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발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간의 충돌로 발단된 광주학생운동은 11월 3일의 광주지역 시위를 통해 본격화되었다. 광주고보를 비롯한 광주의 각 학교 한국인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벌어진 이 날의 시위는 성진회 출신의 청년운동세력과 독서회중앙부 같은 학생 비밀결사들의 지도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당시 광주지역에는 독서회중앙부 아래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고보 등에 독서회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들 조직은 독서회중앙부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1차 시위 후 독서회중앙부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 지도부는 두 갈래의 투쟁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다. 하나는 1차 시위에 이어 2차 시위를 전개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광주의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1월 4, 5일경 독서회중앙부는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 등 광주지역의 사회, 청년단체와 결합하여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광주지역의 시위 소식을 접한 서울의 학생 . 청년 . 사회 단체들이 11월 7일 조사단을 파견하자, 학생투쟁지도본부는 서울에서 내려온 조선학생전위동맹의 夫建, 權遺根 등과 함께 전국 확산의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이로써 광주의 학생시위는 서울로 연계될 수 있었다.
한편 투쟁지도본부의 지휘아래 제2차 시위계획이 차질없이 추진되어 거사일인 12일에는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시위에는 학생 뿐 아니라 광주의 시민들도 합세하면서 투쟁의 강도를 높여 갔다.
2차 시위로 광주의 각 학교에는 다시금 휴교령이 내려지고 13일부터는 일체의 보도가 통제되는 등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시위 소식은 인편에 의해 먼저 전남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광주시위에 가장 먼저 호응한 것은 목포상업학교였다. 당시 목포상업학교에는 광주고보와 마찬가지로 독서회가 결성되어 있었으며, 광주지역 학생들과도 깊은 유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11월 9일 대표를 광주로 파견하여 광주학생의 지도부와 연대를 이루며 시위를 추진해 갔다. 그리하여 목포에서는 목포상업학교가 중심이 되어 11월 19일과 22일에 시위가 전개되었다.
목포에 이어 나주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나주는 한일학생간 충돌의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시위가 추진될 수 있었다. 나주에서의 시위준비는 학생측과 나주지역의 사회.청년단체의 연결아래 이루어졌다.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당초 17일을 기해 시위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임시휴교가 내려진 상태였으므로 27일 장날을 기해 시위를 전개하였다. 여기에는 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가세하였다.
목포와 나주의 시위에 이어 11월 29일 영산포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맹휴를 전개하였으며, 11월 30일에는 송정리 공민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키면서 12월에 들어서는 전남의 전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배경
⑴ 사회·경제적 배경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와 나주 사이를 통학하던 한·일 학생간의 사소한 충돌에서 비롯되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그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성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1920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조선병합 이후 일제는 토지조합사업을 통해 식민지 수탈구조와 안정적인 재정수입원을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헌병경찰제도를 바탕으로 무단정치를 시행하여 폭압적으로 한국민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방식은 곧 바로 한국민의 거족적인 저항에 부딪혀 3·1운동을 초래하였으며, 3·1운동은 일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혀 통치방식을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였다. 문화정치는 겉으로 유화적이고 세련된 모습을 띄고 있어 지배방식에서는 한 단계 발전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무단정치와 다를 바가 없는 기만적인 것이었다. 일제는 1920년 회사령을 폐지하고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경제공항의 위기를 타개하면서 동시에 조선의 산업구조를 식민지적 산업구조로 재편해 나갔다.
특히,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시행된 산미증식계획은 소위 '쌀 소동'으로 인한 일본 본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도시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동시에 농촌의 대량 이농현상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쌀 수요가 급증하면서 식량수급과정이 일시적으로 왜곡되어 1918년 일본 각지에서 도시노동자와 빈민들이 쌀을 요구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단기적으로는 쌀 소동을 해결하고 장기적으로는 일본자본주의 발전에 절대 필요한 저임금 유지를 위한 식량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했던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자작농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거나 헐값에 팔아 넘겨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그리하여 춘궁기에 먹을 쌀이 떨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해야만 하는 농민이 전체 농민의 절반에 가까웠으며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화전민과 만주·연해주 등지로 떠나가는 유랑민이 급증하였다.
이렇듯 일제의 경제침략과 수탈 속에 조선의 농촌경제는 점점 피폐해 갔다. 당시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학생들은 이러한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으며 이것이 통학열차 안에서의 일본인 학생과의 충돌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⑵ 정치·사상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국내적으로는 3·1운동을 통해 한국민의 거족적인 저항에 부딪힌 일본제국주의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폭압적인 무단정치 대신 유화적인 문화정치를 시행하였다.
1919년 9월 새로 부임한 사이토오 미노루 총독의 시정방침에 잘 나타나 있는 문화정치의 주요한 내용은, 총독에 무관 뿐만 아니라 문관도 임명할 수 있게 하고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바꾸며 일반관리와 교원들이 금테 제복을 입고 칼을 차는 것을 폐지하고 조선인의 관리 임용과 대우를 개선하며 언론·출판·집회·결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지방자치 실시를 위한 조사연수에 착수하며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운동세력을 분열시키고 더욱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기만적인 조치였다. 실제로 해방될 때까지 총독에 문관은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으며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경찰관서와 경찰관은 각각 3배 이상 늘어나고 조선주둔 일본군도 5,0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증강되는 등 무력에 의한 지배를 완화한 것이 아니었다. 문화정치는 무단정치와 그 지배의 본질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국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겉옷을 바꿔 입은 데에 불과하였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은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정치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성장을 이루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나주에서는 1927년 9월 신간회 나주지회가 창립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나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학생들의 대시위가 처음 시작되었던 광주에서는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광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들 단체들은 자신들이 속한 지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갔다.
