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일제 판사 “천황폐하가 높은가 예수가 높은가”“천황도 예수의 심판 받을 것입니다”
박연세 목사와 전북 군산3·1운동역사공원전북 군산 3·1운동역사공원 내 구암교회. 한국 기독교 전래 초기 미국 남장로회가 군산선교부를 세웠던 곳이다. 왼쪽은 1950년대 구암교회 예배당, 오른쪽은 사용 중인 예배당이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초기 미션스쿨 영명학교 건물을 재현한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이다.
1944년 1월 대구법원에서는 한 목사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판사가 물었다.
“천황폐하가 높은가 예수가 높은가.”
목사는 주저 없이 답했다.
“나는 육체적으로 천황을 존경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합니다. 언젠가는 천황도 예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영웅담을 극대화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 재판부가 남긴 공식 문서 내용이다. 전북 군산과 전남 목포에서 천황이라는 우상과 맞서 싸운 박연세 목사 이야기다. 한강 이남 첫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미션스쿨 교사였고,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 진학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됐던 인물. 한때 일제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고자 했던 예수의 제자. 그는 서슬 퍼런 일제 말년에 “천황도 예수의 심판 받을 것”이라며 광야의 소리를 내다 감옥에서 순교했다.
박연세 (1883~1944)
지난 21일 전북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법정을 재현한 체험관이 눈길을 끈다. 법복을 입은 세 판사 앞에 일본 순사가 총을 메고 있는 그림이다. 판사 그림 앞에 의자가 비어 있다. 누구나 앉을 수 있다. 관람객은 그 의자에 앉아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말한다.
“조선 독립 만세! 나는 조선의 독립을 원하오.”
사실 이 체험관은 1919년과 1943년 두 차례나 옥에 갇힌 박연세의 옥중 항일투쟁 교훈을 후대에 심어주기 위해 설치했다. “천황도 예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법정은 얼어붙었을 것이고 순사는 달려 나와 박연세의 입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협했던 왕을 천황으로 신격화해 신정일치로 한국을 통치하고자 했던 일제에 예언자의 소리를 내는 조선야소교장로회(장로회 전신)는 눈엣가시였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1890년대 7인의 선발대를 호남으로 보내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눅 4:18~19)했다. 군산은 목포 전주 광주 순천과 함께 남장로회 선교부가 들어선 곳이었고 그곳마다 교회 병원 학교 등이 세워졌다. 핍박받던 조선 민중은 메시아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예수를 믿었고 선교사들의 조력으로 조선야소교장로회를 이 땅에 뿌리내렸다.
1895년 군산에도 전킨(한국명 전위렴)과 드루 선교사가 배편을 이용해 들어와 한옥 두 채를 마련해 예배처로 삼고 첫 예배를 올렸다. 빈민 구제를 위한 약국과 진료소를 겸한 회당이었다. 구복동교회(개복교회 전신)와 구암교회 등이 1896~1900년 사이 설립된다.
목포 양동교회로 부임한 박연세 목사(가운데)가 제직들과 찍은 사진. 1930년대로 추정된다(위 사진). 박연세가 3·1운동으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진 상황을 보도한 당시 신문.
1903년 전킨 목사는 구암동에 영명학교(군산제일고 전신)를 세운다. 문맹 상태로는 복음을 알 수 없으므로 한글학교 수준의 출발이었다.
박연세는 군산에서 가까운 전북 김제 용지면 출신으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 박자형은 시대의 흐름을 읽었는지 그를 고등과 4년제 학교가 된 영명학교로 진학시켰다. 전킨 등 선교사들이 김제까지 전도를 나왔고 박자형은 이때 복음을 받아들였다.
