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글:정만진, 편집: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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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끝에서부터 외삼문, 사당 표충사, 오른쪽 끝에 재실 영모재가 보이는 조헌 유적지 전경. 묘소는 사당과 재실 사이로 나 있는 솔숲 오르막길을 70미터가량 오르면 나타난다. 이 사진에서는 영모재 뒤편이다. 홍살문 아래를 지나 외삼문으로 직진하는 것이 사당을 둘러보는 올바른 답사이지만 이 사진에는 홍살문이 들어 있지 않다. |
ⓒ 정만진 |
유적지의 도로명주소 도농1길 71은 구주소로 도농리 931번지이다. 이렇게 도로명주소를 구주소로 바꾸어서 소개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옥천 조헌 신도비'의 주소가 문화재청 누리집에 (도로명주소가 아닌) 도농리 926-1번지로 나오기 때문이다.
도농리 931번지와 도농리 926-1번지는 숫자가 대략 비슷하다. 이는 유적지와 신도비가 서로 인접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본래 신도비가 묘소로 가는 길 입구에 세워진다는 것을 두 곳의 구주소는 비슷한 숫자를 통해 잘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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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본 사당과 외삼문의 풍경. 동그라미로 표시한 지점에 신도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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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끝에 서면 '옥천 조헌 묘소 종합 안내'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손님을 맞이한다. 안내판은 주요 시설에 '(1)조헌 묘소 (2)표충사 (3)영모재 (4)조헌 신도비 (5)주차장, 화장실' 식으로 번호를 매긴 후 지도와 함께 보여준다. 각각의 위치를 답사자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세심한 안내판이 정겹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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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헌 유적지 주차장 중 영모재가 바로 보이는 지점에 세워져 있는 아주 친절한 안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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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유심히 안내판을 읽은 답사자는 '옥천 조헌 묘소 종합 안내'가 묘소 중심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곧장 알게 된다. 제목부터가 그렇고, 내용도 묘소가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데 대해서만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충사와 영모재도 어엿한 충청북도 문화재자료이건만 그 둘의 지정 목록, 지정 번호, 지정일, 시대, 분류, 면적 등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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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헌 선생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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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표충사와 영모재는 조헌 의병장의 충의로운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건물들이다. 만약 조헌 선생이 왜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분연히 창의를 한 바 없고, 청주성을 탈환함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입을 차단한 바 없고,
마침내 금산성에서 장렬히 전사하지 않았다면 사당과 재실이 지금처럼 당당한 모습을 갖추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표충사와 영모재는 조헌 선생의 묘소에 따르는 부속물이라 할 만하다. 달리 말하면, 조헌 선생 유적지의 중심이 묘소인 것은 당연하다.
조헌의 상소 불사르는 선조의 놀라운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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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헌 선생과 그의 아들 조완기 선생을 모시고 있는 사당 표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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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조는 조헌의 창의가 '조명(釣名)' 행위에 불과하다고 폄훼했다.
선조는, 낚싯꾼이 고기를 얻으려고 낚시를 하는 것처럼 조헌은 명예를 낚으려고 의병을 일으켰다는, 터무니없는 악담을 퍼부었다. 게다가 선조가 그런 말을 내뱉은 때는 조헌이 금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했다는 사실이 조정에 전달된 직후였다.
이는 장기간에 걸쳐 임금인 자신과 조정을 비판해온 조헌에 대한 선조의 졸렬한 대응이었다. 조헌이 선조에게 바치려고 쓴 '16조소(十六條疏)' 중 '청언지도(聽言之道)'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서 읽어본다.
'대개 전하께서는 신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시니 (중략) 식견 있는 선비들은 이 세상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아서 내직(중앙정부 근무)에 있는 사람은 먼 곳으로 가버릴 것을 생각하고,
(중략) 외직에 있는 자는 모두가 목을 늘여 밝은 정치를 바라다가도 도로 목을 움추리며, 다행히 진출하게 된 자도 서로 상황을 관망하고 혀를 차며 탄식하면서도 (중략) 세금을 도둑질하여 부모를 봉양할 계책만 생각합니다.'
