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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은 사람 어떻게 내버려두나… 코로나 돌고 무슨 일 생겨도 밥은 줘야 해”

good해월 2020. 12. 28. 06:31

“굶은 사람 어떻게 내버려두나… 코로나 돌고 무슨 일 생겨도 밥은 줘야 해”

[최보식이 만난 사람]
한번도 문 안 닫은 ‘원각사 무료급식소’, 운영자 손영화씨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20.12.28 03:00

 

 

 

 

 

“구청이나 동사무소 직원들이 나와 ‘코로나가 확산하니 밥을 주지 말라’고 하는데, 배고픈 사람을 어떻게 내버려둬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365일 연중무휴 밥을 줘야 한다는 주의(主義)예요.”

손영화(66)씨와 통화하면서, 민주주의·공산주의·전체주의 등은 알지만 ‘밥주자주의’는 처음 들었다. 올 초 코로나가 전파·확산한 뒤로 전국의 무료급식소들은 문을 아예 닫았거나, 닫았다가 다시 열기도 했고, 열었다가 또다시 닫았다. 하지만 그녀가 운영하는 ‘탑골 원각사 무료급식소’는 지금껏 한 번도 문을 닫지 않았다.

손영화씨는“공원 담벼락 아래에서 주먹밥 먹는 광경을 보면 가슴이 저릿하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구청의 지시대로 2~3주 문을 닫으면 이분들은 어디 가서 먹습니까. 사람 목숨은 밥과 연관돼 있잖아요. 여건이 좋으면 밥 주고 여건이 안 되면 밥 안 주는 개념의 무료급식소라면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저는 봐요. 제 얘기가 틀렸습니까?”

굶어 죽으나 걸려 죽으나

추위 때문인지 오전 9시인데도 서울 탑골공원 주위로는 행인들이 드물었다. 인도(人道) 한편에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노숙자가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덮고 있던 이불 위에 간밤에 내렸던 잔설(殘雪)이 남아있었다.

탑골공원 뒷담 골목으로 ‘이발 5000원 염색 5000원’을 써 붙인 이발소 건물이 보였다. 그 건물 2층이 ‘원각사 무료급식소’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자원봉사자들이 허연 김이 나는 밥통을 가운데 놓고 참기름, 깨소금, 김가루, 멸치, 돼지고기 등을 버무려 주먹밥을 만드는 중이었다. 주방에는 쌀 10kg쯤 들어갈 만한 대형 밥솥 두 개가 파란 가스 불 위에 올려져있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하루 평균 230명분 식사를 제공했어요. 그런데 올 상반기에 코로나가 처음 확산했을 때 모든 무료급식소가 문을 닫았어요.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의지할 데가 없어진 거죠. 그때부터 이들 사이에 ‘탑골 급식소는 여전히 문을 연다’는 소문이 돌아 여기로 몰려왔어요. 자고 나면 숫자가 불어나, 한때 600~700명분까지 만든 적이 있어요.”

-지금은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그 뒤 몇몇 무료급식소가 다시 문을 열면서 이제 400~500명분을 만들어요. 하루에 쌀 포대(20kg) 다섯 개를 뜯습니다. 이번에 더 심한 코로나 한파가 몰아쳐 다른 무료급식소들이 또다시 문을 닫고 있어요.”

-탑골공원에는 노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노인 무료급식소’라고 써 붙였지만 요즘은 노인만 오는 게 아닙니다. 40~50대도 심심찮게 보여요. 이까짓 주먹밥을 타갈 사람들이 아닌데 버틸 만큼 버티다 왔겠지요. 어쨌든 밥이라도 먹을 곳이 있어야 정신 차려서 다음 일자리를 찾아볼 게 아닌가요.”

-방역 비상 시국에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이 주먹밥 타려고 줄 서 있으면 결코 좋은 소리만 들을 것 같지 않은데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코로나 상황에서 줄 서서 밥을 타먹겠어요? 어떤 노숙자가 ‘굶어 죽으나 코로나 걸려 죽으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했어요. 코로나도 무섭지만 밥 굶는 것도 무섭습니다.”

-지금 방역 규정은 5명이 함께 모이는 것도 금지하는데요.

“누구든 며칠을 굶어봐요, 어떻게 되나. 이분들이 ‘지금은 밥 주는 데가 여기밖에 없어요’라고 하기에 ‘내가 밥 세끼를 먹는 한 당신들에게 밥을 드리겠다’고 말했어요. 주먹밥을 받아들고는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인사한 뒤 공원 담벼락 아래에서 먹는 광경을 보면 가슴이 저릿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떤 역병(疫病)이 와도 방도를 취해 밥을 줘야 하는 겁니다.”

주먹밥과 단무지, 요구르트를 한 세트로 비닐봉지에 담아 건물 1층으로 들고 내려오자, 골목 주위에서 서성대던 노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간에 맞춰 종로구청 직원 두 명이 나타나 방역 소독을 했다.

-만약에 여기서 코로나 감염자라도 나오면 그 비난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걸 가장 신경써요. 배식을 돕는 우리 자원봉사자들도 왜 무섭지 않겠어요. 2m 간격으로 줄 세우고 마스크를 쓰라고 내가 난리칩니다. 주먹밥을 주면서 마스크와 세정제도 함께 나눠줘요. 주먹밥을 먹을 때도 따로 떨어져 먹게 합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서라도 밥은 먹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해당 구청에 민원(民願)이 많이 들어갔을 것 같군요.

