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궁화지킴이' 카페에서 모셔옴 - 여ㆍ야 광주학생독립운동 정신 되살리기 나섰다
○한나라당 맹형규의원은 ‘학생의 날’(11월3일)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의미와 명칭을 변경하는 결의안을 9월5일 국회에 제출했다. ○맹형규 의원이 국회에 제출한 결의안은 3ㆍ1운동과 함께 일제치하 전국적으로 일어난 양대 독립운동이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그동안 평가를 제대로 받아오지 못함에 따라 명칭과 역사적 의의를 분명히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념과 역사성을 기리는 이번 명칭변경 결의안은 2005년 정기국회에 제출되어 해당 상임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결의안 발의에 참여한 여야 국회의원은 총26명이며 정당별로는 한나라당 18명, 열린우리당 5명, 민주당 3명 등이다. ○맹형규 의원은 “권위주의 정권시절 그 의의가 훼손된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으로 부활시키는 것이야 말로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라고 의미부여를 하며 “여야가 함께 한 이번 결의안이 지역갈등을 딛고 민족의 역사를 되찾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때마침 한나라당을 대표해 광주 김대중 컨벤션센터 개관식에도 참석한 맹형규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화해의 시작은 한나라당이 호남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을 재평가하는 것에서 출발하자”고 제안하며 “영호남의 화합이야 말로 대한민국 통합에너지 창출의 기폭제가 될 것이 사실이므로, 만약 영호남이 정치적으로 결합하고 정책노선을 함께 가져가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명칭변경 결의안 발의 여ㆍ야 의원 ▷ 한나라당 (18명) 고조흥, 김석준, 김재원, 김충환, 이인기, 이혜훈, 박재완, 박세환, 배일도, 신상진, 심재철, 안상수, 엄호성, 이계진, 이병석, 이해봉, 황진하, 맹형규 의원 ▷ 열린우리당 (5명) 김영춘, 김태홍, 배기선, 염동연, 정성호 의원 ▷ 민주당 (3명) 김효석, 손봉숙, 이상열 의원
▶ 광주학생독립운동 개요
○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조선 여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에 의해 희롱당한 사건으로 인해 광주지역의 민족적 분노는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마침 1929년 11월 3일, 일왕 탄생기념일인 명치절인 동시에 음력으로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민족의 시조 단군이 개국한 개천절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광주고보 학생들은 일본학생ㆍ교직원들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는 식민통치하에 차별교육 철폐를 외치는 항일시위행진으로 확산된다. ○ 1919년 3ㆍ1 독립운동의 열기가 시들어가던 때,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시위는 당시 무력한 패배주의 속에서 절망하던 조선민중에게는 가뭄 속 소나기와 같았다. 광주에서 촉발된 시위와 동맹휴학으로 번져나갔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한 학교는 전국적으로 212개에 달했고, 당시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54,000여명이 함께했다. 이로 인해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검거 1,460여명에 이르는 학생들의 희생이 있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파급되어, 만주 간도와 길림성, 중국 상해, 북경, 일본에서도 격려집회와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 1953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되었고, 기념탑 건립과 국가적 기념행사가 거행됐으나, 1973년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 개정과 함께 학생의 날은 폐지됨. 이후 계속되는 학생의 날 부활시도 끝에 1984년 국회 만장일치로 ‘학생의 날’이 제정되었으나, 부활된 학생의 날은 1929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서가 아니라 어린이날 등과 같은 단순한 기념일로 의미가 격하된 채 오늘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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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 진 歷史- 광주학생항일독립운동
11월에 떠오르는 것은 ?
11월 11일은 우리 아이들의 3대 명절인 빼빼로 데이 이다.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에게 어느 날부터인지 국적 불명의 기념일이 우리의 명절을 대체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이다.
아이들은 발렌타인이 누구인지 화이트가 뭐하는 물건인지 모르지만 그 날은 온통 초코릿과 사탕으로 거리에 넘쳐나고 다음 날 새벽 환경미화원은 그 포장지를 치우느라 비상이 걸릴 정도이다.
빼빼로 데이는 이러한 외세에 맞서 우리의 제과업계가 연출하여 정착시킨 아이들의 3대 명절이다. 11월 11일이 이 과자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날은 너 나 할 것 없이 빼빼로를 들고 설쳐대는데 외세에 맞선 우리만의 명절을 만들어 보려는 창의성과 독립정신에 갈채를 보내야만 할까 ?
그리고 며칠 후면 아이들의 수능 시험이 있다. 대단한 교육열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은 이날 공무원의 출근시간을 늦추고 시험시간에 비행기 이착륙을 금지시키기도 한다.
시험을 잘 치루는 소망을 담은 엿, 찹쌀떡, 휴지 등등의 부적들이 난무하고 시험이 끝나면 거리는 시험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아이들의 행렬이 넘쳐난다.
그렇게 11월은 아이들로 시작해서 아이들로 끝을 보게 되지만 왠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허전함이 가슴 한 켠을 아리게 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일은 개천절이었다.
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그날은 광주학생 독립운동을 기념하여 학생의 날로 제정된 날 이다. 하지만 그 장엄한 역사의 진실은 퇴색 하였고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것은 일본 학생들의 횡포에 분노한 한국학생들의 집단 반발 정도로 폄하되어 기억되고 있을 뿐 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일 그러니까 1929년 11월 3일은 우리의 개천절 이었다. 당시 개천절은 음력 10월 3일이었고 그 날이 바로 개천절이었으며 공교롭게도 일본 메이지왕의 탄신기념일인 메이지절 이었다.
