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으로행복

[스크랩] 6.25참전 에티오피아 노병 후원 20년

good해월 2016. 6. 10. 08:09
보낸사람: 홍기천 <poonghong@naver.com>
받는사람: "신동수" <dsshin365@daum.net>
날짜: 2016년 6월 05일 일요일, 19시 04분 17초 +0900

 


제목: 6.25참전 에티오피아 노병 후원 20년



 

'죽을지언정 포로 안된다'..6.25참전 에티오피아 노병 후원 20년

"마지막 생존자까지 돕겠다"..후원회, 노병 장례비 지원 연합뉴스

 

기사 내용

 

"마지막 생존자까지 돕겠다"…후원회, 노병 장례비 지원

 

 

(춘천=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가루'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폭설이 내린 전선에서는 갑자기 중공군의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역만리 낯선 강원도 고지에서 전우를 잃고 돌아오는 밤,

추위는 뼛속까지 침투했다.

 

적군보다 처음 만난 동장군과의 싸움이 더 고통스러웠다.

6·25전쟁 당시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견하고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던 에티오피아 군인들의 이야기다.

6.25전쟁 당시 전사한 에티오피아 군인들.
6.25전쟁 당시 전사한 에티오피아 군인들.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노병이 자신이 전투를 벌였던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적근산, 단장의 능선, 펀치볼 등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지명이 보인다.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노병이 자신이 전투를 벌였던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적근산, 단장의 능선, 펀치볼 등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지명이 보인다.

보화 고아원 원생들.
보화 고아원 원생들.
(아디스아바바=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오후(현지시각)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열린 제65주년 한국전 참전 기념식에서 헌화한 뒤 묵념을 하고 있다.
(아디스아바바=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오후(현지시각)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열린 제65주년 한국전 참전

기념식에서 헌화한 뒤 묵념을 하고 있다.

 

참전한 6천37명 중 살아있는 사람은 이제 170여 명뿐이다.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100여 명에 불과하다.

올해가 이들이 참전한 지 65주년이다.

 

◇ "한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라"

1950년 한국은 바람 앞 등불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

북한의 공격으로 한강이 맥없이 무너지더니 대구와 부산만 남았다.

 

한국의 위기 상황은 동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까지 전해졌다.

1935년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아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셀라시에

황제는 나라 잃는 설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바로 파병 준비에 들어갔다.

 

황제의 근위대원들은 한국의 지형과 비슷한 아디스아바바 외곽에서

땡볕 아래 맹훈련에 돌입했다.미군과 합동 작전을 해야 해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으며 영어를 공부했다.

황제는 한국으로 파병하는 부대를 '칵뉴부대'라고 이름 지었다.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로 칵뉴는 '혼란으로부터 질서를 회복한다'는 의미였다.

이탈리아와 독립전쟁을 벌이던 당시 전선을 순찰하던 황제 전용기의 애칭이기도 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출병식장에서 "저 먼 곳에 있는 한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라"고 특명을 내렸다.

 

칵뉴부대는 1951년 시민과 친지의 환송을 받으며 아디스아바바를 빠져나가

홍해의 지부티 항에 도착했다.

부산항이 보일 때까지 이들은 미군 수송선에서 매일 구토를 반복하고

기진맥진해 갑판에 쓰러졌다.

 

미 7사단에 배속돼 처음 참전한 지역은 강원 화천군 최전방인 적근산 전방이다.

왼쪽으로는 국군 2사단, 오른쪽으로는 국군 6사단이 배치돼 중공군과

전투를 벌인 최전선이었다.그해 겨울에는 양구 최전방에서 난생처음 겨울을 만났다.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졌고, 적군은 하얀 설상복을 입고 눈 속에서 공격을 해왔다.

눈을 처음 본 이들은 눈 속에 적군이 잠복하고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강추위에 손가락마저 얼어 방아쇠를 당기기조차 힘겨웠다.

 

이들은 전사할지언정 포로가 되는 걸 수치로 여겼다.

한국전에서 123명이 전사했지만, 포로가 한 명도 없는 진기록을 세웠다.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용맹스럽기도 했지만 따뜻했다.

 

1952년부터 1965년까지 경기도 동두천에서 보화고아원을 만들어

전쟁으로 부모와 형제를 잃고 길거리를 헤매는 고아들을 보살폈다.

고아원으로 보급품을 보냈던 이들은 자신들이 돌본 한국의 고아들이

 

어떻게 성장했을까 궁금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지만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성사되지 못했다.

 

◇ '바빠서'…한국인이 잊은 에티오피아 참전 노병

압축 성장을 하느라 바빴던 한국은 에티오피아 참전 노병들의 존재를 잊고 살아왔다.

한국이 세계적인 무역 대국으로 성장하는 사이 에티오피아는 가난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 사회 극빈층이 됐다.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에티오피아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뒤늦게 참상을 접한 로터리클럽 등 사회단체가 1996년 5월 생계지원

사업을 하고자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 후원회를 결성했다.

 

회장은 서울 로터리클럽의 회원이었던 배우 손 숙 씨가 맡았다.

방송과 연기 생활을 하느라 바쁜 손 회장은 그동안 에티오피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후원활동에 필요한 사람을 만나도록 주선하고 강연료 등을 내놓았다.

53살에 후원회장을 맡은 손 회장은 73살이 됐다.

 

노병들의 생계지원으로 시작한 후원활동은 에티오피아와

한국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하게 됐다.

 

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에티오피아를 국빈 방문해

한국전 참전기념탑에 헌화할 정도로 양국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후원회는 아디스아바바 시내에 이들이 한국에 참전했던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고자 참전기념탑을 춘천시 등과

함께 만드는데 주춧돌을 놓았다.

 

강원 지역에서 달리던 중고 소방차를 수리해 전달하고,

중고 컴퓨터를 학생들 교육용으로 전달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아프리카 중심인 에티오피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투자를

고심하는 기업들에는 필요한 현지 정보도 구축했다.

 

◇ "통일 한국 못 보고 눈 감는 노병들 장례비 지원"

올해로 20년을 맞은 후원회 활동은 고비의 연속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1천여 명에 이르던 회원은

500명 선으로 급감했고, 현재 회원은 70여 명이다.

 

후원회는 고령의 참전용사들이 통일된 한국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현실에 활동을 중단할 수는 없는 처지다.

 

현재 살아있는 에티오피아 참전 노병들의 평균 나이는 87살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세상을 떠난 참전 군인이 30명이나 된다.

건강 상태를 고려하면 앞으로 5년 이내에 상당수가 생을 마감할 것으로 보인다.

 

후원회는 죽어서도 누울 자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이들이

매장지 등을 빌리도록 이달부터 장례지원비를 200달러씩

지원할 예정이다.

신광철 사무국장은 "요즘 사람들은 위기의 개념을 모르는데,

위기란 바람이 불어 언제 등불이 꺼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이분들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과도 같았던 한국의

자유, 평화, 생명을 지켜줬다"고 평가했다.

 

그는 "우리가 진 신세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서는 안 될 일"이라며

"이들은 자신들의 참전 활동을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한다"며 덧붙였다.

 

후원회는 올해 참전 군인의 자녀와 그 가족으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회'를 결성하는 등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6·25전쟁을 통해 한국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에티오피아

노병과 그 가족, 후손은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dmz@yna.co.kr

(끝)


<정일거사>

출처 : 제주몽생이
글쓴이 : 제주몽생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