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으로행복

[스크랩] 노르웨이 라면왕 이철호의 인생역전 드라마

good해월 2018. 11. 29. 10:48

6·25 폭격


노르웨이 이송

밑바닥 생활하며 정착

요리사로 성공

라면왕 등극
▲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소년은 13살의 나이에 6·25전쟁을 맞았다. 가족과 헤어진 소년은 폐허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굶주려 쓰러진 소년을 거둔 것은 미군 제1해병사단. 군인의 구두를 닦고 막사를 청소하던 소년은 북한군의 포격에 맞아 고관절 절반이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한국의 의료장비로는 소년을 살릴 수 없었다. 16세 소년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슈나이더라는 미군 병사가 성조기(Stars and Stripes)에 ‘도움을 찾는다’는 글을 실었다. 이를 보고 소년에게 손길을 내민 것이 노르웨이였다. 
   
   그로부터 61년. 북유럽의 국가에서 조리사로 출발한 소년은 노르웨이 최초로 라면을 유통시키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국민적 명사로 성장했다. 외국인 이민자로서 자수성가한 소년의 이야기는 노르웨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노르웨이 최대 식품 기업 ‘토로’의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소년이 만든 라면 브랜드 ‘미스터 리’의 시장 점유율은 무려 95%. 이민자 최초로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민훈장과 위대한 노르웨이인 훈장, 기사 작위를 받은 소년은 한·노르웨이 친선협회(Norweigian Korean Friendship Association), 한국협회(Korean Association), 노르웨이의 한국전 참전 군인 모임인 재한군인협회 등을 이끌며 현재 한국과 노르웨이의 친선을 도모하고 있다. 올해로 77세인 그의 이름은 이철호. 노르웨이타임스 기자 출신인 딸 이리나 리씨는 아버지 이야기를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지니넷 출판사)라는 책으로 냈다. 출판 기념을 위해 서울에 온 이철호씨를 지난 5월 26일 만났다. 
   
    
   노르웨이인 “이걸 어떻게 먹어”
   
   “노르웨이엔 라면이라는 게 없었어요. 1989년에 처음 라면을 보여주니까, 이 사람들이 ‘때를 밀 때 사용하는 돌’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표면이 울퉁불퉁하니까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국물을 잘 안 먹습니다. 음식을 할 때 생기는 국물은 죄다 버리거든요. 그러니 ‘라면’이란 것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만 붓고 끓이면 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도통 알아듣질 못하는 거예요.”
   
   160㎝가량의 단신, 통통하고 코믹해 보이는 외모의 이철호씨는 느릿한 한국어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만 16세에 노르웨이로 건너간 그는 “생각을 하거나 꿈을 꿀 때면 노르웨이 언어로 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대형 유통 체인을 주로 찾아갔어요. 가서 라면을 보여주니까 ‘이걸 어떻게 먹느냐’면서 심지어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더라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사장 얼굴을 빤히 쳐다봤죠. 그러고는 말 없이 그 라면을 주워들고 나왔습니다. 그걸 집에 가지고 와서, 제가 다 끓여 먹었어요.”
   
   이후 그는 전략을 수정했다. “작은 구멍가게를 하나씩 찾아다녔습니다. 라면 두 개를 놓고가면서 ‘두 개를 다 팔면 하나 가격만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반응이 별로였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입소문이 나더니, 3년쯤 지나니까 주문이 막 쏟아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이철호씨는 “현지인의 입맛에 맞게 마늘을 빼고 매운맛을 줄였다”며 “부드럽고 기름진 맛을 더해 소비자를 사로잡았다”고 말했다. “‘미스터 리’ 라면이 인기를 끌자 유사한 다른 라면들이 잇달아 출시됐습니다. 하지만 선두는 항상 미스터 리였습니다. 가격이 다른 라면보다 5배가량 비싼데도 소비자들은 미스터 리만을 고집했습니다.”
   
    
   남몰래 굳은 빵 불려 먹으며 연명
   
현지에서 ‘라면왕’이라 불리는 이철호씨는 ‘잘사는 나라’ 노르웨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은 수수했다. 출판을 기념해 고국을 찾은 그는 고급 호텔이 아닌 하룻밤 11만원짜리 ‘레지던스’에 투숙하고 있었다. 
   
   검소함이 신체의 일부처럼 몸에 배어 있는 그이지만 뼈아픈 가난의 기억이 있다. 노르웨이 정착 초기의 일이다. “그땐 항상 먹는 게 부실했습니다. 누가 샌드위치라도 좀 나눠주면 그날이 생일이었어요. 제대로 된 음식을 차려 먹을 형편도 아니었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유효 기간이 지난 빵을 사 먹기로 했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대부분의 빵 가게들이 2~3일 지난 빵을 가축 사료용으로 싸게 내다 팝니다. 이런 빵은 물론 딱딱하게 굳어 있죠. 그 굳은 빵을 사다가 자취방에 가져와서 한밤중에 물에 불려 먹었습니다. 혹시 주인집 할머니가 보시면 창피하잖아요. 할머니가 잠드신 후에 굳은 빵을 죽처럼 불려서 먹고 살았습니다. 하루 종일 식사라고는 그 빵죽 한 그릇이 전부인 날도 많았습니다.”
   
