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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이품송, 말티재, 그리고 선병국 가옥

good해월 2006. 9. 26. 14:16

정이품송, 말티재, 그리고 선병국 가옥

 

충북 보은(報恩). 갚을 '보(報)', 은혜 '은(恩)', 은혜를 갚는다는 뜻을 가진 고장입니다. 신라시대 때는 삼년산군, 고려 때는 보령이란 지명을 가졌던 곳입니다. 현재의 '보은'이란 지명을 가지게 된 데에는 조선 초 태종 때인 1406년 행정구역개편 시 충청도에 보령이 두 곳이어서 개명의 필요성에 의해 보은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법주사를 둘러보고 난 후 한차례 비가 내리는 듯싶더니, 하늘이 심기가 불편한 듯 우중충한 기운으로 가득 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여행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는 그리 반갑지는 않습니다. 심기 불편한 하늘만큼이나 저 또한 심기 불편한 마음으로 법주사를 떠났고, 이제나저제나 비가 그치기를 애써 기다렸습니다.

속리산 입구의 정이품송의 전경.
ⓒ2006 문일식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천연기념물이라고 하면 아마도 '정이품송'이 아닌가 합니다. 법주사를 나와 큰 대로를 따라 음식점 거리를 지나 얼마 가지 않아서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된 정이품송을 만날 수 있습니다. 충북 보은의 마스코트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보은' 내지는 '속리산'하면 단연 생각나는 명물중의 명물입니다.

▲ 말티재 자연휴양림 입구에 세워진 세조가 말티재를 넘는 모습의 조형물.
ⓒ2006 문일식
조선시대 불심이 유난히 강했던 세조가 말티재를 넘어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습니다. 왕이 타고 다니는 가마인 연이 정이품송을 지날 때쯤 가지가 왕성한 소나무를 보고 세조가 연이 걸릴 것을 염려하여 '연이 걸린다'라고 말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려서 연이 지나게끔 했다고 합니다. 세조는 소나무의 충정을 기려 현재 장관급의 벼슬인 '정2품'을 하사했고, 그러한 연유로 정이품송이라 불립니다.

▲ 천연기념물 103호인 정이품송. 상처입은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2006 문일식
수령은 600여 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고한 기품과 수려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수명이 100년도 채 안 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600년이란 세월은 거저 먹은 것은 아니었는지 노쇠한 모습이 역력하기만 합니다.

실제로 지난 1990년대 초 태풍 때 서쪽 가지가 부러져서 우산을 핀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진데다가 솔잎흑파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방에 방충망을 친 적도 있습니다. 몇 군데 지지대를 이용하여 고고하게 뻗어 내려가는 가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제법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 속리산 입구에서 바라본 말티재 입구.
ⓒ2006 문일식
정이품송에서 얼마 가지 않으면 고개를 하나 넘습니다. '말티재'라고 불리는 고개입니다. 법주사 쪽에서 올라갈 때는 완만하지만, 반대로 내려갈 때는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말티재는 정이품송과 함께 조선 세조의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고려 태조가 속리산에 갈 때 처음 닦인 길이고, 세조가 속리산에 행차할 때 박석을 깔았다하여 '박석재'라고도 불립니다.

가파르게 12굽이를 구불구불 올라가야 하는 험한 길이기에 세조가 연에서 말로 갈아탔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입니다. 속리산 쪽에서 말티재를 넘어오자마자 말티재 자연휴양림이 있으니 그곳도 둘러볼 만 합니다.

▲ 선병국 가옥의 사랑채 전경.
ⓒ2006 문일식
말티재를 내려와 보은의 99칸 대궐 집으로 알려진 '선병국 가옥'을 찾았습니다. 속리산에서부터 발원한 삼가천이 흐르는 곳에 연화부수형, 즉 말 그대로 물위에 뜬 연꽃 모양의 길지(吉地)인 곳에 지어진 가옥입니다. 조선시대 초기인 세종 때 가옥을 지을 때 신분별로 차등을 두었는데 서민은 10칸, 대군은 60칸 이상을 넘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규제는 조선시대 말에 이르러 무너지고 신분과 재력에 의해 집의 규모가 결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병국 가옥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지어졌고, 지을 당시 내로라하는 목수들을 뽑아 후하게 대접하며 지었다고 합니다.

▲ 비에 젖은 선병국 가옥 사랑채의 모습.
ⓒ2006 문일식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선병국 가옥 사랑채 앞…. 이곳에서의 짧은 시간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심의 회색빛 건물 사이로 내리는 암울한 회색빛의 비와는 달리, 깨끗함이 느껴지고 부드럽기까지 한 빗줄기가 땅 위를, 가옥의 지붕 위를, 그리고 주변 굵직굵직한 나무와 꽃잎 위를 적시고 구르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소리는 완벽한 하모니의 아카펠라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기왓골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처마 끝에서 번지점프를 하듯 떨어지고, 이내 작은 웅덩이를 만들거나 더 낮은 아래로의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 비가 내리는 가운데 사랑채 툇마루에서 무언가 열중이신 어르신의 모습.
ⓒ2006 문일식
선병국 가옥의 사랑채에는 한 어르신이 툇마루에 다소곳이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계셨습니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무척이나 정감 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사랑채는 'H'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운데의 4칸에 걸쳐 커다란 대청을 두고 양쪽으로 직각방향으로 방이 붙어 있습니다.

▲ 선병국 가옥의 사랑채에는 여러 가지 전통 창살을 달았습니다.
ⓒ2006 문일식
앞으로 튀어나온 곳으로부터 안쪽 깊숙이 툇마루 둘러져 있고, 창은 불발기문, 완자살문, 세살문 등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전통 창살을 고루고루 달았습니다. 파란색 글씨로 쓰여진 '무량수각' 현판은 대둔사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쏙 빼닮은 듯합니다.

사랑채와 한 쌍을 이루는 안채 역시, 사랑채와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는 행랑채가 안채를 끌어안듯 감싸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행랑채와 담들이 있어서 별개의 건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 선병국 가옥의 행랑채.
ⓒ2006 문일식
행랑채는 기둥 사이를 흙벽으로 막았는데, 뒤편 창문으로 벌레들이 많이 들어오는지 창문을 파란 모기장으로 감싸놓았습니다. 오래된 가옥들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으나, 사람이 기거하기 때문에 몸과 발걸음이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둘러보는 사람이야 여행객이자 답사 객이지만, 사는 사람에게는 둘러보는 사람들이 한낱 낯선 이방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채의 기단에 올려진 화분들이 시원한 비를 맞고 있습니다.
ⓒ2006 문일식
선병국 가옥에 있는 동안 비는 하염없이 내렸습니다. 건물의 기단 위에 올려진 화분도 오랜만에 촉촉함을 맛보는 중입니다. 분위기 때문인지, 선병국 가옥을 적시는 비는 더 이상 회색빛의 암울함이 아닌 시원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었고, 우산을 받쳐든 채 한동안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사랑채 마당에 고인 물웅덩이 위로 빗방울들이 즐거운 춤을 추는 모습은 비를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오늘은 빗방울이 그저 달콤하기만 합니다. 마치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처럼….

출처 : 영겁의 세월.
글쓴이 : 관덕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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