특히, 광주청년동맹은 전남청년연맹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활약했던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했던 당시 전남청년연맹과 각 지역의 청년동맹, 신간회 지회에 참여하거나 연관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전남 청년연맹회에도 학교를 졸업한 성진회 출신들이 많이 참여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신간회·근우회·조선청년총동맹 등과 연계를 맺으면서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데서 기인했던 것이다.
⑶ 학생운동의 성장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 194개교에서 54,000여명의 학생이 참가한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시대 3대 민족운동의 하나로 일컬어져 왔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이렇게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전국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와 왜곡된 식민지교육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학생운동의 성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3·1운동에서 표출되었던 한국인의 불만을 무마하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의 교육제도를 일본의 교육제도를 기준으로 동등하게 한다는 준거주의(準據主義)를 표방하며 조선인에 대한 고등교육의 기회를 늘리고 4년 이내에 전국의 모든 면(面)에 최소한 1개의 보통학교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혜택은 주로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학생에게 주어졌다.
고등교육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 조선인 학생들은 항상 입학난을 겪어야 했으며 교육내용 역시 실업교육과 일본어·일본역사 교육이 주가 되어 충실한 일본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양성하는데 중점이 두어졌다. 비록 교단에서 교사들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위협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없어졌으나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항상 권위주의적으로 학생들 위에 군림하였으며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또한 이들은 조선인 학생을 인격적으로 무시하였으며 비교육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식민지 차별교육에 대한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학생들이 민감하게 느끼고 불만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자신들을 둘러싼 식민지 사회의 사회경제적 피폐상은 이들로 하여금 단순히 교육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교육적 차별과 식민지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나아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학생단체를 조직하거나 동맹휴학 등을 감행하면서 학생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학생층은 조선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지식층들이었으며 노동자·농민 등 다른 사회계층보다 조직화되기 쉬웠기 때문에 항상 민족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일제시대 3대 민족운동이었던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학생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목표
1929년 11월 3일, 이날은 일본인에게는 4대 명절중의 하나인 명치절이었으나, 우리에겐 음력 개천절로서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되새겨 볼만한 날이었다. 특히 학생들에게는 성진회 창립 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 날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명치절 기념행사에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극도로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다. 지난 10월 30일 나주역 앞에서의 한 . 일 학생간의 싸움이 빌미가 되어 수 차례의 충돌이 거듭되었기 때문이다.
11월 3일에도 광주의 중심가에서 한.일 학생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장재성 등의 독서회중앙부 지도세력은 학생들의 시위를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지도하였다. 당시 시위는 전남산 누에고치 6만석 돌파기념 경축대회에 참여한 수많은 도민과 시민들이 호응하였던 까닭에 3만 군중이 가담하였다고 표현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날의 시위는 일인학생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시위의 양상이 격렬해지고 의외의 규모로 확대되자, 일본측은 11월 9일까지 각급 학교에 휴교조치를 내렸으며, 시위지도부는 학생투쟁지도 본부를 결성하여 학생투쟁의 전국 확산문제와 광주에서의 투쟁의 장기화 문제를 논의하였다.
학생투쟁지도 본부는 제2차 궐기 날짜를 광주 장날인 12일로 잡았다. 그것은 보다 광범한 대중의 호응과 참여를 유도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러한 제2차 시위계획은 진상조사차 광주에 와있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전위동맹, 조선청년총동맹 등의 사회운동단체와 긴밀한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이처럼 치밀한 계획아래 시도된 제2차 시위는 대규모 가두투쟁 형태로 전개되었다. 결국 또다시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언론기관에는 보도금지령이 하달되었다.