   북한군의 포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이철호씨는 아직까지 걸음이 불편하다. 그는 “작고 볼품없는 데다 몸까지 불편한 외국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고 했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화장실 위생설계사 보조를 맡게 됐어요. 이게 뭐냐하면 화장실 청소입니다. 노르웨이도 그때까지 재래식 화장실이 대부분이었어요. 3~4층 되는 건물 지하에 화장실이 있는데, 배변이 떨어진 양동이를 청소하는 게 제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한 1년쯤 지나니까 오히려 그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뭐든지 부끄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됐습니다.”
   
    
   음식 찌꺼기 떼어 먹으며 요리사 수업
   
   이철호씨는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 오슬로에 있는 엘베바켄(Elvebakken) 직업학교에 등록을 했다. ‘요리사가 되면 최소한 밥을 굶지는 않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홀멘홀렌(Holmenhollen)이란 관광호텔의 조리 견습생 자리를 얻은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설거지였다. “주방에는 각종 조리기구며 그릇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냄비에는 두둑하게 음식 찌꺼기가 눌어붙어 있었지요. 그걸 긁어내는 일도 제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오히려 좋았어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면 냄비에 눌어붙은 탄 음식을 긁어 먹을 수 있었거든요. 배를 채울 수도 있고, 그릇도 깨끗해지니 일석이조 아닙니까. 허허.”
   
   이철호씨는 “설거지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고 말했다. “요리사들이 그런 저를 좋게 봤는지, 얼마 뒤부터 조리사 일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감자 깎는 일이 주 임무였습니다. 스페인 출신 견습생도 함께 일을 맡았는데, 그 친구는 그냥 감자를 깎아 찬물에 담가두기만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저는 다 깎은 감자를 다시 한 번 더 손질했습니다. 메뉴에 폼 샤토(Pommes Chateaux=potato castle)라고 적혀 있으면 감자를 올리브처럼 다듬었고, 폼 파리시엔(Pommes Parisiennes)이라고 적혀 있으면 구슬처럼 동그랗게 깎았습니다. 폼 알루멧(Pommes Allumettes)이란 단어가 보이면 길쭉한 사각형으로 잘라냈죠. 폼 안나(Pommes Anna)라고 적혀 있으면 감자를 종잇장처럼 얇게 깎았습니다. 다음 날 메뉴에 맞게 감자가 준비된 것을 보고 조리사들이 자신들 일이 줄었다며 무척 기뻐하더군요. 이때부터 상급 요리사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사실 다른 사람에 비해 열등감을 느낄 여지가 엄청나게 많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얼굴이 미남인 것도 아니고, 전쟁 때의 부상으로 다리도 절죠. 배도 나왔고 키도 작습니다. 요즘 사람들 눈으로 보면 아마 ‘열등감 종합세트’일 겁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면 하루빨리 그 상황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철호씨는 얼마 뒤 정식 요리사가 됐다. 특유의 성실성과 친화력을 갖춘 그는 이때부터 노르웨이 전역에 요리사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최대 베이커리인 ‘묄하우센’의 최고경영자를 맡게 됐다. 직원들 앞에서 손수 막힌 변기를 뚫고, 한 명도 해고하지 않는 그의 경영 방식은 매우 독특하게 받아들여졌다. 묄하우센은 그가 맡은 이후 오슬로의 명소로 자리를 굳혀 스칸디나비아 반도 곳곳에 15개의 체인을 열고, 모든 체인 에서 흑자를 달성하는 기록을 남겼다.
   
    
   52세 나이에 라면 사업 뛰어들어
   
▲ 1963~1964년 이철호는 오슬로의 그랜드호텔 거울 홀에서 주로 일했다. photo 지니넷
‘요리사 이철호’가 라면 업계에 뛰어든 것은 그의 나이 52세였던 1989년 가을이다. 150년간 명맥을 유지해온 묄하우센이 덴마크 회사 하팅(Hatting)으로 넘어갔다. “그때까지 저는 묄하우센이 제 회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아, 내 회사를 가져야겠다’ 하고 결심했습니다.”
   
   이철호씨는 1970년대 초 한국을 찾았을 때 맛본 라면을 떠올렸다.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 3개국이 6·25전쟁을 계기로 서울 을지로에 국립중앙의료원을 공동 개설했습니다. 이 의료원에는 스칸디나비아 전문 식당이 있었어요. 이 식당의 한국인 요리사들에게 스칸디나비아 음식 조리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한국을 찾아 석 달간 머물렀는데, 그때 처음 라면을 맛본 겁니다. 기가 막힌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는데, 제 사업체를 차리려고 하자 그 생각이 떠오른 겁니다.”
   
   이철호씨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1989년 가을, 끓인 라면을 접시에 담은 뒤 닭고기와 채소를 가지런히 얹어 사진을 찍었다. 그가 선보인 노르웨이 최초의 라면이었다. 그의 라면 브랜드 ‘미스터 리’는 오늘날 노르웨이에서 대통령보다 유명한 이름이 됐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기본적인 실력을 갖추고 자기 일에 정성과 최선을 다한다면, 스스로 광고하지 않아도 누군가 항상 눈여겨보는 사람이 생깁니다. 실력 있고 성실한 사람과는 누구나 함께 일하고 싶어합니다. 외롭고 힘들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주간조선 2012. 5.15



출처 : 김남석 블로그/하나님 Dream을 이루어 드림
글쓴이 : 김남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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