박연세는 영명학교에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배우게 됐다. 군산선교부를 배경으로 성장한 박연세는 개항장 군산에서 벌어지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와 교회 탄압을 학생 때부터 겪었다. 애초 군산 우체국 앞에 있던 한옥 두 채 예배처소는 열강들의 조계지 구획에 따라 구암동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영명학교를 졸업한 박연세는 복음을 안고 고향 김제 백구면 신명학당에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교회 초대 기독교사(敎師)였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패망했다. 박연세는 군산으로 나와 영명학교 교사가 되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예수의 사역을 전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를 얘기했다. 그리고 다들 쉬쉬하는 민족의 현실을 토설했다. 이때 호남평야를 차지한 일본 지주들에게 쫓겨난 조선인들은 군산 산비탈에 토막집(움막)을 짓고 살았다. 박연세는 울분을 삼키며 1916년 안수집사가 됐고 1918년 장로가 되어 구암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1919년 3월 초.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진학한 그의 제자이자 고향 후배인 김병수(1898~1951·독립운동가)가 가슴에 200매의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고 박연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국적으로 조선독립을 염원하는 민중이 3월 1일을 기해 봉기했다는 것이다. 김병수는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의 요청으로 군산지역으로 밀파됐다.
군산 3·1운동 발상지 구암교회 초기 모습. 현 구암교회 담벼락 타일 사진이다(위 사진). 구암교회 옆 3·1운동 기념비. 군산의 만세운동은 3월 5일 이 지점서 시작됐다.
박연세는 독립선언서를 받고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3월 5일 거사를 벌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고석주 김수영 이동욱 등에게 독립선언서 100매를 넘겨주었다. 김병수는 서울 독립 만세 시위의 중책을 맡았으므로 군산을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일제의 내사 등으로 사전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끌려가는 그를 본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군산영광여고 전신) 교사와 학생, 구암병원 직원들이 울며 그를 막았고 그 소식이 시내에 번지면서 3·5군산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박연세는 보안법 등의 혐의로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성경 묵상으로 고난을 이겨냈다. 그리고 예수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 진학해 3년 과정을 마쳤고 192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6년 목포 양동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한 그는 요즘으로 치자면 신도시 큰 교회 목사였다. 그해 6월 3일 자 동아일보는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가 전남노회 20회 총회장이 되어 ‘제주성경학원 설치’ ‘광주 이일양성학교 성경과(聖經科) 학년 연장’ ‘추자도 전도인 파송’ ‘종교교육 확장’ ‘여수 나병원 보조건’ 등을 처리했다고 보도했다.
1930~40년대 목포는 전국 6대 도시였다. 교회의 영향력이 커졌다. 일제의 식민통치도 강화됐다. 이때 박연세는 4번이나 전남노회장을 하며 뼈아픈 죄를 범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배교를 후회하고 무단통치가 극에 달하던 일제 말 조선 교회를 일본기독교단이라는 이름 아래 통폐합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청년 교사 때의 용기로 저항했다. 제자 이남규(1901~1976·제헌의원) 목사, 서남동(1918~1984·신학자) 박사 등이 저항에 같이했다. 그는 그렇게 두 번째로 대구형무소에 갇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목포 양동교회 전경. 박연세 목사는 우상 숭배 반대를 외치다 대구형무소에서 숨졌다(위 사진).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있는 일제 법원 모습. 재판받는 박연세 등을 상징화했다.
현재 군산 3·1운동역사공원 안에는 구암교회가 있고 영명학교 건물을 재현한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 등이 한국사 속 기독교의 공로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민족 앞에 부끄러움이 없었던 박연세 목사는 ‘종교프레임’에 갇혀 같은 시기 독립운동을 한 무종교인에 비해 저평가되어 있다.
군산·목포=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믿음으로행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473회] 49 대 51 (0) | 2019.03.02 |
---|---|
[스크랩] 가까이 있는 작은 선(善)의 실천이 (0) | 2019.02.28 |
[스크랩] 죽을 때 웃으면서 죽을 수 없겠느냐~? (0) | 2019.02.26 |
[스크랩] 운동, 공부, 연애, 돈, 다 포기하기 싫어요 (0) | 2019.02.25 |
[스크랩]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생활에 지칩니다 (0) | 2019.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