당시 내세운 두 종류의 격문 가운데 중요한 부분만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격문 1
㉠ 검거자를 즉시 우리의 손으로 탈환하라
㉡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라
㉢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라
격문 2
㉠ 청년 대중이여 죽음을 초월하여 투쟁하라
㉡ 피검자를 즉시 석방하라
㉢ 만행의 광주중학을 폐쇄하라
㉣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라
㉤ 피압박 민족 해방만세
위의 <격문 1>에서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교육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을 주장하였다. 식민지 노예교육이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에게는 전문교육을 시키지 않고 식민지 사회구조에 적당한 실업교육만을 시키는 민족차별교육정책을 말한다. <격문 2>는 일반민중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피검학생의 석방과 일제타도 그리고 피압박민족해방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사회운동단체의 후원아래 독서회중앙부와 학생투쟁지도본부의 체계적인 지도력과 애국학생의 조직적인 투쟁력이 결합하여 전개되었음을 알아보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확산
⑴ 서울지역의 전개 양상
가. 1929년의 시위
광주의 학생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학생운동단체와 사회운동단체인 조선학생회와 학생전위동맹,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신간회 등은 사건의 진상 조사를 위해 11월 7일과 9일에 각기 특파원이나 조사단을 광주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광주에 파견되었던 특파원들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서울에서의 시위가 추진되었다. 여기에 조선공청 전남책임자로 광주의 2차 시위를 지도했던 장석천과 강석원 등이 11월 16일 서울에 와서 학생전위동맹의 인사들과 합류하면서 학생시위의 추진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시위를 일으킨 뒤 그 여세를 몰아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들은 우선 '만천하 학생제군에게 격함'이라는 격문 8천여매를 인쇄하였으며, 12월 2일을 기해 시내 각 학교에 격문을 살포하였다. 그런데 주동인사들이 일제에 피체됨으로써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미 학생전위동맹이나 독서회 같은 조직기반을 통하여 서울시내 각 학교에 의거계획이 전달되었으므로 학생들의 시위는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서울지역 1차 시위운동은 12월 4일 경성제일고보를 시작으로 13일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학교 단위로 전개된 학생시위는 9일부터 학교간의 연합시위로 발전되어 갔다. 이 같은 연합시위는 조선공산청년회와 학생전위동맹의 지도를 받아 각급 학교에 조직된 투쟁지도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13일까지 계속된 대시위와 맹휴투쟁에는 연인원 1만2천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제 당국이 서둘러 12월 13일에 겨울방학을 단행함으로써 서울의 1차 시위는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한 채 진정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광주의 1차 시위 소식을 접하면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였던 신간회는 중앙상무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학생사건 보고 대연설회'와 '언론압박탄핵대연설회'를 개최할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2월 초 서울 시내 각 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 시위 소식을 일반에게 알리고 경찰의 탄압을 규탄하기 위한 민중대회를 12월 13일에 안국동 4거리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개최 당일 직전에 주도 인사 30여명이 피체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격문이 뿌려지던 12월 3일 경성제일고보의 격문에는 신간회와 조선청년총동맹의 민족적 환기를 호소하면서 학생들과 사회인사들의 결합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간회가 학생들과는 별도로 민중대회를 추진함으로써 학생과 신간회 인사들의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서울의 1차 시위에서 뿌려진 격문은 대체로 10여종에 달했는데, 각 격문의 내용은 광주학생들에 대한 호응과 지원, '타도일본제국주의'의 기치 아래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치안유지법 및 기타 악법 즉시 철회,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의 자유 획득, 일제의 둔병 일본인이민 반대, 군사경찰정치 총독정치 반대 등으로 대체로 대동소이했는데, 이를 통해 당시 학생들의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울의 1차 시위는 먼저 학생시위의 계획과 추진이 학생전위동맹이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같은 학생운동단체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들의 조직 동원력을 바탕으로 학생시위의 불이 당겨졌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서울에서 학생운동조직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1926년 6 . 10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경험과 1927, 8년의 맹휴를 거치며 발전한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살펴질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의 연합시위가 전개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격문에서 '타도일본제국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통하여, 시위의 성격이 광주학생들에 대한 지원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지배체제에 전면 항거하는 독립운동의 형태로 발전해 간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서울의 1차 시위는 광주학생운동이 광주 . 전남 지역을 벗어나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나. 1930년의 시위
서울 시내 각 학교의 휴교와 조기 겨울방학으로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간 학생시위는 1930년 1월 6일 개학과 더불어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2차 시위는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되었다.
2차 시위에는 1차 시위 때와 달리 남학생 뿐 아니라 여학생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전개되었다. 이화여고보 . 숙명여고보 . 경성여자상업학교 . 동덕여고보 . 근화여학교 . 배화여고보 . 여자미술학교 . 실천여학교 . 경성보육학교 등 30여 학교의 학생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20일까지 계속된 학생들의 시위로 인하여 각 학교들은 개학하자마자 다시 무기휴교에 들어갔으며 휴교하지 않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면서 투쟁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21일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교직원 모임인 친화회 회원 30여명이 진명여학교에서 모여 구속학생 석방을 주장하며 여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고 나서기도 했다.
여학생들의 시위에는 여성단체인 근우회 및 기독교여자청년회 인사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여성단체 차원에서 개입된 것이 아니라, 신간회의 허정숙과 박차정 같은 여성인사들의 개인적 활약이 있었을 뿐이다. 사회 여성인사들과 연결된 이화여고보의 최복순과 경성여자상업의 송계월 등이 여학교 대표자 모임을 1930년 1월 14일 주선하였고, 이 자리에서 15일 오전 9시 30분을 기해 맹휴와 시위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남학생 대표도 참가하면서 서울지역 학생들의 연합시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서울의 2차 시위에서는 맹휴 및 가두시위가 동시에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때가 시험기간이었으므로 백지답안을 제출하며 항쟁하는 백지동맹도 전개되었다.
