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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越南(월남) 패망의 현장 목격자 李大鎔 (이대용, 당시 駐越대사관 공사)의 惡夢(악몽)’ |베트남의 역사, 문화, 사회 /by 정론직필

good해월 2016. 6. 6. 10:35
‘越南(월남) 패망의 현장 목격자 李大鎔 (이대용, 당시 駐越대사관 공사)의 惡夢(악몽)’ |베트남의 역사, 문화, 사회
정론직필||조회 529|추천 11|2014.11.06. 16:30http://cafe.daum.net/sisa-1/oo7k/45 

유감스럽게도....월간조선 원본 주소는 찾지 못했습니다.


암튼, 아래 내용은 월간조선의 기사라니

그 내용을 적당히 가감해서 읽어야만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패망한 "자유월남"의 실체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월간조선 ‘越南 패망의 현장 목격자 李大鎔 (당시 駐越대사관 공사)의 惡夢’(2000.06.30) 의 전문이다.  


‘越南 패망의 현장 목격자 李大鎔 (당시 駐越대사관 공사)의 惡夢’(2000.06.30)

정리 金 容 三 月刊朝鮮 기자: yskim@chosun.com  


[편집자 注] 기자는 최근 李大鎔(이대용) 陸士총동창회장을 만났다. 월남 패망 당시 駐越(주월) 한국대사관 경제담당 公使(공 사)로서 월남 패망 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맹군에 체포돼 5년간 억류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 李회장은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 장면이 꿈에 나타난다』면서 『베트남과 한 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란성 쌍둥이』라고 말했다.  


李회장은 『대통령과 학자, 지식인들이 우 리와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통 일의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월남 패망을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 다음은 李회장의 증언을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  


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 그래서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역사를 표현할 때 흔히 반만년 배달민족이라고 하는데, 월남 은 「반만년 黃龍(황룡)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국가체제를 이룬 역사적 시기도 비슷하고, 중국이 팽창하면 조공을 바치고 중국 이 혼란에 빠지면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 도 비슷하다.  


越南(월남)이란 지명은 중국 전국시대에 越 (월)족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나라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全세계에서 과거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나라는 중국을 제외하면 朝鮮과 越南이 그 표본이다. 모든 역사와 人名이 한자로 기록된 것도, 중국의 주변부에서 민족이 소멸당하지 않고 생존한 것도 兩國이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한번 성립된 왕조는 그 수명이 평균 500년인데 비해 월남은 120년으로 우리보다 짧다. 월남이 우 리보다 분열이 더 심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남북 의 허리가 잘려 분단된 사실, 그리고 北에 는 공산정권, 南에는 자유 민주정권이 수립 된 것도 비슷하다. 양측이 무력을 동원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사실도 동일한 역사적 패턴을 보인다.  


지역감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 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親佛·親日·親中 派)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세력간의 끝없는 분파와 이합집산, 政爭(정쟁)을 벌이는 것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가. 


1954년 7월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해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 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이하 월남 )이,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이하 월맹)이 수립됐다. 


이후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自主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 의 도움을 받았고,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 이 파병돼 싸운 것까지 한국과 비슷하다. 이후 청렴결백했지만 독재를 추구하는 고 딘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 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반복됐다. 이 와중 에 정권은 부패와 내부 분열을 거듭 했다.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 戰費(전비)와 간접 戰費를 합쳐 연간 495억달러(1968년), 509억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駐越미군 병력도 53만6 000명선을 파병할 정도로 개임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戰의 수렁에서 발 을 빼기 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서 美-월맹 간 비밀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3일에 벌어진 월남 대 통령 선거에는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 양상을 보인 끝에 웬반티우가 대 통령에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유세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北爆(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北爆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미국 국민들의 反戰( 반전) 여론을 자극했다. 


그가 공산 프락치 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회담을 진행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 는 두 부류로 國論이 갈렸다. 여당은 강력 한 反共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졌 던 월남 정부는 大勢(대세)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감으로써 美-월맹 2者회담은 1969년 1월15일부터 美 -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후에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월맹의 4者회담으로 확대됐다.    


한쪽에선 평화회담, 다른 쪽에선 對南공작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 등이 서명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4개 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했다 . 


한편 월맹에서는 인질 형식으로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 에 체류했다. 이것도 믿지 못해 영국·소련 ·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을 서명에 참여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12개국이 담보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이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北爆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약속했 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를 월남에 양도,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적어도 휴전체제가 10년은 갈 것으로 낙관했다. 


미국의 골칫거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되면서 全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 책,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으로 세계 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大勢라고 착각했다.  


파리 휴전협정의 성과로 키신저와 레둑토는 197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세계인들은 그가월맹의 黨 서열 5위였기 때문에 동양적 겸양의 표시로 이해했다. 결국 키신저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北爆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니, 전략은 변함이 없으되 전술만 약간 바꾼 셈이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對南 기본전략을 더욱 공고히 다듬었다. 그것 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북한의 對南전략과 한치의 오차도 없다.  


