금 추적은 모든 경제범죄 수사의 출발점”이라며 “끈기와 집념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300억원대 코스닥 상장사 주가조작·횡령 사건’을 수사할 땐 총 114개의 계좌를 끈질기게 추적·분석했다. 6개월에 걸친 자금 추적 과정에서 나온 수사 자료만 1500페이지에 달했다. 송 경사는 “첩보는 ‘카더라’식의 피상적인 정보일 경우가 많다”며 “이를 구체화하는 게 우리 임무”라고 말했다.
하헌형/이지훈 기자 hh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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