2차 시위는 1차 때에 비해 시위의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음이 특징이다. 15일의 시위만 해도 5천여명의 학생이 서울의 거리를 메우며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학생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던 점도 1차 때와 달랐던 점이다. 1차 때 남학생 주도세력이 일제에 피체당하였던 것도 여학생들의 진출을 두드러지게 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그 같은 시위의 외적 변화와 더불어 2차 시위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적기가 등장하는 등 시위학생들의 격문과 구호가 1차에 비해 계급적 성향이 보다 강렬하게 표출되고 있었던 점이다. 그와 함께 투쟁의 성격도 광주학생의 지원에 그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수준으로 발전되면서 정치운동의 양상을 띠워 나갔다. 서울의 시위가 이처럼 고조되었던 1월 15일에서 20일까지의 기간은 전국적으로 볼 때 광주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⑵ 지방의 전개 양상
가. 1929년의 시위
광주지역 학생시위의 소식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도 전해졌다. 먼저 전국적 투쟁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주에서는 12월 1일에 공주고보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한데 이어 12월 7일에 영명남학교, 12월 13일에 영명여학교에서 맹휴가 일어났다. 공주금성보교도 보조를 맞추어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평양에서는 12월 5일 평양 거리에 격문이 붙여졌고, 12월 16일 7개교 학생대표들이 회동하여 광주운동에 동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12월 10일에는 개성의 송도고보의 맹휴가 일어났으며,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에서는 맹휴와 동시에 시위대를 구성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2월 12일에 송도고보와 인천북상업학교에서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12월 13일에는 개성상업학교와 개성학당, 인천상업학교에서 맹휴를 단행하였고, 원산상업학교에서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단행하였다. 12월 14일에는 평양숭실전문학교가 백지동맹을 단행하였고, 원산고등여학교에서는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12월 16일 함흥에서는 1920년대 후반 선구적인 맹휴 투쟁을 전개하였던 함흥고보가 중심이 되어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제1차 시위를 단행한 뒤 전원 동맹퇴학원을 제출하며 맹휴를 전개하였다. 12월 15일 원산상업학교, 진주고보, 12월 16일에는 평양에서 광성고보, 평양여고보, 숭인학교, 평양농업학교 등이 맹휴를 단행하면서 18일까지 3일 동안 평양시내 중등학교 12개 가운데 9개 학교가 투쟁에 참가하였다. 17일에는 숭실중학, 춘천고보, 평양고보, 18일에는 함흥농업학교, 19일에는 춘천고보 전교생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맹휴를 단행하였고, 20일에는 부산 동래고보 학생들이 광주학생의 무조건 석방과 가해자의 엄벌을 요구하며 맹휴를 단행하였다. 21일에는 함흥제이보교, 23일에는 함북 경성고보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이상에서 보듯이 지방에서는 11월 16일 함흥고보의 시위를 시작으로, 공주, 개성, 인천, 원산, 평양, 함흥, 부산, 춘천, 진주, 경성 등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공주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12월 10일에서 23일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는 서울의 1차 시위가 대체로 끝나가던 때였다. 즉 서울에서 조기방학을 맞이하여 잠복기에 들어갈 시기에 그것을 이어받아 지방에서 시위투쟁을 전개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12월 1일부터 12월 하순까지 학생들의 투쟁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숭실전문과 공주금성보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중등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던 점에서, 중등학생이 시위의 중심에 섰던 것을 알 수 있다. 투쟁 양상은 맹휴, 시위, 백지동맹 등으로 나타났는데 대체로 시위보다는 맹휴가 많은 편이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이 시위를 중심으로 한 투쟁 양상을 띠어갔던 것에 비해 투쟁의 강도가 덜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함흥고보의 시위는 투쟁성격 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함흥고보는 1920년대 후반 학생맹휴의 선두에 섰던 학교답게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 12월 16일에 시위를 일으켰다.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맹렬하게 맹휴를 전개한 바 있었던 함흥고보는 1928년 6월 국내 각 중등학교와 재일 동포사회로 격문을 발송하면서 전국적 궐기를 주창할 정도로 맹휴를 이끌고 있었다. 때문에 일제 당국도 1920년대 후반의 전국적 맹휴를 함흥고보 맹휴의 확대현상으로 파악할 정도였다. 함흥고보는 그와 같은 운동의 축적 기반 위에서 광주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발전적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12월 16일 함흥고보를 중심으로 한 학생시위에는 영생여고보, 농업학교 등 함흥 시내 각급 학교가 연합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때 학생들은 광주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갑산 화전민사건과 함흥 수리조합사건 등 사회문제도 제기하면서 대중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드문 사례이지만, 학생시위가 학생운동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처럼 대중운동의 성격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주도 학생맹휴가 발달한 곳이었다. 1928년 7월에 진주고보와 농업학교는 전학생이 참가하는 가운데 연대를 이루며 공동맹휴를 전개한 바 있었다. 이때 이들은 맹휴본부를 설치하고, 내무, 회무, 조사, 경무의 4부 등의 부서를 두어 조직적으로 맹휴를 전개할 정도로 학생운동의 기반이 발달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직적인 맹휴를 전개한 경험 위에서 광주와 서울의 학생시위에 호응하여 곧바로 시위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맹휴와 학생시위의 배경에는 역시 학생운동조직의 성장이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6 . 10 만세운동 때만 해도 학생운동조직은 서울에 집중되었고 지방에는 크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26년 후반 이후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25년 치안유지법의 발동과 함께 지하조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적 조건, 맹휴의 성격상 학교단위가 효과적이었던 측면과 더불어 1927년 신간회 결성으로 전국적 지회의 조직이 이루어지고, 또한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으로 학생들의 의식이 제고되었던 것도 함께 염두에 두고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1927년과 1928년에는 학생운동단체가 학교 또는 지방 중심의 소단위의 조직으로 성장하였는데, 이 무렵 전국적인 맹휴의 급증현상은 학생운동조직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 연장선상 위에서 1929년의 시위가 확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 1930년의 시위
지방에서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1930년 1월초 개학과 더불어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위는 3월까지 전국 각처에서 전개되었다. 서울의 경우 1월중에 시위가 대체로 마무리되는 것과 달리 지방에서는 3월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3 . 1운동 11주년인 1930년 3월 1일을 전후해서는 3 . 1운동 기념시위의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된다.