글의 요지는 대략 선조가 신하들의 바른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질타이다. 선조가 좋아했을 리 없다.
그런데 조헌은 이 건의문을 1574년(선조 7)에 지었지만 정작 선조에게 올리지도 않았다. 조헌은 선조가 이런 충언을 받아들일 만한 '인군(仁君)'이 못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해 5월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11월에 귀국한 후 조헌은 중국의 제도를 참작하여 조선을 개혁하자는 '8조소(八條疏)'을 올렸지만 선조가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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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사 내의 조헌 선생 초상 |
1587년에도 선조는 조헌이 올린 '만언소(萬言疏)'를 불태우는 역사적 유례가 없는 기행을 연출한다.
'왜적의 계획은 동쪽에서 충돌하고 서쪽을 공격하고자 하지만 감히 경솔하게
서해변에 정박하지는 못할 것이고, 반드시 여러 차례 지나다녀 본 영남 지방을 먼저 쳐서 곧장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을 연 다음, 군사를 나누어 호남 지방을 손아귀에 넣는 계책을 쓸 것입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왜군이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호남으로 먼저 진격해 올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조헌이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한 대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곧장 한양으로 진격했다.
일본이 쳐들어오고, 그리고 영남을 주공격 지역으로 삼을 것이라는 조헌의 예언을 선조와 조정이 받아들였더라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임진왜란 발발 예측하고 대비 주장한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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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삼문(위)와 표충사의 두 현판에는 모두 忠(충)이 들어 있다. 충은 조헌 선생의 충의 정신을 표상한다. |
ⓒ 정만진 |
조헌은 "명종 대에는 윤원형 하나로 인해 임꺽정의 난과 을묘왜변 등 내외가 소란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사람이 백 명이나 있는 것 같다" 식으로 류성룡 등 동인의 영수들과, 그들에게 정권을 맡긴 선조를 노골적으로, 줄곧 비난했다.
스승 이율곡은 조헌을 "훌륭한 치적을 왕에게 기대하다가 자기의 뜻과 같지 않으면 반드시 강경한 언사로 직언하는" 인물로 "시세를 헤아리지 않는' 선비라고 평가했다.
동인 집권기에 서인이었던 조헌, 좌고우면하는 법 없이 임금이든 조정 최고위 고관이든 가리지 않고 강경한 직언으로 공격한 조헌, 따라서 그는 애당초 제대로 평가받기가 어려웠다. 특히 임금인 선조가 그를 지독히 꺼려했으니 설상가상이었다.
이석린은 '조헌의 개혁론이나 왜군대비론은 국가정책에 반영되지 못했고, 후세에 가서야 정당한 평가를 얻게 되었다'면서 '조선 정치사에 있어서 조헌의 개혁론이 차지하는 위치는 컸으며, 그의 의병 활동이 임진왜란사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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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 영모재 |
ⓒ 정만진 |
'조헌(趙憲, 1544-1592) 선생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후율(後栗),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1567년(명종 22)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해 9월초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왜군이 호남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달려가 많은 적을 막다가 700 의병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헌 선생의 유해는 순절 후 아우 조범(趙範)에 의해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 후율당 근처에 묻혔다가 1636년(인조 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표충사와 영모재 뒤쪽 동쪽으로 향한 산자락에 묘소가 있다.
둥근 봉분 앞에는 2기의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상석 등이 있다. 묘비는 1664년(현종 5)에 송시열이 짓고 써서 세운 것과, 1920년에 송래희가 쓴 것이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옥천 조헌 묘소' |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에 후율정사를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공격하는 데 앞장 섰으며,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700명의 군사로 수만의 왜적과 싸우다 전원 전사하였다. 그 후 선생의 제자들이 700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곳에 합장하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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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살문 아래로 사당 외삼문이 보이는 풍경 |
ⓒ 정만진 |
사당 앞 안내판은 '옥천 표충사'에 대해 '조헌 선생 순절 후 1608년(선조 41)에 처음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에 세워 이듬해 조정에서 편액을 받은 사당이다,
그러나 여러 번 수해를 입자 1650년(효종 1)에 이원면 이원리 현리마을에 옮겨 세웠고, 1682년(숙종 8)에 김집(金集)과 함께 제사 지내며 조정에서 창주서원(滄洲書院)이란 편액을 받고 이름을 바꾸었다'라고 소개한다.