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으나…  


휴전협정이 체결됐을 때 월남의 국토 44개 省 중 12개 省의 곳곳에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월남은 총 인구의 90.5%를 지배했고,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지역, 나머지 4.5%는 공산측 지배지역이었다. 월남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內 에서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 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찬 對南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 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민족해 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 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다 .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 명, 인민혁명당원 4만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 고 있었다.  


1969년 6월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베트콩)로 개편될 때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內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 후면 상세히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對共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만 남았다. 그들은 對월맹 정보 수집은 물론,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도 무력했다. 


한 나라를 가장 쉽게 망하도록 하는 길은 그 나라 정보기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對共기관이 정권의 부침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간첩 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 한 사실을 나는 우려한다. 월남 패망 당시 外敵(외적)이 아니라 내부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낙관했다. 월맹군이 도발하면 즉시 美 해·공군이 개입하여 北爆을 재개할 것이고, 對월맹 경제원조도 중단하며, 월등한 월남군의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 따라서 누구도 공산군의 남침을 믿지 않았다.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고, 극심한 政爭 의 원인이 된 것이다.  


1975년 9월에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大選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연출했다. 고질적인 社會惡이었던 뇌물과 마약 ,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전염병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 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정규군 58만명 중 10만명이 위장 휴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명이었는데, 이 중 10만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 심지어 장군들이 운영하는 私기업에 파견돼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유령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나는 軍 재직 시절, 美 육군참모대학에서 훗날 월남 대통령이 된 티우씨와 만났다. 그 후 주월대사관 武官(무관)으로 파견됐을 때 티우는 대령으로서 사이공 부근의 사단장으로 재직중이었다. 그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朴正熙 대통령이 나를 다시 월남으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티우 대통령과는 속 깊은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독재는 했지만 청렴결백했던 고딘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입대했는데, 이름만 군적에 둔 채외국 유학을 떠났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는 등한시함으로써 체제 파괴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남한의)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가 언론에 공개되는 모습은 25년 전의 월남에서 벌어진 일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 야 하는가』 하며 戰意를 상실했다. 이것이 월맹보다 월등한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진 월남 군대가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 장 큰 원인이다.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救國 평화 회복 및 反부패 운동세력」이라 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反부패 운동 에 나섰다. 


문제는 이 순수한 反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대한 反정부 세력으로 변질됐다는 점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反戰운동, 인도주의 운동 등 가능한 모든 운동체가 총동 원되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1975년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공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 여 좌익 단체의 선전戰에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油田(유전)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들떴고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 회의가 열렸다. 레준 서기장은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것이라며 남침전쟁 결론을 내렸다.  


1975년 1월8일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 이 1975년 2월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 원지대의 전략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했다.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한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했다. 반띠엔 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철저히 위장을 했다.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 무렵 나는 월맹군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당시 월남군 중 정예부대는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이었다. 나는 티우 대통령에게 『지금 월남은 게릴라 전쟁터가 됐습니다 .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하니 도지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 민병대 병력을 무장시켜 공수 사단과 해병사단을 각각 군단으로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제안했다.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北爆으로 거덜났는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 하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反共 지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有備無患(유비무환)을 잊었고, 軍도 총체적으로 부패했다. 그의 머 리 속에는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것으로 낙관하여 우습게 보았던 것이다.  


우익·애국인사 암살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大越黨(대월당)이 분열하여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 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월남에서 체험한 政爭과 어찌 그 리 닮은꼴인가.  


그 무렵 反共을 외치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年 평균 840명이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反共지도자 웬반흥,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지도자, 反共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反共,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 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이 와중인 1975년 3월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 각지에 분산 고립돼 있던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 게 허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 『즉각 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티우 대통령의 對국민 호소가 발표되자 「救國평화회복 및 反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反민주, 反독재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對越(대월) 방위공약을 믿고,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 기회에 티우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어 몇 개월 후 실시될 大選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다른 야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 이 와중에 웬까오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통일 후 감옥으로 간 反체제 운동가들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 월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을 달리듯 南下할 때 「유령군인」, 「꽃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4월21일 티우 대통령이 下野(하야)하고 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때까지 미국은 對越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4월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중이던 월남군 제5사단 장 레웬비 장군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월맹군 포위망을 공격했다. 이 와중에 월남군 제5사단은 월맹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항전을 벌이다 궤멸당했다. 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조국과 운명을 함께 했다.  


4월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월남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 그러나 월남군 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웬비 준장, 제7사단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모두 권총자결했다.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공무원 ·지도층 인사·정치인들은 모두 체포돼 간 개조 학습소에 수감됐고, 이 중 多數는 生死 불명 상태가 됐다. 공산정권은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 부대 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죄수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反체제 운동을 벌이던 종교인, 학생, 민주 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수감됐다. 그들의 수감 명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反체제 활동을 하던 자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한편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이 중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이 참혹한 패망의 역사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강대국과 맺은 방위공약,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절대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자기 국가의 안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안보는 미국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휴전협정도 아닌, 오직 自國의 군사력이 담보할 뿐이다 . 체제가 안정됐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잠꼬대에 불과하다.  