광주학생운동의 세 번째 단계는 전국으로 볼 때 1월 8일 광주를 선두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무기휴교 끝에 1930년 1월 8일 개학한 광주지역의 학생들은 백지동맹을 전개하였고, 제3차 시위를 계획하다가 사전 발각되어 1월 16일 48명이 무더기로 퇴학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지역의 학교들은 다시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그러한 가운데 전국 각처에서는 1929년 1차 시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광범한 지역에서 적극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워낙 광범한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므로 경향성만을 간추려 살피도록 한다.
첫째, 1929년 12월에는 주요 도시에 국한되어 일어났던 학생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던 점이다. 이때에는 읍.면 단위 지역의 학교로까지 운동이 확산되면서, 투쟁의 형태도 시험거부, 백지동맹, 동맹휴학, 격문살포, 교내시위, 가두시위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둘째, 지방 확산과정에서 학생운동 조직의 지도 아래 시위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던 점이다. 그러한 사실은 사회과학 연구를 표방한 학생운동 조직이 전국으로 발달하고 있었던 점과 비밀 독서회가 전국 각처에서 생겨나고 있었던 점과 관련하여 살펴질 수 있다.
6.10만세운동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역할로 미루어, 이 무렵 지방에서 생겨나던 사회과학연구회 등의 역할은 쉽게 짐작될 수 있다.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에서 서울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조선공청의 표면단체로 활동했던 것처럼, 보다 구체적인 조사가 따라야 하겠지만, 지방에서도 과학연구회가 조선공청이나 사회주의운동 비밀결사와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하겠다. 사회과학연구회가 표면단체로 활동하였던 반면에 이 무렵 지방으로 확산되었던 독서회는 학교 단위의 비밀결사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독서회중앙부의 지도아래 시위를 전개해 갔던 것처럼 전국 각처에 조직되고 있던 독서회 역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 확산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도 여러 형태로 조직된 학생비밀결사가 적지 않았는데, 그러한 학생비밀결사의 영향도 학생시위의 확산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대부분의 경우가 학생들만의 시위로 전개되었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신간회나 근우회, 청년동맹 같은 사회단체들이 결합하여 추진한 경우도 적지 않았던 점이다. 북청과 함북 경성 등지에서는 신간회가 관계되었고, 통영에서는 소년동맹이 시위를 지도하였고, 철원과 원산, 정평 등지에서는 청년동맹이 격문을 배포하면서 학생시위를 주동하였다. 영흥지역에서는 천도교 계열과 연결되어 시위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0년 2월 김해에서는 농민과 노동자가 연대한 시위를 촉구하는 격문이 뿌려지는 노동운동과의 연대도 모색되고 있었다.
넷째, 격문과 구호가 이전보다 투쟁성에서 강도있게 표출되고 있었으며, 사회주의적 구호가 많이 나타나고 있었던 점이다. 광주학생에 대한 호응이나 식민지 교육문제보다는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와 같은 정치적 구호가 많이 등장하였으며, 전국 각처에서 적기가 등장하고 있었다.
다섯째, 1929년의 시위와는 달리 연합시위로 전개된 곳이 많았다는 점이다. 1월 9일 개성 송도고보, 호수돈여고보, 미리흠여학교, 함흥 영생중학교와 영생여고보, 1월 17일 원산누씨여교와 청년학관, 1월 21일 평양시내 학생들의 연합시위, 청주고보와 청주농업학교의 연합시위, 1월 25일 함북 경성고보와 경성농업학교 등 대부분의 도시 지역에서는 연합시위가 일반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평양의 경우는 1월 21일 3천여명의 학생이 궐기하여 24일까지 연합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이때 광성고보와 숭인중학 학생들은 일제의 내각총리대신과 척무대신 앞으로 항의문을 보내면서 시위투쟁을 전개했다.
여섯째, 연합시위로 전개됨에 따라 자연히 시위도 대규모로 전개되었던 점이다. 평양에서는 3천명의 학생이, 그리고 청주나 함북 경성 같은 곳에서도 1천여 명의 규모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연합시위의 경우 5백여명의 규모가 일반적이었다.
일곱째, 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보통학교 학생의 시위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던 점이다. 1월 18일 당진석문보교, 1월 25일 괴산보교, 2월 7일 충주대소보교, 2월 하순 영변고성보교, 소림보교생의 시위 등 전국에서 54개교 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광주학생운동 당시 참가한 학교 194개교의 4분의 1이 넘는 것이다. 그만큼 보통학교 시위의 비중이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보통학교의 시위는 대체로 서울이나 대도시의 경우보다 농촌과 같은 시골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학교의 시위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대체로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 적지 않았던 점이다. 이는 3 . 1운동의 전통과 아울러 6 . 10만세운동 때 전국 각처에서 독자적으로 맹휴를 전개해 갔던 경험의 축적에서 가능한 것으로 분석된다. 보통학교의 경우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는 학생운동조직이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시위는 그와 같은 민족의식에서 시위를 독자적으로 전개해 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덟째, 시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전에 발각되어 불발에 그친 경우도 많았으며, 이로 인하여 비밀결사가 발각되는 일도 많았다. 이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간 측면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의 경우, 대구고보를 비롯하여 대구사범, 대구상업 등 시내의 전학교가 1월 20일 연합시위를 일으키기로 추진하던 중 1월 18일 사전 발각되었다. 대구지역에서는 대구고보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비밀결사 조직이 발달하고 있었다. 대구고보에서는 1926년 겨울 맑스주의 강좌를 연데 이어 1927년 11월 비밀결사 신우동맹을 조직하고, 동년 12월에 혁우동맹, 1928년 2월 적우동맹으로 발전 개편하였다가, 다시금 일우당, 구화회, 밝새회, 우리동맹 등으로 분화되었는데, 1928년 9월 26일 구화회와 밝새회가 중심이 되어 동맹휴교를 단행하다 비밀결사가 1928년 11월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 일로 100여명의 학생이 피체당하는 피해를 입어야 했다.