“오전 11시 반에 배식하면 10시부터 공원 담장을 따라 줄 서서 기다렸어요. 2m 간격으로 세워도 민원이 많이 들어갔어요. 그래서 식권(食券)을 배부하고 공원 안에서 흩어져 기다리게 했어요. 배식 시간이 되면 몇 명씩 불러 줄 서게 했습니다. 이번에 방역 단계가 올라가자 또 배식 방법을 바꿨어요. 한 번에 사람들이 안 몰리도록 오전 8시, 9시 반, 11시 세 차례 나눠 줬어요. 지금부터는 아예 오전 8시부터 언제든지 오기만 하면 주먹밥을 나눠주려고 합니다. 바깥에서 계속 기다려야 하는 봉사자들이 더 힘들어진 거죠.”

-정부나 자치 단체에서 이런 이들에게 기초생계비를 지원하거나 급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민간 무료급식소가 문 닫으면 이들이 굶는다고 봅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려면 주민증이라도 있어야지요. 길 가는 사람들 아무에게나 생계비 지원을 해주고 밥을 줍니까. 서울 마포구 사람이면 마포구청으로, 서울 동대문구 사람이면 동대문구청으로 가라고 할 것 아닙니까. 이렇게 길거리에 내몰린 사람들은 대부분 주민증 같은 기초 근거 자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행정 전산화된 요즘 세상에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들의 숫자가 그렇게 있을까요?

“선생님 같은 분과는 이래서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정상 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이쪽 바닥을 잘 이해 못 합니다. 여기는 복지 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분들도 이렇게 밥 얻어먹고 살고 싶겠습니까. 아마 한때는 ‘내가 누구’라고 내세우며 살았겠지만, 인생의 나락에 떨어진 겁니다. 살다보면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요.”

밥을 주는 줄에 서야

-무료 급식 재원은 어떻게 마련합니까?

“그전에는 여러 봉사 단체에서 지원 물품을 들고 여길 찾아왔는데, 지금은 코로나 상황이라 다 끊겼어요. 코로나가 처음 발생했을 때 봉사자들이 오기로 한 날짜에 다들 취소했습니다. 갑자기 펑크가 나 일손이 달린 적이 많았어요. 하지만 오라고 할 수 없었어요. 혹 감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요.”

-오늘 나와서 일하는 봉사자들은 8명인데?

“내가 특별히 이분들에게 부탁해 날마다 나와주고 있습니다. 이 중 노인 두 분은 봉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줄 서서 밥을 타먹고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이분들을 따로 불러 ‘밥을 타 먹는 줄에 서지 말고 기왕이면 밥을 주는 줄에 서야 더 보람있다’며 설거지나 심부름을 하라고 했지요. 지금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해주고 있습니다.”

-연말이면 성금이나 후원 물품이 늘어나는데, 올해는 사정이 안 좋지요?

“다들 힘드니까요. 주로 자기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목돈을 내는데, 지금은 이런 분들이 월급쟁이보다 더 어려워졌으니까요. 그래도 세상에는 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지인들이 돌아가며 쌀을 대줍니다. 대구 동화사에 계시는 큰스님은 600포대를 보내주며 격려했어요.”

-무료급식소와는 처음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된 겁니까?

“1994년 한 스님이 여기에 무료급식소를 열었을 때, 서울 봉은사에 다니던 저는 신도들과 봉사팀을 꾸려 매달 한 차례 여기에 왔습니다. 급식소 달력의 날짜에 검은 매직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은 걸 봤어요. 어떤 달에는 17개, 어떤 달에는 13개 이런 식이었어요. 밥 준 날을 표시해놓은 거였어요. 그때는 기부나 후원금이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날마다 밥을 못 준 거죠. 스님은 ‘배고픈 사람에게 365일 주는 게 내 원(願)이다. 누가 쌀만 대주면 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처음 3년간은 부족한 쌀, 전기세, 가스비 등을 제가 개인적으로 다 대줬어요.”

-자원봉사자 중 한 명으로 시작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직접 급식소를 맡게 됐습니까?

“그 스님이 그만두고 떠나버렸어요. 급식소를 그만두겠다니 건물주는 반색을 했지요. 다른 사람에게 넘겨 일반음식점이 들어서려는 걸 알고는 제가 난리를 쳤어요. 배고픈 사람 밥 주는 장소인데 갑자기 문을 닫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자 다른 스님이 맡겠다고 나섰어요. 하지만 2년쯤 하다가 불미한 일로 그만뒀어요. 그때까지 승복 입은 스님을 하늘같이 받들어 모셨는데…, 결국 2018년 9월부터 제가 총대를 메게 됐어요.”

-무슨 마음으로 그런 열성을 보였습니까?

“적선(積善)을 많이 하면 후손이 복 받는다는 그런 알량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떤 확신이 섰습니다.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부처다.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공양을 올리는 것도 좋겠지만, 저 굶어 죽는 부처들에게 주먹밥 하나라도 공양 올리는 것이 더 뜻있다고 여겼습니다.”

자광명 보살

그녀는 ‘자광명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탑골공원에서 노숙자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처녀 시절에는 대기업에 근무하며 일본과의 비즈니스를 담당했다. 결혼한 뒤 동대문 시장에서 원단 가게를 열었다. 중국산 원단이 수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재력 있는 사모님들끼리 어울리는 물이 따로 있었지 않습니까?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이쉬지 못하면 나무토막이 되는 게 육신입니다. 몇 백만 원짜리 가방 들고 몇 천만 원짜리 옷 걸치는 걸로 우쭐해서야 되겠습니까. 역병이 도는 기막힌 시절에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주는 마지막 소임을 맡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단한 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밥을 주는 책임을 맡아 하고 있을 뿐이니 제가 돋보이는 얘기는 안 썼으면 합니다.”

대낮이 돼도 골목 풍경은 스산했다. 한 노인이 구부정하게 앉아 아까 받은 주먹밥을 씹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공평하게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