내가 체포되기 전에 사이공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사실은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도 없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어 질질 끌고다니며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칠갑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파리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외국의 일부 언론은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휴전협정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우려했다. 키신저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자유월남의 시체 위에서 얻은 「비극의 노벨 상」이었다.●  


출처: http://www.libertyclub.org/bbs/zb41/view.php?id=top_4&page=2&sn1=&divpage=

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desc&no=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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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스크랩] 1975년 패망월남(="자유월남")의 보트 피플(Boat People)이 어떤 사람들이죠? - "보트 피플"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베트남의 역사, 문화, 사회


6 숙청


같은 해 같은 달에 들어선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에서 악질 공산주의자들이 설쳐서 진짜 200만명이 처형되거나 굶어죽은것과 달리. 베트남의 경우 사정은 좀 낫다. 1975년부터 10년간 사법적 과정 없이 처형된 자들은 65,000명 정도며, 많이 잡으면 10만명 정도이니까.


양민학살이나 심각한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관리나 지주 대부분은 재교육 캠프에 들어갔다가 80년대 석방되었고, 이 숫자는 100만명 정도 된다. 공산정권은 특별히 베트콩에 잔혹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그다지 부패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해외로 망명을 허가해주기도 했다.


또 이런 반공단체 소스에서 나온 이야기로,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내 좌파, 베트콩까지 숙청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남베트남이 전복이후 잠시 존재했던 남베트남 공화국 각료들은 대부분 별탈 없이 잘 살았다.


이렇게 수치는 과장되었지만, 어쨌든 상당히 많은 사람이 처형되거나(약10만), 수용소(약 100만)로 간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캄보디아나 북한 정도는 아니지만 비난받아도 할 말은 없다. 호찌민은 통일후 대량숙청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는지 베트남전 종전 몇년 전에 죽을 때 남베트남 사람을 탄압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은 것 같다.


http://cafe.daum.net/sisa-1/oo7k/44



위 월간조선 찌라시나 이대용씨나

진실을 밝히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당시 "자유월남"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티우 대통령이라는 자는

친프랑스 매국노 출신으로서, 친미 매국노 짓을 벌이며

온갖 부패를 저질렀던 자였지요.


티우가 미군헬기를 얻어타고 도망갈 때에도

부정부패로 모은 황금이 가득 담긴 무거운 자루를 

철거덕 거리며 헬기로 옮겼다고 합니다.


즉, 당시 소위 "자유월남"이라는 나라의 기득권 세력들이

말하자면 아마 대부분 이전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의 

식민지배 시절에 프랑스에 빌붙어 매국질을 했던 자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그들의 부패가 매우 심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겠지요.


그래서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고 심지어 군대 조차도

극도로 부패해서 "꽃군대"가 성행하고

미군이 무기를 주면 그 날로 베트콩에 팔아 처먹을 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매국노 세력들이 말하는 "안보"니 "반공"이니

하는 것의 실체가 그랬다는 말이지요. ㅉㅉ


그러니 당시 월남의 진보적 야권세력들은 

그런 부도덕한 정권과 기득권 세력에 격렬히 저항했겠지요.


그에 반해, 북반부에 있던 월맹 세력은

베트남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에 저항하며

베트남 독립투쟁을 벌였던 호지명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지요.


그러니 그들은 매우 도덕적일 수 밖에 없었겠지요.


저 위 기사 내용에서....바로 그 점을 분명히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참고 사항으로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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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직필 17:35 new
위 월간조선 찌라시나 이대용씨나
진실을 밝히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당시 "자유월남"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티우 대통령이라는 자는
친프랑스 매국노 출신으로서, 친미 매국노 짓을 벌이며
온갖 부패를 저질렀던 자였지요.

그러니 당시 월남의 야권세력들은 그에 격렬히 저항했겠지요.

그에 반해, 북반부에 있던 월맹 세력은
베트남 독립투쟁을 벌인 호지명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지요.

그러니 그들은 매우 도덕적일 수 밖에 없었겠지요.

저 위 기사 내용에서....바로 그 점을 분명히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참고 사항으로
알려드립니다.
 
노송 19:51 new
이대용씨 육사7기로 '48년에 임관한 사람인데 중정요원으로 주월공사이름으로 월남에 가서 일하다가 사이공함락시에도 탈출못하고 월맹에 체포돼서 고생한 사람이라 ...월남의 부패상은 비슷하지만 틀리게 말한 부분이 많군요.
 
노송 20:09 new
이대용씨가 지적한 월남의 부패한 권력세력과 한국의 그것과 공통점은?
 
정리정돈 20:38 new
이대용이 한국에 온 뒤 월남 패망의 원인은? 부패정권때문이라고 박정희한테 직고한 사실은 쏙~ 뺐네.


출처 : 《스크랩북》역사와 사회 블로그
글쓴이 : 청몽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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