아홉째, 학생들이 맹휴나 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일경과 무력충돌로 맞서며 무력시위를 전개한 경우가 적지 않았던 점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시위가 한 . 일 학생간의 무력충돌로 일어났듯이, 곳에 따라서 학생들의 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월 21일 정읍에서는 정읍농업학교 학생 170여명이 맹휴를 단행하다 주동자가 잡혀가자 학생들이 정읍경찰서로 쇄도하여 일경과 일대 충돌을 일으켜 70여명의 학생이 구속된 일이 있었다. 이밖에도 시위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를 저지하는 일경과 무력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열번째, 서울의 경우 2차 시위에서 여학생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던 것과 달리 지방에서는 남학생들이 주도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평양에서는 기생학교인 기생권번생 2백여명이 평양의 연합시위에 참가하였고, 영변에서는 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등산유치원생 수십명도 참가하여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끝으로 2월 중순 이후부터는 시위가 3·1운동 기념시위의 형태로 추진되고 있었던 점이다. 1930년 3월 홍원에서 3백여명의 소년들이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여기에 다수의 군중들도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 . 1운동 이후 1920년대는 3월 1일을 전후한 시기에 3 . 1운동기념시위가 끊임없이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그러한 전통 위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열기가 겹치면서 만세시위의 형태로 전환시키려는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우는 달랐어도 3 . 1운동 기념일에 즈음하여 인천지역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투쟁방침을 밝히는 격문을 작성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전환을 주장하기도 했다.
⑶ 국외 한인사회의 호응과 지원
학생들의 투쟁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해외로까지 파급되어 갔다. 북간도를 비롯하여 만주, 중국 관내와 일본, 미주지역 등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던 곳이라면 어느 한곳도 빠짐없이 국내의 광주학생운동에 깊은 관심을 내보였다.
그 중에서도 한인사회가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던 북간도지역에서는 국내처럼 학생들의 시위로 이어졌다. 북간도에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이 전달된 것은 1929년 12월 하순경이었다.
국내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북간도 학생들의 시위는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학생들의 주된 구호가 '광주학생에게 동정하자'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연길과 용정을 중심으로 두도구, 의란구, 삼도구 등지에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탄압을 받아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한 가운데 2월 6일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에도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천도교학생부, 동만주조선청년총동맹, 조선공산당만주총국, 재만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의 단체에서도 광주학생운동에 적극 호응하고 나섰다. 만주 길림에서는 윤자영 등이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1930년 1월 7일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 갔다. 이들은 만주지역으로 하얼빈과 중동선, 북간도, 남만주 등지로 조직을 확대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조직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은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에 크게 고무되어 '왜총독 재등실을 죽이자, 철도전선을 파괴하자, 납세거절, 관공청방화' 등의 내용을 담은 격문을 인쇄하여 국내외로 배포하였다.
중국 관내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접하면서 상해 . 북경 . 천진 등지에서 크게 움직임이 일어났다. 상해에서는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주도로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통일단체의 결성을 발기하여 1월 3일 흥사단, 노병회, 한인청년동맹, 학우회,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 등의 각 단체 대표 20여명이 모여 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단체연합회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을 적극 원조할 것과 일제침략과 탄압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고 군중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결의에 따라 1월 11일 오후 법조계 민국로침례회당에서 연합회 주최로 군중대회를 개최하였다. 군중대회는 안창호의 개회사에 이어 김원식이 대회 소집경과 보고,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 대표 구연흠의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진상보고, 그리고 각 단체 대표자와 참가자들의 연설이 있었다. 군중대회 후 이들은 가두시위를 전개하려고 했으나 공공조계 당국의 저지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해의 이와 같은 동향과 분위기는 6 . 10만세운동 직후 열렸던 6 . 10만세운동경과보고대회 때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6 . 10만세운동경과보고대회에서 당시 안창호가 민족유일당운동을 제창하고 나와 1920년대 후반 독립운동계의 흐름을 크게 진작시켰던 것에 비하면,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그 열기와 강도가 덜해진 느낌인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분위기는 국공합작의 열기가 최고조에 올라 있었을 때의 6 . 10만세운동과 국공분열의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던 1930년 초 중국정세의 변화와 관련 깊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월 11일 북경에서는 조선학생회 주체로 화북대학 강당에서 임시대회가 열려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진상보고회를 열고 지원방안을 모색하였다.