금산성에서 아버지와 함께 죽은 아들 조완기
그 후 1721년(경종 1)에 이르러 '권상하 등이 조헌 선생 묘소 아래에 사당을 다시 세우고 표충사라 하였다,
1734년(영조 10) 왕은 편액을 내려준 뒤 조헌 선생의 아들로 금산에서 함께 순절한 조완기(趙完基)를 함께 제사 지내게 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안쪽에는 마루를 깔았고, 가운데 칸에 조헌 선생과 아들 조완기의 위패를 모셨다.' 안내판의 마지막 문장은 '사당 바깥으로 돌담장을 돌렸고, 삼문을 통해 출입한다'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돌담장이 사당 바깥 사방으로 온통 둘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당과 재실로 오가는 부분에는 돌담장이 없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문을 통해 출입하지 않고 돌담장이 터져 있는 그 부분으로 오간다. 사당을 찾는 고전적 예의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현대적 편의에는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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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 영모재에서 사당으로 접근하는 지점에는 담장이 없다. 본래 사당은 외삼문으로 출입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조헌 유적지는 출입하기 편하게 이렇게 담장을 터 두었다. |
ⓒ 정만진 |
문화재청 누리집의 '조헌 사당(표충사)' 해설 |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조헌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며 유학자이다. 조선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1년(1568)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교수를 역임하였고 선조 5년(1572)에는 교서관에 속하였다. 선조 15년(1582)에는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었다.
그러나 왕의 진노를 사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등 1600여 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전라도로 진격하던 중 왜군을 만나 모두 전사하였다. |
안내판의 마지막 대목은 '지붕 아래로 서까래에 산자(기와를 얹기 위해 가는 오리나무나 싸리나무 따위를 엮은 것)를 엮은 후 흙칠로 마무리한 고미반자(일종의 이중 지붕)로 천장을 마무리하여 실내의 보온을 고려하였다,
이 재실은 배치와 공간 구성 등 건축 구조에서 옥천 지역의 특징적인 가옥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라는 해설로 끝난다. 산자와 고미반자라는 고건축 용어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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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 영모재의 현판 |
ⓒ 정만진 |
문화재청 누리집의 영모재 해설 |
이 건물의 초창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청의 종도리 장혀에"煎建築崇禎四壬申十月三日重建 檀紀四千三百三年庚戌三月二十一日午時立柱酉時上梁 庚坐甲向…"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12년 창건하고, 1970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모재가 위치한 도농리 주변에는 중봉 조헌 선생 묘소, 중봉 조헌 선생 신도비, 표충사 등 중봉 조헌 선생 관련 유적이 주변에 많이 있다. 그리고 평면 형태는 중부지역의 "一"字形의 전형적인 유형으로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전면은 사다리꼴의 원형주초, 나머지는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방형기둥을 세웠다. 1970년 큰 중수가 있었으나 1812년 축조된 건물이지만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으며, 건축부재, 건축구조, 마루청판, 고미반자, 축조기술 등이 종합적으로 볼 때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에 짝 잃은 기러기는 오락가락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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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 영모재와 사당 표충사 중간 지점에 세워져 있는 조헌 시비 |
ⓒ 정만진 |
비 내리는 날씨, 앞이 잘 안 보이는 안갯속, 빈 배, 짝 잃은 기러기...... 조헌 선생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진다.
아득한 오지로 귀양 보내야 할 '요사스러운 귀신'으로 임금의 폄훼를 받은 조헌, 금산성에서 왜적들과 처절히 싸운 끝에 700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후에도 '출세하려고 의병을 일으킨 자'라는 참혹한 임금의 험담을 들은 조헌...... 시비 앞에서 웬지, 문득 눈시울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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