내 나라의 개천절 날 남의 나라 왕의 탄신을 축하하는 기념식을 치루어야만 했던 역사의 비애 를 제대로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본 학생들의 횡포로 촉발되긴 했지만 그 배경에는 당시 학생들의 항일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결사 항전한 항일운동 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개요
광주학생운동의 발발 배경
경제적 배경
1920년대 세계는 극심한 경제공황을 겪게 되었다 . 경제공황의 여파로 일본은 극심한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조선을 식량기지화 하기 위하여 쌀 증산계획과 대대적인 쌀 공출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인의 삶은 피폐해지고 농민들은 땅을 잃고 소작민으로 전락해 갔으며 화전민과 유랑민이 증가하는 듯 극심한 경제난이 가속되었고 당시 학생들은 이런 일제의 만행을 보며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정치적 배경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후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그 동안의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유화적인 문화정치를 실시하여 민심을 추스리려 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무관 출신의 총독을 임명하였고 헌병을 5000명 추가 배치하는 등 무단정치를 계속해 왔다.
당시 사회에서 학생이란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인 3.1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의 독립운동은 모두 학생들이 운동을 주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었고 독립에 대한 열망도 높았으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선각자이며 혁명가 들이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일지
10월 30일 ; 일본학생의 한국여학생 희롱사건.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던 1929년 11월 이전에도 광주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나주-광주간 통학열차 여학생 희롱사건은 같은 해 10월 30일 광주를 출발하여 나주에 도착한 열차에서 일본학생인 후쿠다스에요시, 다나카 등이 한국인 여학생 박기옥, 이광춘 등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고 이에대해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춘재가 일본학생에게 이를 따지면서 패싸움이 전개되었었으며 , 이러한 패싸움과 대치상태는 11월 3일 까지 계속되었다.
11월 3일
11월 3일은 일본의 4대 명절 중의 하나인 메이지절(明治節)이었다. 이 날은 일본왕인 메이지왕의 탄신일로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개최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우리의 개천절인 음력 10월 3일 이었다. 학생들은 우리의 개천절날 우리의 기념식을 가지지 못하고 일본의 명절을 축하해야 하는 현실에 비애를 느꼈다. 메이지절 기념식장에서 학생들은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저항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기념식을 마친 후 조선학생과 일본학생의 충돌은 곳곳에서 이어졌으며 광주중학교 일본인학생이 광주보고 조선학생 최쌍현(崔雙鉉)에게 시비를 걸어와 단도로 얼굴을 찌르는 사건 등 폭력사태가 확산되었다.
이 날의 충돌로 쌍방 간에 부상자가 속출하였고 조선학생들은 긴급회의를 통해서 투쟁의 대상이 일본학생이 아닌 일본제국주의여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우리의 투쟁 대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2.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을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
3. 광주중학생과 대치중인 광주고보생을 해산시키지 말고 광주고보로 집합시켜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으로 돌릴 것.
4. 장재성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할 것.
5. 우리는 앞으로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
11월 4 ~ 5일
폭력충돌사태에 대해서 학생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몰아쳐 조선인 학생 70여 명이 검거되었고 구속 송치되었다. 심지어는 최쌍현 등 병원에 입원한 중상자들 까지도 체포하였지만 일본 학생은 불과 7명을 연행하였고 그나마 곧바로 훈방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인 부상자에 대한 병원의 차별과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 등으로 사태처리의 편파성은 극에 달하였다.
11월 12일
사건이 알려지자 전국의 민족단체와 학생들이 광주학생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11월 12일에는 제 2차 시위가 격렬하게 펼쳐쳤다. 2차 시위가 있은 후 광주시내의 모든 한국인 중등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며 시위에 참가한 학생 500여 명중 200여 명이 검거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측에서는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무더기로 징계하였다. 광주고보는 시위참가 학생 300명을 무기정학에 처했고 시위에 참가한 학생 전원을 유기정학에 처했다.
광주여고보도 70여명의 학생을 무기정학에 처했다.
광주사범은 38명의 학생을 퇴학시켰다.
12월
학생시위는 12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확산하여 개성·인천·원산·평양·함흥·공주 등 주요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으며 1월 중순부터는 도시지역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지역 학교까지 확산되고 중등학교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지역 학교까지 확산되고 중등학교학생뿐만 아니라 보통학교학생까지 참여하였으며 투쟁의 형태도 시험거부·백지동맹·동맹휴학·격문살포·교내시위·가두시위 등 다양해 졌다.
1930년 1월 30일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던 학교 측은 1월 8일 개교하여 학생들의 학년 진급을 위한 시험을 치루었으나 광주고보학생들은 1학년에서 4학년 까지 시험을 거부하였으며 광주여고보 3학년 전체가 백지동맹으로 시험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광주고보생 17명이 퇴학을 당했으며 광주여고보 학생 15명이 퇴학을 당했다.
1월 30일 학교 측은 다시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고 3차 시위를 주도하던 광주고보생 48명이 무더기로 퇴학되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실체는 ?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었다.
1920년대의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항한 항일운동이었으며 광주에서 비롯되었지만 광주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재판을 받거나 퇴학을 당한 학생들과 이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학생 가운데 상당수가 1930년대 초반부터 직접 청년·노동·농민운동에 뛰어들어 민족해방운동의 각 부문에서 활약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장재성과 왕재일도 국내외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 중반 이후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학생운동은 비밀결사의 조직형태로 바뀌어 갔으며 이러한 투쟁은 일제의 패망까지 계속되었고, 해방 이후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그 정신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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