일본에서는 12월 24일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주최로 동경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인 학생 200여명이 모여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으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서도 27일 비슷한 모임을 가지려다가 사전 발각되어 70여명이 검거되고 말았다. 오오사카에서는 대판유학생학우회가 역시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연설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일제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대판소년동맹의 송성철은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알리는 팜플렛트 {뉴스}를 발행하여 동맹원들과 일반사람들에게 배포하였으며, 대판조선노동조합은 확대집행위원회 명의로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광주학생운동 탄압에 대한 항의문을 발송하면서 국내의 움직임에 호응하였다.
이밖에 러시아의 연해주와 미주지역에서도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게재하거나 시위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비판하는 등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렇듯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확산되어 갈 때 국외의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조직들은 그들의 조건에 따라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고 지원하였다. 한인사회가 일찍부터 발달하여 한인학교가 많았던 북간도 지역에서는 국내와 같은 방식인 학생들의 시위로서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북간도 일대에서는 1월과 3월 사이에 걸쳐 20여회의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독립운동조직들은 광주학생운동에 크게 고무되어 당시 어려워진 독립운동계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광주학생운동은 시위에 참가한 학교와 학생수만도 보통학교 54개교, 중등학교 136개교, 전문학교 4개교 등 194개교에 5만4천여명의 학생이 참가하면서 전국의 각처와 국외의 한인사회로까지 파급되면서 전민족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학생운동상의 위상
학생운동은 교육문제를 중심한 학원운동과 사회비판·사회개혁·사회혁명적인 사회운동, 정치운동으로 내용을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와 같이 학생운동은 영역이 다양하고 종합적이다. 그런데 대개는 학원운동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학원운동으로서 학생운동은 1928년의 함흥학생운동을 통해 성숙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학생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함흥학생운동에서 전국운동이 형성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일 정도로 함흥학생운동은 이념이나 조직이나 운동전개 방식에서나 학생운동의 원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광주에서도 함흥과 같은 맹휴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을 좁게 보면 1928년의 광주운동의 연장이라고 보겠지만 넓게 보면 1920년대 전국학생운동의 결실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에 11월 11일 밤에 광주에 살포된 격문을 보면 광주학생의 특수문제와 더불어 조선본위교육, 교우회의 자치권문제, 식민지적 차별교육철폐,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사회과학연구의 자유 등, 전국학생의 일반문제를 대변하면서 1920년대 맹휴투쟁의 주장을 총결산하듯이 종합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의미는 발전사적 측면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해 12월 서울에서 각급 학교의 맹휴투쟁이 전개될 때 학생들의 구호에는 한결같이 '구속학생을 석방하라' '광주학생을 따라가자' 등으로 광주학생운동의 계승의지가 분명했다. 제3학기가 시작된 이듬해 1월에도 서울의 중동학교 학생은 '광주학생 구제'를 맹휴투쟁의 구호로 삼았고, 부여·천안·전주·진주·여수·담양·재령·해주·사리원·회령·경성의 각급 학교에도 '광주학생사건'에 관한 각종 벽보 또는 전단이 나붙었다. 2월에도 '피수학생만세' '옥중학생만세' 등으로 이어졌고, 2월 8일 함경북도 길주의 덕산보통학교에는 '광주사건 검속학생 석방만세'라는 전단 73매가 살포되었고, 함북 청진여고에서는 2월 17일 "전조선에 걸친 광주학생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81매의 전단이 살포될 정도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광주학생운동이라는 하나의 목표와 하나의 방식의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공간적으로는 일본과 중국, 하와이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와 같이 광주학생운동은 국내외에 걸쳐 1920년대 학생운동을 총결산했다는 것을 역사적 의의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운동으로 발전할 때 학원운동이 정치운동 즉 독립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으로 성격상의 변화가 있었다. 1920년대 맹휴투쟁이 함흥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나, 1929년 11월 12일 광주학생의 시위투쟁까지는 격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좀 진보적이고 과격해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교육문제, 학원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11월 19일의 목포운동부터는 교육문제 학원문제도 사회운동, 정치운동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고 '적색 로서아를 지지하자' '제국주의전쟁 절대반대' '노동자 농민은 혁명적 조합을 결성하라' '세계무산계급 단결만세' 등의 구호에서 1928년까지 또는 11월 12일의 광주운동까지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사회주의 성격이 급격히 부상하고 있다. 아울러 학생운동을 독립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전의 학생운동이 학원운동으로 전개될 때도 물론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간접적인 경우가 많았다. 또 1920년대 운동에서 보듯이 학생이 학원운동과 정치운동을 별개로 추진하고 전개한 경우가 일반 추세였다. 그런데 광주학생운동부터 학생운동을 직접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정치운동과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는 1월 15일 서울운동 이후 '조선독립만세'의 구호가 학생운동의 중심 구호로 확산되면서 전국화 되었다.
