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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리정에 대하여

good해월 2006. 8. 23. 13:06
                                           五里亭의 문화적 의미와 용도

  우리 나라에 오리정이 남아 있는 곳은 전라도의 남원 한 곳밖에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겪기 전까지는 전국에 있었던 우리 나라 미풍양속을 잘 보여주던 곳이 바로 오리정이었다. 이번 문학강의에서는 오리정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오리정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의미이고, 그 다음으로는 오리라는 말의 거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오리정이 무슨 목적에서 생겼으며, 그것이 어찌하여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등이다. 이제 아래에서 이것들에 대해서 차례차례 살펴보도록 한다.

 

 


  오리정은 조선조 때 관아가 있던 곳에서 서울 쪽으로 오리 정도의 거리가 떨어진 곳에 세운 亭子를 가리킨다. 서울 쪽으로 오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정자란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이것이 양반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을 향해서 있는 것은 모두 양반 문화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반에게 있어서 서울은 자신들의 군주가 계신 곳으로 세상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조선조 양반들의 생각과 생활 등 삶의 모든 부분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것을 잘 보여주는 현상 중에 양반은 어디에 가 있어도 북쪽을 향해 절을 하는 사실을 들 수 있는데, 북쪽은 임금이 계신 곳이고, 그곳은 바로 서울이 된다. 어디에 가 있더라도 북쪽을 향해 절을 하는 북향재배를 하면 그것은 임금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서울을 향해 있는 모든 것과 행동은 양반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리는 얼마 정도의 거리일까?

  오리는 지금의 2킬로 정도의 거리가 아니다. 조선조 시대의 1리는 지금의 미터 거리로 계산하면 약 2킬로 정도의 길이를 가진 거리이다. 그러므로 오리정은 관아로부터 약 10킬로 정도가 떨어진 곳에 지어진 정자를 말하는 것이 된다. 자동차도 없었던 시대에 10킬로씩이나 떨어진 거리에 정자를 짓고 이곳을 어떻게 왕래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던 미풍양속의 하나였다는 것을 이해하면 참으로 머리가 숙여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조선조 시대에는 왜 관아에서 서울 쪽으로 오리 떨어진 곳에 이런 정자를 세웠을까?

   관아는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서 지방을 통치하는 수령들이 거처하면서 백성들을 보살피고 정치를 거행하던 곳이다. 다시 말하면 관아는 지방의 수도인 셈이다. 지금의 군청이나 시청, 도청 등이 있는 곳을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처럼 관아가 있는 곳에는 중앙에서 오는 손님들도 많고, 중앙으로 가는 사람들이 출발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기 위한 일정한 시설과 예절이 필요하게 된다. 예절을 숭상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오리정인 것이다. 이런 절차를 위한 것으로 관아에서 오리 떨어진 곳에 정자를 세웠는데, 손님을 맞이할 때나 배웅할 때는 관아에서 오리 떨어진 이 정자에 와서 환영과 이별의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오는 손님이 반가운 존재란 사실을 드러내고, 가는 손님은 보내기가 싫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예절로 쓰인 것이 바로 오리정이 되는 것이다. 특히 오리정은 이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데, 그것은 맞이할 때보다 이별할 때의 사연이 더 많기 때문이다.

   조선조 때에는 손님을 보낼 때는 반드시 오리정까지 배웅을 하고, 그곳에서 주안상을 보아서 술을 한잔씩 나누어 마시면서 이별시를 지어서 서로 화답한 다음 떠날 사람을 떠나게 하였던 것이다. 이별의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서로의 정을 나누었던 것인데, 이런 이별의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 바로 오리정인 것이다. 따라서 오리정은 이별의 장소로 더 알려져 있고, 이별의 사연들은 오리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상당히 많다. 지금도 우리는 손님을 보낼 때 최소한 문을 나서서 어느 정도 걸어가다가 인사하여 보내는 습관이 있는데, 바로 조선조의 손님배웅 예절의 흔적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오리정은 이별의 장소로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도 쓰였고, 이정표의 구실도 했었다. 오리정이 나오면 관아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나그네는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았던 것이다. 이별의 정을 나누는 곳으로 지어진 오리정이었지만 여러 용도로 쓰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실을 하던 오리정은 왜 현재는 어디에도 남아있는 곳이 없는가?

   오리정이 우리 문화에서 흔적을 감춘 것은 일본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부터이다. 우리 나라를 강제로 점거한 일본은 20세기 초반부터 36년간을 우리 나라에 머물면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데, 자신들의 나라에는 없는데, 좋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없애버리는 정책을 쓴다. 그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지금의 남산 안중근의사의 동상이 서 있는 자리에 있었던 조선조 국조신을 모시던 국사당을 내쫓고 그 자리에 신사를 새운다든지, 자기 나라의 길보다 넓었던 종로와 세종로 등을 좁혀서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것, 그리고 지방의 관아를 없애버리는 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하여 없앤 것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오리정의 말살이다. 우리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던 오리정은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비슷한 것조차 찾을 수가 없어서인지 오리정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그 때 오리정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수백 개가 넘는 오리정이 전국 곳곳에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는 오리정 고개라는 지명 정도로만 남아있지만 우리의 미풍양속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오리정을 되살리는 일도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이어가려는 노력의 하나로 추진되어야할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오리정은 남원시내에서 전주 쪽으로 1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진 오리정 하나 뿐이다. 이 오리정은 춘향전 덕분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춘향전에 보면 춘향이 이몽룡과 이별하는 자리가 바로 오리정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수십 년 전에야 겨우 오리정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원에 세워진 오리정은 고증을 거치지 않아서 그런지 亭의 개념과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오리정 모습을 이층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亭이라 할 수 없고 樓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亭은 일층으로 지어진 육각 혹은 팔각의 모양으로 언덕 위에 지으며, 나무로 된 마루를 깔아서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든 간단한 모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亭은 자연을 감상하는 곳이 아니라 이별의 정을 나누거나 여행으로 지친 다리를 쉬어 가는 곳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색고개를 넘어간 곳에 서있는 현재의 오리정은 이층으로 되어 있고 사각으로 된 집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이것은 영락없는 樓의 형태를 보여준다. 정확한 고증을 거쳐 다시 지어지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본다. 특히 남원의 오리정 부근은 춘향이 눈물방죽, 춘향이 버선밭, 말달리기 언덕 등 춘향과 이몽룡의 이별로 인한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만큼 오리정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중요한 유적단지로 조성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우리문화사랑방
글쓴이 : 죽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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