그와 같이 광주학생운동은 학원운동을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키면서 학원운동과 정치운동을 동시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학생운동은 학원문제보다 정치문제를 앞세운 독립운동으로 전개한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이 학원운동에서 정치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발전하는 분수령상의 위치에 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성격도 역시 중요한 역사적 의의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성격은 광주학생운동이 신간회, 근우회, 조선학생전위동맹, 조선청년총동맹의 지원을 받으며 또 사회주의운동의 지원도 받으며 전개되는 가운데 고조되어 갔다고 이해된다. 그와 같은 성격의 역사적 위치는 1929년 3대 민족운동이라 할 수 있는 광주학생운동, 원산노동운동, 용천소작농민운동의 경우가 가지고 있는 공통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즉,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이 1920년대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운동을 중심한 사회경제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1929년의 원산노동파업과 용천소작쟁의 운동을 고비로 사회경제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자 농민운동 조직이 발달하고 있었던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광주학생운동의 독립운동상의 위상
학생은 이상주의에 경도될 연령이고 지식을 탐구하는 집단이므로 학생의 지성은 이상주의와 지식탐구의 욕구가 결합하여 형성된다. 때문에 학생은 자연 진보성을 가지게 되며 동시에 비판 집단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 후진국이나 식민지사회에서 학생운동이 선진국의 경우 보다 더 발달하는 이유도 비판 대상인 현실의 모순이 선진국사회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이고, 다음에 농민이나 노동자 같은 사회운동 담당자들이 계급적 성장이 미숙하여 지식인이나 학생이 그것을 대신하고 대변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학생운동의 민족운동상의 기본적 위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1920년대 한국학생운동에서도 잘 나타나 있고, 광주학생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발전한다는 것도 그러한 성격이 고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주학생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의도적으로 추진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것이 광주학생운동의 핵심조직으로 활동했던 독서회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서회는 성진회나 소녀회의 계승 또는 발전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단순 독서회가 아니라는 것은 알려진 이야기이다. 또 광주학생운동을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키려던 시도는 신간회에서 광주학생운동을 3·1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으로 발전시켜 보려고 했던 계획에서도 나타나 있다. 그것이 12월 13일 안국동 민중대회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사전 봉쇄로 무산되고 말았다. 신간회의 민중운동 계획 같은 질적 변화는 일본경찰이 특별히 경계하였으므로 실현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학생운동의 질적 변화는 사회운동 단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학생이 주도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질적 변화는 11월 12일의 광주시위운동에서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외치는 구호나, 11월 19일 목포시위운동에서 일본제국주의 타도, 피압박민족해방만세의 구호를 통해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독립운동의 전단은 12월 서울운동에서 더욱 확산되어 1월부터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가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다. 여기에 이르면 학생운동이 주체가 학생이라는 것 뿐이고 운동성격은 학원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 정치운동 그리고 독립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체는 학생이었다. 그러므로 학생에 의한 정치운동, 독립운동이라는 점에서 1929년 11·3운동은 어디까지나 학생운동인 것이다.
다음에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의 논리의 문제이다. 여기서 논리 이전의 민족감정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당시의 언론보도처럼 광주학생운동이 민족감정의 소산으로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학생운동을 과소평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민족감정문제를 외면해서 안된다는 생각이다. 식민지하의 학생은 길거리에서 일본인 학생을 만나기만 해도 경련을 일으켰던 그 정서적 분위기를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는 이념상의 문제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념은 당시의 격문을 통해 보아야 하는데 11월 12일 광주운동의 격문을 보면 차별교육의 문제, 조선본위교육, 교우회의 자치권,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 사회과학연구의 자유 등, 진보적이기는 해도 민족주의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전의 학생운동의 학원문제에 한정하던 것을 독립운동으로 발돋움하며 민족운동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9일의 목포운동의 구호를 보면 앞에 소개한 바, 사회주의 지향성이 대단히 높았다. 그리하여 서울과 전국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민족주의 구호와 사회주의 구호가 혼재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듬해 1월 15일 서울의 5천여 학생의 시위운동에서 이화여고에서 약소민족해방만세, 제국주의타도만세, 피압박민족해방만세, 무산계급혁명만세라고 쓴 전단을 살포하며 시위할 정도로 맑스주의적 성향을 높이고 있었다. 여기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민족운동은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일반적 추세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끔 민족운동 또는 독립운동이 사회주의 성향을 보였던 사실에 대하여 거부감을 나타내는 경우를 보는데 그것은 해방후의 분단논리 때문이다. 식민지 자본주의에 반발하는 독립운동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발전시킨 사회주의에서 논리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학생들의 소박한 사고로는 자연스러웠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은 팜프레트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이상주의에 불타는 학생이 좋은 말로만 엮어놓은 팜프레트를 읽으며 얼마든지 사회주의의 이상에 도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1929년은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덮쳐 자본주의가 몰락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던 때였다. 한편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사회주의를 이상하게 볼 이유가 없었던 때였다. 당시의 한국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분화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사회주의를 국제적 계급주의라고 교조적으로 이해할 때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학생운동에서 사회주의 구호가 부각된 것을 해방 후 또는 오늘날의 좌우 논리로 이해해서 안될 것이다.
그와 같은 광주학생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발전하면서도 끝내 학생운동으로 끝맺게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 이유는 신간회나 근우회를 비롯한 사회운동 조직이 학생운동을 인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12월 13일 민중대회 계획이 무산된 후 그 이상의 계획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학생운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해산, 개편 절차를 밟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으로 운명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민족운동사 총체적 측면에서 반성할 문제이다. 특히 코민테른이나 프로핀테른의 결정에 지나치게 예민했던 조선공산당계열의 극좌노선을 반성해야 한다. 국제사회의 변동을 주체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의지했다면 그것은 역사를 후퇴시킨다는 교훈을 반추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신간회 해체작업을 추진하느라고 광주학생운동이 학생운동으로 끝났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동사 측면에서 보면 광주학생운동이 1920년대 학생운동을 총결산했다는 점과 동시에 1920년대 민족운동을 총결산했다는 의미도 가지게 되었다. 1920년대 운동을 결산한 역사적 사건이 달리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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